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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퇼레, 자살가게


   이런 가게가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죽는 방법을 검색하며 함께 죽을 사람을 찾는 요즘의 분위기에서 온라인을 벗어난 오프라인에서 

‘자살’ 방법을 친절히 안내해주는 가게가 등장한다면!

  자살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자살을 희망하는 이들이 있기에 이들을 위해 철저한 맞춤서비스를 행하는 가게가 있다. 이 가게는 가문 대대로 자살용품을 판매해왔고 여전히 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수익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이용자가 많다는 얘기다. 

  이 상점의 판매물품을 한번 보자. 어떤 목매달기 총과 칼, 밧줄, 독약은 물론이고 독이 묻은 사과와 투신용 시멘트 등 죽을 수 있는 모든 상품이 준비되어 있다. 상품을 팔기 위해 손님들을 위해 친절과 적극적인 서비스를 행한다. 죽지 않으면 전액 환불!까지도 해주는 극강의 서비스 마인드로 상점을 운영하는 이 가게에 가업을 이을 아들 알랑이 태어난다. 주인인 미시마 튀바슈는 칼과 총의 전문가이고, 아내인 뤼크레스는 독극물 전문가이다. 장남 뱅상과 딸 마릴린이 있기에 굳이 알랑이 태어나지 않아도 가업을 이을 자식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그저 알랑은 오직 자살용품을 시험해보다 태어났을 뿐이다.

  알랑은 출생부터 이 가게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태어났다. 그는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애가 웃네!”라고 하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좋아하지만 이 가게에선 발끈한다. 웃는 게 아니라 입가 주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긴다. “튀바슈 가문은 절대로 웃지 않는다구요”


"벌받고 있는 겁니다. 학교에서 자살자에 대한 질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쟤가 뭐란 줄 아십니까? 아 글쎄, '자, 살자!' 고 하는 사람이라나 뭐라나,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p39


  알랑은 가게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웃는 인상으로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가게 인사법은 “명복을 빕니다”라고 가르쳐 주고 손님들 앞에서 흥얼거리지 말고 웃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가게는 음침한데도 화사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푸른 하늘 그림을 그리고 좋은 꿈꾸라고 인사한다. 탁월한 긍정과 낙천적인 알랑의 행동에 가족은 걱정이 한가득일 수밖에 없다. 보통의 가정에 괴짜 하나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듯 괴짜 가족에 보통의 아이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가족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욱 더 알랑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사고치는 개구쟁이 아이가 어떠한 구박에도 주눅들지 않고 여전히 개구쟁이짓에 빠져 있듯이 알랑은, 자기만의 개구진 활동에 열심이다.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쨌든 가족들에게 알랑의 행동들이 ‘튀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알랑과 어떻게 다른가. 큰아들 뱅상은 반 고흐에서 딴 이름인데 그는 식욕부진증 환자로 한시라도 붕대를 감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거라고 믿으며 어두운 그림만 그린다. 뱅상은 삶을 끝장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유원지, 자살 테마파크 모형물을 만들고 있다. 이곳에선 돈을 내고 사격장에서 과녁이 되거나 감전사, 익사 등의 방법으로 죽을 수 있다.

  마릴린은 먼로의 이름을 연상하게 하지만 먼로와는 달리 통통하고 거북스런 몸매를 가지고 있다. 마릴린은 이런 자신을 창피해하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티셔츠에 ‘사는 게 지겨워’라는 문구를 달고 있다. 마릴린은 생일선물로 받은 주사기를 가지고 침샘에서 독이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자살자에게 죽음의 키스를 판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엔 그 사람에게 키스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어쩐지 음침하고 우울할 것만 같은 이 가게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알랑의 문제적인 행동들 때문에 시종일관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가득하고 코믹한 느낌이 가득하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는 작가 장 퇼레의 글솜씨가 책을 보는 내내 웃게 한다. 그런 마음이 된 듯 가족들 역시도 어느덧 원하지도 않게 알랑의 긍정에 중독되어 삶에 대한 희열을  찾아가고 심지어는 알랑이 없는 동안엔 알랑을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서툴거나 부족하면 서툴고 부족한 그대로 삶은 스스로 담당하는 몫이 있는 법입니다. 삶에 그 이상 지나친 것을 바라선 안 되는 거예요. 다들 그 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삶이 말살하려 드는 겁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좋은 면에서 받아들이는 편이 나아요. 목매달 밧줄이나 권총 따위는 여기 이곳에 맡겨두고 말이죠. 요즘 손님처럼 겁에 질리고 불안에 떨 때 밧줄이든 뭐든 목에 걸고 어디 한번 잡아당겨보세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다 의자에서 떨어져 무릎 깨지는 건 순간이죠. 무릎 아프지 않으세요?" p154


