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네’, 성격의 ‘아니오’


이얼 프레스., 양심을 보았다-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인생에서 나는 ‘예’와 ‘아니오’ 중 어느 단어를 자주 내뱉었을까. 습관처럼 ‘네’를, 성격처럼 ‘아니오’를 더 말했을까. 습관이든 성격이든 그 말은 진심이었고, 그 말이 나가기까지의 상황은 평범한 것이었을까. 바뀌었어야 할 ‘네’와 ‘아니오’ 때문에 잠들지 못한 밤은 없었을까. 후회로 뒤척이는 것을 떠나, 나의 그 대답으로 심각하고 심각한 어떤 일이 파생된 적은 없을까.

 

   이 글은 부드럽다. 하지만 내용은 강직하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는 이야기이니까. 그 ‘아니오’는 이유없는 반대가 아니라, 지랄맞은 성격때문에 일단 무조건 ‘싫어’부터 내뱉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강요받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내뱉는 ‘아니오’”니까.

  탐사보도 전문기자이기도 한 작가는 이렇듯 ‘집단의 획일성에 반대’하는, ‘초월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어떤 경우라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설사 그런 저항의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큰 사회적 변화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치있는 저항이었을까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버렸으니까. 저자는 집단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해소할 수 없는 긴장이 가득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세워둔 자신이 충성심 혹은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의무와 충돌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우리는 양심을 깨끗하게 간직한 채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왔으며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어떤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한다, 양심을 지키라고.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는 경고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자신의 상관을 당혹스럽게 만들지 말라고. 혹은 자신의 경력과 명성, 나아가 가족의 평온함과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지 말라고. p13


   저자는 총4장에서 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넨다. 1장에선 거부자의 삶이다. 이들은 당연히 집행해야 할 법을 의도적으로 어김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구한다. 2장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인종적·민족적 분열 상황에서 경계를 초월하여 행동한 세르비아이인의 일화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법보다 결코 약하지 않은 공동체라는 압박에 저항’한 이야기로 전한다. 3장은 이스라엘 군대의 점령지 근무를 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보다 내면적 투쟁을 행한 군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4장은 투자전문가의 이야기다. 3장까지의 흐름을 볼 때, 투자가의 이야기에 아니,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쉽게 맞닥뜨리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금융상품이 고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리란 판단에 상품 판매를 거부한 투자전문가의 이야기니까.

  사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경우 직장과 군대와 국가의 권위에 대한 대항을 얘기한다. 전쟁을 얘기하며 특히, 특수한 상황이란 전제를 가지고 그 상황에서를 강조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일상에서도 ‘예’가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인들 ‘아니오’라는 말이 아닌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양심의 문제이기 전에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이 너무도 사회에 길들여지고 제도화된 채 마음에 심어지는 까닭에 개인의 ‘참’생각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근 반복되는 대한민국의 행정관료들이 행하는 그 모든 악행과 막말들이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논리와 패권의식의 생활에 길들여져 ‘아니오’라는 말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채 “예스맨”이 되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신념이나 정체성이 보편성을 잃고 1%의 사회 속의 행동패턴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행정관료들 중에선 대한민국의 사람들 중에선, 이 책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바우만이 이렇게 주장했다. “잔인함은 개인의 개성보다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특정한 유형들과 훨씬 더 놓은 상관성을 가진다.” 어째, 그런 종류의 인간들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다. 하지만 상관을 할 수 없는 게, 그들이 내 생활의 모든 제도들을 만들고 있는데, 어떻게 무관심, 무심해질 수 있을까. 그냥도 아니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데.

  그들은 똑똑하고 머리 좋다고 하는데 변화의 조짐이고 양심을 추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심리학자 앙드레 모딜리어니와 르랑스와 로샤는 “권위에 저항하는 행위는 추상적인 대의명분을 따지는 장엄한 행동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에게는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어떤 ‘작고 소박한 행동들’로 흔히 시작한다”고 한다는데, 그들은 “장엄한 행동”에 눈을 더 돌리고 있다는 게 문제다.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기계 장치들이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는 일에 대해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유일한 의무는 언제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엉뚱하고 어이없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추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추진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의와는 유리되어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소로는 양심적 명령 거부자로서 였지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법의 틀을 깨는 행위는 자기 목적에 부합할 때는 좋지만 다른 편의 목적에 부합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p213- 이스라엘 한 예비군


  대한민국은 양심에 따라 저항하는 이가 원체 없는 관계로 정치인, 관료와 권력가들 특정 소수만이 나날이 행복하게 살기 편한 곳이다. 그렇기에 양심에 따라 법을 거부하는,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조차 되지 못한 채, 보다 보편적인 정의와 합리적인 법에 대한 요구를 하는 정말이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그저 “찌질하게 정부에게 대드는” 별볼일 없는 특정세력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저항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가장 저항을 많이 하는 보통 사람들, 민중들이니까.


"우리가 국가의 법률을 부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법의 존재를 요구하는 것은, 정의를 위한 고귀한 투쟁만이 아니라 범죄 행위까지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저항의 가치와 저항의 도덕적 필요성을 결정하는 것은 저항의 내용이다.“ p237


  그렇다면 저항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 ‘저항’이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일지. 이 말이 와 닿았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무엇이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지 알아요? 내가 가르쳐줄게요. 그건 바로 고통이에요, 고통. p283


물론, 현실에서 고통이 언제나 성격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고통을 격고 나서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또 고통 때문에 독불장군이 될 수도 있고 원한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레일라의 경우에 고통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유복하긴 했지만 은둔 생활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 동안 그녀의 내면에는 수동적인 기질이 생겼다. 그런데 고통이 그것을 말끔하게 털어냈다. p283


   이 책에서 저자의 관심을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면서도 마음이 평온하다. 이 책의 느낌이 그렇다. 편안하게 읽히는 문체가 그렇게 이끌어주고 생각을 하게끔 하는 지점의 여러 의문들이 점층적으로 나아가 단편적인 사고에 머무르지 않게 해준다. 그로 인해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더욱 많아지기도 했지만. 이 책의 원제는 양심을 보았다가 아니라 Beautiful Souls이다. 읽다 보면 힘차고 강건한 <양심을 보았다>보다 <Beautiful Souls>이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양심에 따라 저항한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고뇌와 행동들에서 이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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