치료는 진단을 따른다

 

우에노 치즈코 저,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4.


  치료는 정확한 진단을 통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시작된다. ‘원인’을, ‘진단’을 잘못하면 되면 치료의 방향은 당연 달라지고 결과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처방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진단의 결과에 의한다. 우선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왜?

  진단을 외면하며 치료의 방향을 자꾸 달리 하려는 상황을 또 맞닥뜨린다. 하지만 충분히 예견한 결과여서 놀랍지는 않다. ‘강남역 살인사건’ 얘기다. <검찰,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 아닌 정신질환 탓, 중일일보> <檢 "'강남역 묻지마 살인' 여성 혐오 범죄 아닌 정신분열증에 의한 범행, 조선일보> <강남역 살인사건은 피다 버린 담배에서 시작됐다, 뉴시스>  2016.7.10일자의 기사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보도의 주체는 검찰이다. 한 정신질환자의 치료부족으로 인한 사건이라고 수사의 결론을 지었다. 애당초 살인자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 이후 피해자에 대한 추모분위기에 즉각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며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말해 왔던 만큼 결론은 ‘여성혐오가 아니에요’가 될 것이 뻔한 것이었다. 그래도 새롭게 추가된 것이 ‘여성이 살인자에게 담배꽁초를 버려서 사건이 시작됐어요’라니.

  정부는 이상하게도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줄기차게 싸움을 붙이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이 아니라 외면해 왔다. 성별 싸움은 오래전부터 행해 왔던 것이고 보육료 문제는 전업주부와 워킹맘간의 싸움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싸움을, 노인과 청년층의 싸움 등 국민들 간 경쟁과 싸움붙이기의 달인이었는데, 이번 ‘여성혐오’ 상황에 관해서는 죽어라고 싸우면 안돼 하고 타이르고 있다. 여성혐오범죄라는 수사결론은 정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나?  

  한창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에 대한 공론의 장을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다. 소모적인 논쟁이든 대안을 가진 논쟁이든 최소한의 성별혐오에 대한 문제인식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분위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더욱 논의가 되어야 한다. 보다 대안적인 차원과 열린 인식은 어쨌든 격한 논쟁을 벌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목소리, 주장이 인터넷 상에서만이 아니라 표면 위에서 펼쳐지게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격한 반응도 있고 타인의 의견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은 분위기도 있지만. 

  어쨌든 여성혐오의 역사는 길고 여성혐오의 종류도 많고 여성혐오의 방식도 많고, 그냥 많다. 일본의 사회학자가 쓴 이 책은 상당히 재밌다.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이 낯설지 않은 것은 ‘쉽게 눈에 띄는’ 일이라는 것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혐오는 일상에서 언제든 일어나고 있고 당연 예술작품에도 드러나 있다. 있는 것을 굳이 없다고 소리치는 심리까지도 이해가 된다. 너무 부끄럽기 때문 아니겠는가.

  부끄럽다는 말에 너무 발끈하지 말자. 여성혐오가 ‘남성’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여성혐오라고 해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혐오만을 비판하지 않는다. 여성들 자신이 ‘여성’을 혐오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들은 성차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길들여진 여성들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여성혐오’라는 말에 남성들 스스로를 ‘가해자’로 치부한다고 발끈하지 말자. 저자의 말대로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남자들은 여자들을 괴롭히는 존재다’가 아니니까.


여성혐오는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의 깊고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핵이다. 성별이원제의 젠더 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너무나도 자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탓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의식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p12~13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저자의 주장대로 어떤 형태로든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속되어 온 여성혐오의 미러링으로 남성혐오가 촉발되었든 어쨌든 이 사회에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는 공존하고 있고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문제는 드러났는데 이에 대한 대안은 커녕 논의의 장조차 치워버리려는 상황에서 이 고통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물론 완벽한 해결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 의지가 있느냐이다. 저자는 ‘여성혐오’를 치료하려면 여성혐오의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저자는 여성혐오의 실체를 아는 것에서부터 여성혐오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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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깊어진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깊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공평하게 적용되는 진리다.   p51

 

   

  시인으로 등단하여 문화평론가, 강사, 번역가, 방송구성작가 등 여러 직업을 경험한 조병준의 포토 에세이 <정당한 분노>는 ‘때로는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의 글에 매그넘의 사진이 실린 이 책에서 제대로 분노를 만날 수 있다.