  자살가게에서 이런 말을 할 거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자살가게는 희망을 파는 가게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알랑에게는?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고 있다는 알랑의 묘사에 웃음띤 알랑을 상상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그 묘한 느낌을 흔들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냉소와 슬픔이 섞인 그림이었다. 가족들에게서 느낀 것이 코믹이었으니까. 이 결말을 생각했을까. 얼마간 자살가게의 살자가게로의 변화는 예측하기도 했지만.


 아이는 한 손으로 버티며 꾸준히 올라간다. 이제 가족과의 거리는 불과 3미터 남짓. 스웨터를 입은 등짝과 바지 위로 네온의 광고문안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알랑은 붕배를 단단히 틀어쥔 채, 지난 일들에 대한 그 어떠한 아쉬움이나 미움도 없는 덤덤한 마음으로 저 위 가족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흔들흔들 오르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저들 모두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갑작스런 신념, 저 얼굴들에 빛나는 환한 웃음이야말로 알랑의 일생일대 걸작이나 마찬가지다. 2미터가 남자 누나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튀바슈 부인은 난데없이 어린 시절 유치원 마당에 들어서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듯 가까워지는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알랑의 임무는 완수된 것. 순간……그는 손을 놓는다! p209


   희망에 전염된, 다시 웃음을 찾은 가족들과 사람들은 이제 찾은 행복한 기운을 잘 유지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알랑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울에 허덕일 때,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이 힘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마음이 되어 알랑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 허무란.

 

    "……잠이나 좀 잘래."

     어차피 내일이면 또 살아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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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지 상승 중



   <나는 분노한다>는 신문사의 특별취재팀들이 엮은 책이다. 매일경제신문사는 분노의 시대 특별취재팀을 꾸려 한국사회의 분노의 모습들을 취재하고 이 책을 펴냈다. 다시 한번 확인, 매일경제신문사라고?

   한국인의 분노의 이유를 알기 위해 1,200명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와 설문조사, 통계조사, 국내외 전문가 인터뷰와 현장 취재를 전체 5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정리하고 있다. 1장 ‘행복이란 파랑새는 없다’는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살펴보는데 변화하는 행복지수, 지역차에 따른 행복지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2장 ‘돈이 있어도 즐길 수는 없다’ 중산층 역시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라는 것과 그것의 대표적인 이유가 ‘주택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장 ‘희망의 사다리는 왜 걷어차였나’는 희망보다는 분노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의 모습에 관해 말하고 있다. 부자동네로 손꼽히는 강남의 분노와 세대갈등의 문제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4장 ‘전 세계를 뒤덮은 99% 분노 에너지’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전 세계에 확산된 분노와 그 이유, 진화된 대응으로 맞서는 자본주의의 모습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5장 ‘국민이 바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은 분노에 대한 해법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여론에서는 성격의 문제, 분노조절장애라고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있지만, 이미 느끼고 있듯이 이 분노는 ‘개인’의 ‘이상’ ‘비정상’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이 분노에 물들어 있는 상황인데, 그럼 모두가 이상한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겪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국민 모두를 이상행동으로 몰아가는 요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인의 분노는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렵거나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한 경우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녀노소와 빈부의 격차를 넘어선 한국인의 공통심리로 굳어져가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사회 어디에나 분노가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용・교육・복지분야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광범한 분노벨트가 형성돼 있다.

   여기에는 ‘아무리 정직하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한국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 한몫을 한다.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굴절된 현실은 사람들을 경쟁적인 지대추구 행위로 몰아간다. 지대추구행위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비 등 비생산적 활동을 펼침으로써 공공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자기 이익을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p5~6


  빈곤이 가속화되고,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력해도 좌절감만을 얻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냉전체제의 경쟁의 승리자이다. 이 자본주의의 승리 이유는 행복을 추구하는데 적합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빈곤하지 않고 잘 사는 삶이었을 텐데, 빈곤한 삶을 살고 그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경제적인 위기가 삶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돈이 있어도 즐길 수 없는 사회다. 교육비 등 ‘강요된 소비’에 묶여 여가비가 없고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이것은 안정적이지 않은, 교육과 일자리가 연결되는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국가 시스템의 문제다. 또한 나라 전체가 ‘주거불안’을 겪는 상황도 문제이다. 집이 있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집값이 오른다와 집값은 꺼진다라는 이야기 속에 상반된 기대감이 분노를 더욱 재생산하는 요인이 된다.

