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지 상승 중
<나는 분노한다>는 신문사의 특별취재팀들이 엮은 책이다. 매일경제신문사는 분노의 시대 특별취재팀을 꾸려 한국사회의 분노의 모습들을 취재하고 이 책을 펴냈다. 다시 한번 확인, 매일경제신문사라고?
한국인의 분노의 이유를 알기 위해 1,200명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와 설문조사, 통계조사, 국내외 전문가 인터뷰와 현장 취재를 전체 5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정리하고 있다. 1장 ‘행복이란 파랑새는 없다’는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살펴보는데 변화하는 행복지수, 지역차에 따른 행복지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2장 ‘돈이 있어도 즐길 수는 없다’ 중산층 역시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라는 것과 그것의 대표적인 이유가 ‘주택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장 ‘희망의 사다리는 왜 걷어차였나’는 희망보다는 분노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의 모습에 관해 말하고 있다. 부자동네로 손꼽히는 강남의 분노와 세대갈등의 문제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4장 ‘전 세계를 뒤덮은 99% 분노 에너지’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전 세계에 확산된 분노와 그 이유, 진화된 대응으로 맞서는 자본주의의 모습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5장 ‘국민이 바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은 분노에 대한 해법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여론에서는 성격의 문제, 분노조절장애라고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있지만, 이미 느끼고 있듯이 이 분노는 ‘개인’의 ‘이상’ ‘비정상’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이 분노에 물들어 있는 상황인데, 그럼 모두가 이상한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겪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국민 모두를 이상행동으로 몰아가는 요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인의 분노는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렵거나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한 경우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녀노소와 빈부의 격차를 넘어선 한국인의 공통심리로 굳어져가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사회 어디에나 분노가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용・교육・복지분야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광범한 분노벨트가 형성돼 있다.
여기에는 ‘아무리 정직하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한국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 한몫을 한다.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굴절된 현실은 사람들을 경쟁적인 지대추구 행위로 몰아간다. 지대추구행위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비 등 비생산적 활동을 펼침으로써 공공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자기 이익을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p5~6
빈곤이 가속화되고,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력해도 좌절감만을 얻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냉전체제의 경쟁의 승리자이다. 이 자본주의의 승리 이유는 행복을 추구하는데 적합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빈곤하지 않고 잘 사는 삶이었을 텐데, 빈곤한 삶을 살고 그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경제적인 위기가 삶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돈이 있어도 즐길 수 없는 사회다. 교육비 등 ‘강요된 소비’에 묶여 여가비가 없고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이것은 안정적이지 않은, 교육과 일자리가 연결되는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국가 시스템의 문제다. 또한 나라 전체가 ‘주거불안’을 겪는 상황도 문제이다. 집이 있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집값이 오른다와 집값은 꺼진다라는 이야기 속에 상반된 기대감이 분노를 더욱 재생산하는 요인이 된다.
세계는 불평등, 불균형의 확대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월가점령’ 시위의 캐치프레이즈는 “나는 99%다”였는데 당연 상위 1%에 대한 쏠림, 지나친 불평등에 대한 것이었다. 전세계적인 이 분노를 진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해결책을 논의하는데 먼저 낙수효과였다. 이것은 부자들, 대기업이 돈을 잘 벌면 돈을 더 잘 쓰게 되고 그 돈이 빈곤층과 중소기업에게로 가서 소득양극화가 해소되고 경기가 부양된다는 생각이다. 당연, 실패했다. 그리고 선거와 맞물려 실행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복지공약을 제시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이렇듯 실패만 하게 되는 대안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이 책은 두 가지를 든다.
첫째, 위기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이유에만 관심을 쏟아보면, 누가 어떻게 오작동을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해진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똑같은 실수가 반복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둘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허점과 모순투성이’라고 아무리 헐뜯어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중상주의나 공산주의는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주도권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국가 자본주의, 기업 자본주의 등도 마찬가지다. 100%의 치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혹자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남유럽 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또한 정도를 지나치면 붕괴를 앞당길 수 있다. 결국 해답은 균형 잡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다. p206
자본주의를 넘은 공감자본주의를 해법으로 내세운다. 도대체 공감자본주의는 또 뭔가. 당연 무엇이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만, 이 말도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어체의 표현으로만 여겨진다.
사회 구성원의 합의와 공감을 전제로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낙오자도 인정할 수 있는 경쟁, 패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승부, 실패자도 수긍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주는 자본주의다.
공감 자본주의는 경제적 약자 보호에 초점이 맞춰진 ‘온정적인 자본주의’, ‘인간미 있는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고비용 저효율’ 사회를 ‘저비용 고효율’로 바꾸자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 예컨대, 공공기능을 강화해 주거, 교육비 등의 부담을 구조적으로 줄여주고, 공정한 룰에 따른 경쟁을 활성화시킴으로써 효율성을 증대시키자는 아이디어다. p265
특별취재팀의 취재에 따른 이 대안 제시대로 본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권은 이 대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공감’이란 말은 한국 사회에서 갈피를 잃은 지 오래다. 타인에게 공감할 여유가 없다. 나 자신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총체적인 난국에서 자꾸 ‘개인의 일탈’을 강조한다. 분노 게이지의 상승을 개인의 미성숙한 성향 탓으로 돌린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분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낳고, 그 폐해가 또 다른 폐해를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구조화, 집단화한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한꺼번에 분출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책에 숱하게 등장하는 교훈이다. p278
최근, 정치·사회에 관한 책들은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이게도 똑같다. 이토록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라니 해답을 향해 바로 갈 수 있을 법도 한데, 여전히 답으로 가지 못하는 것, 그 총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원인과 비결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