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정신과 삶, 인생을 지배하다
아니타 로딕 Anita Roddick, <영적인 비즈니스><지구의 생명물의 위기> 저자
영국의 리틀햄프턴에서 태어난 그녀의 부모님은 영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인이다. 이러한 환경이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미친 것인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히피들과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녀다. 히피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자유로움, 아웃사이더, 방랑이 떠오르는 것처럼, 무언가에 정착하려 하지 않는 그녀의 기질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도드라진 우리 삶에서 자신만의 기질과 특성을 잘 버무려 살아낸 듯하다. 스스로가 선택하려 하는 것인지 깊이 내재되어 있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자연 발휘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 자신도 인생의 기준에서 이 아웃사이더를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아직도 왕이 존재하는 영국이란 나라에서 2003년 엘리자베스 2세로 부터 작위를 수여받다!
2007년 9월 10일, 64세에 뇌출혈로 사망하자 영국 전체가 추모 열기에 휩싸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가 직접 나서 추모하였고, 공영방송 BBC는 메인뉴스 두번째 꼭지로 보도하였고 영국 굴지의 기업 총수들이 TV에 나와 그녀를 애도하였고, 그린피스 사무총장은 ‘사업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인물’이라며 로딕을 치켜세웠다.
이렇게 아니타 로딕이 영국에, 세상에 유명해진 것은 그녀가 기업을 운영하면서이다. 그녀는 ‘바디샵’이라는 기업을 운영한 CEO이며 그녀의 바디샵은 영국에서는 두번째로 신뢰받는 기업이자, 세계에서 28번째로 높은 브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전세계 1,800개 매장에서 24개국어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바디샵은 규모뿐만 아니라 바디샵의 운영방식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의 바디샵은 ‘윤리적인’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바디샵은 1976년 시작되었다. 영국 해변 도시 브라이튼의 구멍가게가 첫 출발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새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 때마다 “남와 같은 길을 가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는 어머니의 따스한 가르침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해변에서 밥과 술을 팔며 딸 셋과 막내 아들을 키운 억척 어머니였고 10살에 돌아가신 그녀의 새 아버지는 알고 보니 자신과 남동생의 친부였다. 그녀는 선생이라는 안정된 생활을 그만두고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배낭여행을 떠나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느끼고 배운 것이 자신의 신념을 만들었고 실제 생활로 이어졌다. 여행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충격을 받아 스위스에 가서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완전 거지꼴로 나타난 딸을 보고 어머니는 찍어둔 사윗감 고든을 소개했고 그날로 그들은 같이 생활했다.
어느날 그녀의 남편 고든이 2년 계획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뉴욕까지 말을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을 했다. 이 여행계획은 그가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것이었기 때문에 로딕은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4세와 6세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현실을 안고 있었다. 남편은 어릴 적 낭만적 꿈을 펼치는 동안 아니타는 자녀 양육을 위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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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화장품 샵은 겨우 테이블 하나 들여놓을 만큼 좁은 점포였다. 물론 그녀는 여기에 익숙하다. 그녀의 부모님은 카페를 운영했던 것이다. 25파운드를 들여 디자인한 로고가 그려진 라벨을 전부 손으로 붙이고 내용물은 부엌에서 그녀가 직접 만든 것으로 프라스틱 용기는 병원에서 소변검사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화장품 용기에 대해 미적인 디자인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그녀의 화장품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바디샵의 창업자 아니타 로딕의 창업 이념과 기업 윤리가 드러난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과 사업 비용으로 이러한 용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한번 쓰고 나면 버릴 용기에 돈을 들이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화장품 산업을 ‘혐오’했다. 이 악마같은 산업이 여성들에게 허영과 이룰 수 없는 꿈을 팔고 속임수로 착취한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가 화장품 샵이라니.
그녀는 아름다움은 패션잡지에 나올 얼굴과 몸매라기보다는 건강한 활력과 자존심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사업이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존재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돈을 벌기 위해 동물을 학대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그녀의 사업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화장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혀 화학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코코아 오일, 아몬드, 알로에 베라와 같은 천연 원료를 사용하였다. 생산에서 폐기되는 과정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상품을 만들지 않고 동물이나 개발도상국에 나쁜 영향을 주는 상품 등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한 ‘더바디샵 헌장’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제품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아프리카와 남미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이 하는 것처럼 자연을 소재로 한 화장품을 개발해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상품이라는 컨셉은 판매활동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더바디샵은 환경보호에 맞추어져 운영되고 있다. 꾸준히 환경보호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실천하고 있다. 화장품 실험에 동물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물 실험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천연 재료를 활용한 제품만들기, 화장품 용기의 리사이클과 리필 서비스들을 실시했다. 이와 같이 더바디샵은 기업의 경영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운영되고 있다.
또한 아니타 로딕은 바디샵의 성장에 공동체의 성장을 함께 녹여 내고 있다. 그녀는 사회적 빈곤층과 소외계층, 사회적 약자, 여성과 인권을 존중하도록 이끄는 캠페인에 앞장서는 등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녀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비즈니스 방법을 펼쳤다. 이를 위해 재단을 설립해 180여 개의 단체에 350만 파운드 이상을 기부하였다(1990년 루마니아의 고아원에 방문한 뒤 COTE(Chiledren On The Edge)라는 기관을 설립해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을 도움). 또 인권상을 설립하여 인권 단체에 상금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아니타 로딕은 별볼일없는 여성 주부에서 비즈니스우먼으로, 인권활동가로, 환경보호운동가로 활동해 왔다. 당시 단지 그녀가 비즈니스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창업에 대해 의문을 표한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교사생활을 하였고 UN에서 일하기도 했다. 특히 그녀가 기업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는 생각들은 UN의 여성인권부에서 일했던 경험이 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근검절약 정신도 스며 있었을 것이고 평화를 부르짖으며 세계를 떠돌아다닌 히피 생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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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스스로도 바디샵의 성공은 제품이 아니라 ‘이념’이라고 말하듯 그녀는 상거래에 관해 초짜였을 뿐이지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초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서 가치를 잘 판매한 기업가로 남을 것이다.
2007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65세였다. 2004년 간경변증과 c형 간염 진단을 받고 c형 간염 예방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사망 원인은 급성뇌출혈이었다. 그녀는 자녀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전의 약속대로 평생 모은 전제산 5,100만 파운드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참고 자료
•알라딘, yes24 저자소개
•바디숍의 전설, 아니타 로딕, 한겨레21 , 2005. 12.6
•http://www.changup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50
•http://ko.wikipedia.org/wiki/아니타 로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