  세계는 불평등, 불균형의 확대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월가점령’ 시위의 캐치프레이즈는 “나는 99%다”였는데 당연 상위 1%에 대한 쏠림, 지나친 불평등에 대한 것이었다. 전세계적인 이 분노를 진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해결책을 논의하는데 먼저 낙수효과였다. 이것은 부자들, 대기업이 돈을 잘 벌면 돈을 더 잘 쓰게 되고 그 돈이 빈곤층과 중소기업에게로 가서 소득양극화가 해소되고 경기가 부양된다는 생각이다. 당연, 실패했다. 그리고 선거와 맞물려 실행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복지공약을 제시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이렇듯 실패만 하게 되는 대안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이 책은 두 가지를 든다.


 첫째, 위기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이유에만 관심을 쏟아보면, 누가 어떻게 오작동을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해진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똑같은 실수가 반복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둘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허점과 모순투성이’라고 아무리 헐뜯어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중상주의나 공산주의는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주도권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국가 자본주의, 기업 자본주의 등도 마찬가지다. 100%의 치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혹자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남유럽 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또한 정도를 지나치면 붕괴를 앞당길 수 있다. 결국 해답은 균형 잡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다. p206


  자본주의를 넘은 공감자본주의를 해법으로 내세운다. 도대체 공감자본주의는 또 뭔가. 당연 무엇이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만, 이 말도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어체의 표현으로만 여겨진다.


사회 구성원의 합의와 공감을 전제로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낙오자도 인정할 수 있는 경쟁, 패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승부, 실패자도 수긍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주는 자본주의다.

 공감 자본주의는 경제적 약자 보호에 초점이 맞춰진 ‘온정적인 자본주의’, ‘인간미 있는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고비용 저효율’ 사회를 ‘저비용 고효율’로 바꾸자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 예컨대, 공공기능을 강화해 주거, 교육비 등의 부담을 구조적으로 줄여주고, 공정한 룰에 따른 경쟁을 활성화시킴으로써 효율성을 증대시키자는 아이디어다. p265


   특별취재팀의 취재에 따른 이 대안 제시대로 본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권은 이 대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공감’이란 말은 한국 사회에서 갈피를 잃은 지 오래다. 타인에게 공감할 여유가 없다. 나 자신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총체적인 난국에서 자꾸 ‘개인의 일탈’을 강조한다. 분노 게이지의 상승을 개인의 미성숙한 성향 탓으로 돌린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분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낳고, 그 폐해가 또 다른 폐해를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구조화, 집단화한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한꺼번에 분출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책에 숱하게 등장하는 교훈이다. p278


  최근, 정치·사회에 관한 책들은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이게도 똑같다. 이토록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라니 해답을 향해 바로 갈 수 있을 법도 한데, 여전히 답으로 가지 못하는 것, 그 총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원인과 비결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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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왕으로 배터지는 사회



정수복 외, 사회를 말하는 사회

 



 마치 재밌는 놀이마냥 한국사회가 가진 문제적 특징들을 잡아내고 그에 대해 분석한 책들이 증가했다. 책의 내용보다도 한국사회에 대한 그 명명들이 재미가 있어 도대체 어디까지 계속될까 궁금했던 참에, 이렇게 그 명명들을 다 모아 엮은 책이 나와 주었으니 이름하여 ‘사회를 말하는 사회’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학자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분석한 것을 주제에 맞게 총정리한 것이다.

  전문가들이라지만 쏙쏙 문제를 찾아내어 지칭하는 네이밍 센스가 재밌다. 하지만 이 모든 명명을 보고 있다 보면 정말이지 웃프다. 결국 한국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니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니까.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니까.