  매그넘은 세계 각국 사진 작가들이 공동 운영하는 사진 에이전시라고 한다. 1974년 유명한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등에 의해 설립되어 전세계에 사진을 공급하고 있다. 매그넘의 사진들은 세계 각국의 산업, 사회, 정치, 재난, 전쟁 등의 사건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저널리즘 사진이다. 매그넘은 라틴 문학에서는 위대함이라는 의미를 총의 내포적 의미로 강인함을, 샴페인 양식에서는 축하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 책에선 이런 매그넘의 사진을 보는 기쁨이 있다. 물론, 사진의 내용이 기쁜 것은 아니지만.

표지는 체 게바라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체 게바라에 투여된 이미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이 책의 제목과 사진들과 글의 내용들을 짐작할 수 있다.

 

분노.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단어에는 힘이 담겨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분노가 얼마나 치명적인 부정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성현들이 분노하지 말라고 가르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사람이 다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분노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을 때,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냉철해진 머리로 생각을 해도 그 분노가 정당한 분노일 때,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고 머리가 아니라 몸이 비명 지를 때,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때로는 인내가 아니라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라는 이름의 탱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할 때, 약하디 약한 살과 피만 가진 인간이 그 앞을 막아설 수 있는 힘은 분노뿐이다. p13

 

   분노보다도 꽉 막힌 슬픔이 마구 흘러 들어온다. 사진도 글도 이 세상에 대해 그토록 슬프고 억울하고 아프게 살아간 이들에게 느껴지는 죄책감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억울함과 슬픔이 무력감과 겹쳐진다. 한편,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동질감에 나름 위안을 가진다.

 

분노. 그렇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 800킬로미터의 길을 걷는 동안, 나를 채웠던 감정들 중의 가장 큰 부분은 분노였다. 처음엔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시작했다. 그리고 분노라는 이름의 에너지가 언제나 그러하듯, 그 분노는 부메랑처럼 내게로 다시 날아왔다. 나의 어리석음, 나의 편협함, 나의 허약함, 나의 탐욕스러움, 나의 비겁함, 그리고 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인간의 속성들이 다 내 안에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만큼 큰 고통이 또 있을까. 이미 수많은 성현들이 우리에게 가르쳤다. 분노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분노는 아주 쉽게 그 진행방향을 자기 자신을 향해 전환할 수 있다. p102

 

   작가는 10년 동안 인도와 유럽을 방랑하고 2년간 인토 마더 데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했다고 한다. 방랑을 시작한 건 삼십 대의 어느 날이었고 거울에서 ‘주어진 인생 앞에 굴복하기 시작한 사내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은 그 사내가 그 길 위에서 본 또다른 얼굴들일 것이다. 이 글들은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떠날 수’ 있던 사내가 보는 눈이었다. 거울 속 사내의 눈이었다면, 이 글들이 피어날 수 있었을까. 이 글과 작가가 만난 풍경과 사람들은 결국 볼 수밖에, 만날 수밖에 없는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과오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나 자신을 향한 분노는 우리의 숙명이다. 인간은 얼마나 약하면서도 오만한 존재이던가. 그렇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때로 나 자신을 향한 ‘정당한 분노’는 우리의 의무가 될 때도 있다. 때로는 내 스스로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죄는 내게 있음을, 따라서 벌도 내가 받아야 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분노의 부정적 에너지가 내 인생을 끝없이 갉아먹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03~104

 

   그리고 거울을 보던 사내는 길 위에서 체 게바라를 떠올린다. 길을 걷는 동안 내도록 ‘분노’의 감정을 느낀 그 사내는 ‘분노’를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느낀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불의에 부패에 부도덕에 맞설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한다.