  1장에선 ‘나는 항상 배고프다’는 제목 아래 소비사회, 자기절제사회, 낭비사회, 잉여사회, 하류사회, 탈학교사회, 허기사회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에 부여된 사회의 특징들은 한국사회의 ‘결핍’에 관한 내용들이다. ‘나는 항상 배고프다’는 말은 히딩크가 축구를 하면서 성적과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로 더욱 회자되는 것 같지만, 이 사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배가 고프게 만드는 사회인 것 같다. 소비사회이니까 더욱 더 소비를 하게끔 더욱 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더욱 더 낭비하게끔 하고 잉여사회에 잉여자로 살게 함으로써 사회경제생활에 진입하지 못하는 결핍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타인과 비교하고 끊임없는 결핍으로 인해 허기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회다. 그것이 경제적 결핍이든, 정신적 결핍이든 이 사회는 결핍이 만연한 사회다.

  2장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위험에 대한 분석이다. 많은 학자들이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 분노사회, 감시사회, 과로사회, 탈감정사회, 피로사회, 탈신뢰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라 지적한 울리히 벡은 위험에도 사회적 지위가 있어 사회적 약자들의 위험 지위가 낮다고 말한다. 돈과 지식과 정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현대사회는 감시사회인데  ‘감시’의 정당성은 판단하는 기준은 “감시하는 주체와 감시당하는 객체 사이의 ’관계‘이며, 특히 그 양측의 '힘의 관계’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가 정당성을 얻는 이유는 단순히 권력을 가진 이들 개인에 대한 책임감이나 도덕성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구조적으로 불균형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힘의 상태를 균형 상태로 맞추고자 하는 것이며, 따라서 감시는 일종의 ‘힘의 균형을 위한 사회적 장치’ 중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p85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적 ‘감시’는 정당성이 없다. 권력이 힘을 가지지 않은 자에 대한 이 빈번한 감시와 사찰의 사회다. 제 역할을 해야할 언론도 감시의 대상과 방향을 권력의 눈으로 보고 있는 사회다. 이러한 ‘역감시사회’가 정치적으로 독재이며 경제적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와 같다고 말한다.

  3장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승자독식사회, 격차사회, 부품사회, 주거신분사회, 팔꿈치사회, 영어계급사회, 절벽사회, 제로섬사회에 대해 말하다. 이런 특징은 공동체가 해체된 사회의 단면이다. 성공과 1등에 집착하는 사회, 승자만 계속 승자로 살아남는 사회다. 그래서 또한 이 사회가 부품사회라 불리는 이유를 안고 있다. 신자유주의 확산과 과도한 경쟁으로 각박하고 야박한 이 사회에서 안락한 노후는 보장되지 않고 1% 기득권 집단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있는.

  4장 ‘어느 날 차단되었습니다’는 분열사회, 네트워크사회, 단속사회, 루머사회, 무연사회, 싱글사회, 신 없는 사회에 대해 설명한다. 이들 사회는 온라인 상에서만 접촉하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 조명한다. 현대사회는 네트워크나 사회관계망 서비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접속하고 접촉하는 듯하지만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이러한 관계의 양상은 많은 문제와 모순을 안고 있다.


 글래드웰은 ‘강한 결속’과 ‘약한 결속’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소셜미디어가 소소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중대한 사회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주장한다. p201~202


  사회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공생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데 오늘의 사회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경제적인 풍요와 정보의 발달, 생활의 편리가 있지만 결핍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로하고 분노하고 피로하고 감시당하며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사회속에서의 우리들이 분노와 회한을 떨치고 자기 성찰과 자기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보다 비판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러고 싶지만, 그러기에 이 사회가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도대체 주렁주렁 나오는 이런 사회에서 무엇보다 해결해야 할지. 무엇에서 희망을 보아야 할지. 그럼에도 결국 답이 ‘나 자신’의 성찰이 되어야 하는 것은 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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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지 한다



 결국 그들이 정치라고 표현하던 것은 ‘지배’였고, 행정이라고 부르던 것은 ‘군림’이었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시대는 점점 암울해져 이런 지배와 군림에 저항하면 제재를 당하고 ‘가만있으라’는 전근대적 가이드라인도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부한다. ‘가만있지 않겠다’ 다짐하며 거리로 나서고 촛불을 켜든다. 그리고 주저하는 자신을 향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절규를 일깨운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할 때 빚어지는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이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이들의 지독한 침묵이었다고.” p5~6


  더할 나위 없이 짜증이 났는데 표면적인 건 폭염이었다. 그리고 비가 온다는 기대감에 흐린 하늘을 보고 잠시 희망이 샘솟았다가 멀쩡한 하늘을 보고 다시금, 짜증이 몰려 올려 하고 있다. 표면은 무슨, 불쌍한 기후에 짜증을 전가하지 않기로 했다. 표면이든 내면이든 요 며칠의 이 짜증의 원인을 제목이 정확히 말해준다.