 

가난, 전쟁, 질병, 소외, 폭력, 억압, 차별, 탐욕…….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그 수많은 불의와 불행들을 우리는 자꾸 외면하려 합니다. 혁명을 꿈꾸기에 세상은 너무 단단해졌다고 한숨만 쉬며,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게 눈 감고 살겠노라고 비겁하게 도망칩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p188

 

good reason, '합당한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선한 이유‘로 풀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혁명이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건 거기에 ’선한 의도‘, 즉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애정이 담보되어 있었기에 당신의 븐노는 정당한 분노가 될 수 있었고, 당신의 혁명은 신화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무쪼록 제가 이 사진들에 첨부한 중언부언들에도 또한 그렇게 ’선한 이유‘가 담겨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거기에 ’선한 의도‘가 먼저 담가지 않으면 또 다른 폭력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걸 알 만큼은 저도 세상을 살았습니다. p189

 

   폭격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찌르는 햇볕이 나왔지만 반갑기보다는 답답하다. 비가 내리는 동안 만들어 낸, 휩쓸고 지나간 상처들이 눈에 쟁쟁하게 보이는데 그것을 뛰어넘어 또다른 일들이 마구 만들어진다. 천재지변은 인재를 넘지 못한다고 하는 이는 ‘인재’를 만들어낸 주체가 아닌가. 천재지변을 더욱 강화시키는 인재의 모든 주체자들에게 ‘정당한 분노’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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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생각의 지도-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조, 최인철 옮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관해 문과와 이과생의 반응이 다른 유머코드를 조금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느끼게 된다. 똑같은 장면을 두고도 서로의 경험과 이해에 따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어느 순간 너와 나에 대한 성격과 성향을 확정짓게 된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도 이와 같은 것 아닐까. 내가 배워 온 것대로 내가 아는 선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게 되는 것.

   동양과 서양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고 한다.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른 지 많이도 이야기되기도 한 것 같은데 이미 우리의 뇌리에는 동양과 서양은 무조건 다르다가 지배해 버린 듯하다. 문화적 차이인지, 유전적 차이인지에 관한 논쟁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다르다’.

   이 책은 동양과 사양의 ‘사고방식’의 차이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저자인 리처드 니스벳은 문화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는 입장이며 심리학자로 이것을 심리적 차이로 접근·분석하여 총9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내는 차이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특정한 사회적 행위들은 특정한 세계관을 가져오고, 그 세계관은 특정한 사고 과정을 유발하며, 그 사고 과정은 역으로 원래의 사회적 행위들과 세계관을 다시 강화시킨다. 이런 항상성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 사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또한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어떻게 사고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고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지를 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p20

 

    리처드 니스벳은 서양은 개인주의적 관점을 동양은 개인과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부각시키며 이것은 일찌감치 아이들의 교육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심리학자인 도드 코헨과 알렉스 건즈의 연구 결과 또한 동양인들은 사건에 대해 종합적인 관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반면 서양인들은 주로 자신의 관점, 즉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동양적 사고에서 바라본 개인은 구체적 맥락 속에 있는 존재로 구체적인 어떤 사람과 구체적인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을 낯설게 생각하는데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이 차이를 ‘저맥락’ 사회와 ‘고맥락’ 사회로 구분 설명했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떠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 인간이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와 저자가 실험한 연구들을 종합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제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데 익숙하며, 세상이 복잡하고 매우 가변적인 곳이라 믿는다. 또한 세상의 구성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고, 세상사는 양극단 사이에서 순환을 반복하는 형태로 진행되며 그러한 사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협동과 조정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p105~106

 

   어쨌든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가. 저자는 이것은 서로 다른 생화환경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서로 다른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체제를 초래했다고 설명한다. 경제적인 차이가 사회구조의 차이로 사회구조적 차이가 사회의 규범과 육아방식을 만들어내며 환경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을 결정지었다고. 그리고 서로 다른 이해가 결국 지각과 사고 과정(인식론)의 차이를 가져왔다. 그래서 이런 차이가 뭐 어쨌단 말인가,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사회의 인종적 다양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옹호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공존함으로써 교육적 환경과 업무 환경이 더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는, 상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면 어떤 문제든지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 방식과 기술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든지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해결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해결할 때 문제 해결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222

 

   차이는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도 '우위'의 문제도 아니다. 각각은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익숙하게 배우고 살아온 대로 기준을 정해 상황을 해결하고 판단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잘 알며 어느 때인가는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말로 서로 이해와 존중하며 살아나가는 것 같았는데 점점 서로 자문화를 강조하며 갈등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 이성과 감성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가 왜 차이를 차별과 공격으로 인식하고 인식한 대로 적대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강대국의 논리, 혹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어떤 문화권의 목소리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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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을 책임져라!

 

  

 서은국, 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밤사이 몰아치는 빗소리에 ‘밖에 나갈 일만 없다면 집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참 좋다. 행복하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비를 맞고 있다면, 비록 우산이 있다 하더라도 ‘아 집까지 언제 가, 짜증나’라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비와 빗소리에 느끼는 내 마음의 상대성에 다시 묻는다. 너는 지금 정말 행복하니?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 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p10

 

   그래.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 사는 것,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소망이다. 그런데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인간인데 이토록 행복감이 박복하다면 이론에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행복한 인간만 살아남게 설계되어 있다면 결국 ‘행복’이라는 생존조건은 결과적으로 필연적이었던 건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조언이 정말로 참된 깨달음과 인생전환의 계기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흥’ 콧방귀 나게 하는 말이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하고 싶으냐고 화가 날 참이다. 하지만 ‘행복’에 관한 한 그것은 마음가짐이라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의, 인식의 문제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역시나 그런 전개를 할려 치면 이따위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모르냐고?!라고 버럭 소리치고 책을 던져 버릴 참이었는데.........

 

불행한 사람은 긍정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을 고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런 식의 행복 지침서를 읽고 행복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려운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특성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대로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체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p16

 

   시작부터 이러니 책을 던질 수가 없다. 고스란히 손에 들고 어떤 반전으로 향하는지 지켜봐야 했다.

   작가는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자연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생각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 역시도 인간은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 추구라고 보았다. 오랫동안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철학자의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저자는 행복 역시도 생존에 필요한 도구라고 말한다. 생명체의 존재는 생존이라는 점에서 보면 행복은 도구이며 단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행복하다는 느낌을 경험해야 또다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최근의 일들만이 현재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저자의 대학생들의 행복감에 대한 추적 연구 결과 약 3개월이었다. 그렇기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이 반복·지속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머리는 ‘불행하지 않은 것’과 ‘행복한 것’의 질적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생수 한 병은 갈증의 고통을 없애주지만, 갈증이 가신 사람에게 물은 더 이상 행복을 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돈이나 건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은 사막에서의 물과 비슷하다. 일상의 불편과 고통을 줄이는 데는 효력이 있지만, 결핍에서 벗어난 인생을 더 유의미하게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p115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인데 사람들은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고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 뒤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살면서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인생의 변화를 통해 생기는 행복의 총량을 과대평가하며 이 행복의 ‘지속성’측면을 빼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타인을 의식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 더 행복의 기준이 ‘남’을 향해 있기도 하고 또한 즐거움과 쾌락에 대해 그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하며 도덕적, 이상주의적, 철학적인 ‘행복’만을 쫓기도 하다.

 

행복도 오컴의 날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가치나 이상, 혹은 도덕적 지침이 아니다. 천연의 행복은 레몬의 신맛처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쾌락적 즐거움이 그 중심에 있다.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뒷전에 두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p186

 

   잘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 또한 ‘생각’ ‘마음가짐’의 다른 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어차피 삶에 대한 생각, 행복에 대한 기준은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이다.

   중산층의 정의에 프랑스는 ①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②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을 것 ③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을 것 ④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⑤ '공분' 에 의연히 참여할 것 ⑥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이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기준이라 한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은 ①페어플레이를 할 것 ②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③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④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⑤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어떤가.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이 ①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②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③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것 ④그 외,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직장인 대상 설문결과이긴 하지만 사회분위기가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왔음은 분명하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렇게 생각하도록 이끌어왔기에 우린 스스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① 부채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②월급여 500만원 이상 ③자동차는 2,000 CC급 중형차 소유 ④예금액 잔고 1 억원 이상 보유 ⑤해외여행 1년에 한차례 이상 다닐 것.....