“대한민국은 왜 헛 발질만 하는가 -

정치와 행정이란 이름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저들에게 분노한다!”


  변상욱, 페이퍼로드, 2014.



  핫이슈의 홍수 속에 간간히 등장했다 사라진 ‘민영화’, 신공항 논쟁과 ‘아무 일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는 뜬금없는 결정, 더 뜬금없는 사드배치, 연이은 뜬금 대구공항 이전. 정치권에 대한 로비자금은 허구헌날 나오는 얘기고. 국민들의 희망의 전기를 위한 특별사면이 이뤄진다고 하고. 도대체 죄인을 사면하는 것이 무슨 희망이라고, 나오는 이들이야 뻔한 것을..........거기다가 날도 더운데 개, 돼지거리는 ‘교육부’의 관리까지. 연이어 온몸에 스팀을 높여 습도를 생성한다. 지랄도 풍년이라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엊그제 뉴스기사(2016.7.10)를 보다가 마우스를 확 집어 던졌다. 내 컴퓨터가 무슨 죄람.....

  청년수당이 5일만에 1천명이 지원해서 복지부가 수당 지급을 막을 것이라는 기사였다. 정부 부서 중에서도 가장 약한 부서 중의 하나로 꼽히는 복지부의 존재감 있게 일하는 뉴스를 접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청년활동지원사업(청년수당)은 서울시의 사업으로 주민등록 기준 서울에 1년 이상 거주한 만 19∼29세 가운데 주 근무시간 30시간 미만인 청년이면 신청할 수 있다. 대상자에게 최장 6개월간 월 50만원 활동비를 현금으로 주며 매달 활동계획서에 맞게 활동했는지 보고서를 내고, 주요 지출 내용을 첨부해야 한다. 대상자 선정 기준은 가구소득(건강보험료 기준)과 미취업기간(고용보험), 부양가족 수(배우자와 자녀)다.

  청년들의 취업난이 가속화됨에 따라 단기간이라도 안정된 생활과 새로운 활동 도약을 위한 지원으로 보이는 이 사업이 시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복지부가 "서울시가 사업을 강행하면 직권취소를 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사회보장기본법 위반이란다. 때문에 서울시가 법을 위반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시정명령, 취소·정지 처분, 교부세 감액 조치 등의 엄정한 법적 대응으로 맞설거란다.

  정부가 지자체의 복지사업을 장려하지는 못할 망정 막는 이 한심한 행태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여러 뻘짓을 쳐다보는 중에서도 이 뻘짓을 보며 변상욱의 책제목이 딱 떠올랐던 것은 정부의 행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권력자의 지배와 군림에 대한 사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비교하며 언론인인만큼 언론의 문제적 행태에 대해서도 꼬집으며 다양한 헛발질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이 책을 살펴보면 큰 틀이나 작은 틀에서나 이명박,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가지는 비판은 한결같다. 이쯤되면 문제점에 대해 완전히 틀이 잡힌 정부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도 다르지 않다. 아주 오래도록 우리가 이 상황의 목격자이고 피해자이고 가해자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지독한 선한 침묵자였기에.

  언론은 투표가 답이라고 하고 계속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참여가 아니라 ‘투표’만 독려하는 것에 대해 꼬집는다.


 국민의 정치참여의 핵심은 투표참여가 아니라 정치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정치에 나서라 하지 않고 투표에나 나서라고 한다. 왜 국민에게 정치를 권하지 않는가? 이 문제는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부터 따져야 한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절차가 권력일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정치가 아니라 지배이다. 진정한 민주정치는 국민이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 고루 나누는 것이다. p286


  투표를 해봐서 안다. 한때는 투표가 적극적인 참여라고 생각했었지만 ‘투표’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공정성이 의문시되기까지 하는 이때, 과연 투표가 답이 될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개, 돼지 발언에 대한 파면 요구나 이 발언에 항의하며 최저임금 인상 시위도 적극적인 의사표현과 참여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위하는 족족 연행되거나 시위 자체가 무산되긴 하지만. 정부의 헛발질이 반복되고 강도가 높을수록 ‘분노’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분노의 수위가 깊어지면 헛발질을 멈출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결과로 보고 싶은 날이다.


 연구진은 권력을 주면 3가지 변화가 발생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다.’ ‘아래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둔감해진다.’ ‘자신과 측근들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p16


  저자는 권력자가 헛발질하는 이유, 그러니까 여론이 따가워도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로 페이싱 효과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의미 있는 만남이었고 상대방과 소통이 잘 되었다고 착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자기가 말을 많이 해 만족스러우면 당연히 상대는 말도 못하고 듣기만 해 만족스럽지 못한 게 뻔한데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착각하는 현상이다. 그러니 측근에게 둘러싸여 칭찬에 익숙한 권력자는 소통이 안 되고 자기 생각만 주장하며 실수를 거듭한다. p16


   이것이 모든 권력을 가진 이의 특징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쥔 이에게도 ‘개인차’가 있음을 믿으며 그 믿음이 없다면 사회참여의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정치·사회 참여하는 민중들이 많을수록 권력자의 행태가 변화할 수 있으며, 그런 활동으로 ‘모셔야 하는 권력자’를 선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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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



         한강. 흰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끔 한 책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아니고

 책도 많이 팔리는 나라가 아니다. 

심각한 독서율과 OECD 회원국 월평균 독서량에 대한 

비교 기사를 읽다 보면 평균 독서량보다 많이 읽는구나라고 뿌듯해지는 게 아니라 서글프다. 

책 판매율도 수험서, 영어책, 자기계발서이거나 TV를 비롯한 언론에 

소개된 책만이 높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작가 마르케스의 소설이 널리 읽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의 ‘흰’과 같이 최근 분량이 적은 소설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들 책에 비해 ‘흰’은 좀더 다르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소설책의 분량이 줄어든 것이 페이지가 많은 소설책은 독자들에게서 외면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서시장의 변화에 맞게 오래도록 장편소설의 적정 분량으로 인식되던 소설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좋다 나쁘다로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 변화의 원인은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핵심은 ‘잘 안 읽는다’ ‘어쨌든 안 읽는다’니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책의 표지와 뒷면을 살폈다. 거듭 확인을 했지만 이 책은 분명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형식과 구성의 파괴, 변주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설이라고 하면 생각하게 되는 익숙한 전개가 아니라 에세이 느낌이 강했다. 함께 곁들여진 사진이 더욱 그 느낌을 강조했다. 최근에 읽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과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도 문체도 분위기도.....마침 <멀고도 가까운>에서도 리베카 솔닛은 여행을 떠났고 북유럽이었고 어머니가 나왔고.......한강의 ‘흰’을 읽으면서도 북유럽의 느낌이 났는데 역시나 북유럽 쪽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 두 책이 유사하게 느껴졌는데 하나는 ‘에세이’로 하나는 ‘소설’로 불릴 수 있는 건 어떤 이유일까.

  문장으로 본다면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도 참 좋았다. 한강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소설 ‘흰’은 정말이지 ‘희다’도 아니고 ‘흰’이라는 어감에 맞는 글이었다.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느낌으로 와 닿은 이야기. 하지만 소설이 인물과 사건과 배경으로 이루어진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임을 알기에 익숙한 형식에서 떨어져 있는 한강의 ‘흰’은 계속 멀찍이 떨어져서 봐지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정말, 소설이란 무엇인가.

  한강의 이름을 지운다면, 과연 사람들은 이 책을 소설이라고 생각할까. 수긍하며 놀라움과 경탄을 가지고 이 책을 읽을까. 덧붙여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의 신작이라는 글귀는 책 제목을 ‘흰’이 아니라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으로 만든다. 우리나라의 문학시장에서, 출판계에서 어느 신인 작가가 이런 글을 들고 출판사를 찾았다면, 편집인들은 흔쾌히 출판을 해줄까? 아니, ‘소설’이라는 작가의 말을 수긍을 할까?

  궁금해졌을 뿐이다. 이 책이 독자의 마음에 닿기까지 분명 ‘출간’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할 텐데 어느 무명의 작가가 달려 나와 ‘나의 첫 소설을 출간하고 싶어요’라며 이 책을 내밀었을 때 출판사 관계자의 얼굴이, 표정이, 그들의 조언이.... 뛰어 넘어야 할 것은 여러 가지로 ‘편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름 하나로 ‘새로움’ ‘낯섦’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상당히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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