   행복이 도구이자 수단이라면, 생존을 위한 도구인데 한국인의 도구는 어찌 보면 쉽게 이룰 수 있는 수단 아닌가? 이렇게 정확한 표준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며 이것을 행복을 유전자로 전수하는 한국인들은 언제쯤 참행복을 느끼는 유전자를 몸 속에 저장하고 살아가게 될지 궁금해진다. 프랑스보다, 미국보다, 영국보다 쉽게 수치화 할 수 있으니 의지만 있다면 이룰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 기가 막히다는 다른 말일 뿐.

   행복의 요인은 해도 적어도 절대적 불행의 요인이 제거된다면 행복에 대한 감흥은 달라질 수 있다. 심각하게 불행의 척도만을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불행까지도 장려하는 대한민국의 분위기가 한국인의 행복의 기원을 새로 쓰고 있다. 이런 ‘행복’만을 유전자에 새기는 한국인의 미래가 참으로 암담할 뿐이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들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노력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생각과 마음가짐을 달리 해서 만들어 가야 할 일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하는 이다. 이 책의 진화론적 설명을 빌자면, 그렇게 생각한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불행의 요인을 제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될 일이다. 잠재적 불행한 민족을 양성하지 않으려면......죽어라고 개인보고 변해야 한다고 할 일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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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읽기의 자화상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서정주, 자화상 中 -


  누가 뭐라 한들 아는 것만 눈에 보이고 결국엔 관심 있는 것에 더 눈이 가고 아는 선에서 삐딱하게 봐진다. 결국 수없이 많은 말들을 듣고 많은 글들을 읽는대도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끄집어내고 내가 아는 것을 더 알도록 보태는 것이지 낯설고 모르는 것에 관심을 옮겨가는 일은 즉각적이지도 쉽게 되지도 않는 일이다. 그래서 이 시가 떠올랐나. 어떤 이는 죄인을 어떤 이는 천치를 읽고 가는. 시인의 변절은 그 행동은 시에 맺힌 진정성까지 감하게 하는.

  책이 주는 것, 작가가 말하는 것을 습득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수용의 주체는 ‘나’인 것이다. 수많은 책읽기의 방식은 취향의 동류의식을 건들여 기본 베이스를 공고히 해주는 것에 얼마쯤 더 가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아니 책읽기를 이야기하는 책을 왜 읽는가를 새삼 생각해본다. ‘다른 방식’을 알기 위함인지 ‘같은 방식’을 찾기 위함인지.



   


  ‘왜’ 시리즈의 제목 때문에 한 명의 작가가 쓴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 권의 책의 작가가 다르고 출판사도 다른 책이었다. 어떻게 세 명이 같은,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출판 일시도 비슷하다.

  동화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는 네 권을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힘은 사실 상당히 제한적이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생각의 방법과 길은 다양하구나라는 모순된 생각을 같이 했다. 선택하는 동화가 너무 같다는 것이 전자의 이유고 각각의 해석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이 후자의 이유다. 같은 책을 보고도 누구는 인간 행동의 심리에 중점을, 누구는 역사적인 상황을, 또 누구는 사회구조를 세밀하게 보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관심을 두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잘 흘러가게 되는 것일 게다.


  


  널리 알려진 동화는 한정적이다. 고전 동화의 대표로 손꼽히는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교훈’과 ‘깨달음’의 전도사로 활약하다 어느 지점부터는 주인공을 바꾸는 역할극으로 교훈의 반전을 시도했다. 그리고 또 어느 지점에선 ‘삐딱’한 시선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각의 미묘한 시선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 다양성이 세상을 움직이는 한 축에 있음은 분명한데 그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 것은 그것이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이 분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 상태로 경직되어 얼마나 또 오래가게 될런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몰지각하고 비윤리적인 것은 제외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수많은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비윤리적이고 몰지각하고 타당하지 않은 ‘견해’를 알고 스킵할 수는 있게 되리라 본다. 생각해보니 책읽기는 결국은 돌고 돌아 내 취향을 공고히 하는 장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훅’ 들어오는 글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선호의 취향을 떠나 수많은 독서가, 독서법이 취향을 뭉치는 일이 되긴 하더라도 다른 것에 대한 고개 끄덕임과 몰상식과 비윤리적인 것을 선별해내는 힘이 되기를. 선별력이 워낙 강한 나라에서 살아가기에 쓰잘데기 없는 걱정에 책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이 쓸데없는 걱정도 스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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