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소각의 여왕, 이유, 문학동네

 

지창씨는 딱 한마디만 했다.

“요즘은 나쁜 짓 안 하고 잘사냐?”

“나쁜 짓 안 하고 어떻게 잘살아?”

해미가 끼어들었다.

 

   청소년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다 보면 묘하게 하나로 정리가 된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 보는 ‘문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핍을 끌어안은 채 왜 그다지도 성숙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왜 그토록 의젓한지. 인터넷 속 사건·사고 속의 청소년들은 모두 문제를 일으키고, 반성하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성숙이라는 건 아예 물 건너갔고, 반성이란 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설 속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뇌한다. 바쁘고 힘든 삶 속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깊다. 그래서, 주인공이겠지.

  여기 소각의 여왕 해미 역시도 그런 청소년의 한 명이다. 그렇게 자라난 해미가 직업으로 모으는 고물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소각의 여왕> 속에 담겨 있다. 등장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해미와 해미 아버지 지창씨와, 지창 씨의 친구와, 고물상 직원이었던 두 명 정도. 그들의 삶은 정리해야 할 수많은 고물들보다도 단촐하다. 그래서 더욱, 쓸쓸함을 부추긴다. 낡은 고물들을 분류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긴 하지만 많은 물량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산업의 변화와 함께 고물 사업도 위기를 맞게 된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고물상의 진리처럼 이 세상에서 점점 사람들은 뭉치려고 하기보다 각자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결핍이 가져다주는 것은 남들과는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미는 여느 학생들처럼 대학생이기 되기보다 아버지와 함께 고물상을 운영하는 삶을 택한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물상의 주인 해미 아버지, 지창 씨의 남다른 점이라면 면허도 없는 해미에게 1톤 포터를 몰게끔 한다는 것이다. 포터를 타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고물을 수집하던 해미는 이제 고물 대신 유품정리사가 된다. 몰래 아버지가 하던 이 일을 해미는 선택한다. 죽음이 휩쓸고 간 공간을 말끔히 치우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리고 아버지는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고물 속에서 희귀 금속 이트륨을 분리해 내는 꿈을. 폐허가 되어 가는 고물상의 운명에서 뽑아내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지창 씨는 이에 몰두한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고물과 고물상을 팔면서까지 지창 씨는 이트륨을 뽑아내는 기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얻어지는 것은 늘 검은 돌덩어리. 지창씨가 삶을 위해 삶을 팽개치고 집 안에 머물며 기계를 들여다보는 동안 해미는 죽은 이의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중엔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슨 과랬더라? 그래, 항공우주공학과.”

“얼마나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까.”

 

  그들은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까. 아마도 해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삶에서 보다 멀리, 멀리. 하지만 해미는 정말로 꿋꿋이 삶을 이겨내는 듯 보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묵묵히.

  세상은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쓰레기를 내놓아 환경위기가 심각한데 고물상의 운영은 어렵다니. 하긴, 그만큼 수많은 고물들이 쏟아져 나오니 고물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런데, 이 지점. 고물정리에서 유품정리사가 되는 자연스런 흐름이라는 해미의 말이 어쩐지 애달프다. 마치 인간의 죽음이 고물과도 같은 위치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인간의 삶이 죽음이 고물로 전락해버린 기분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해미의 어조가 시종일관 무덤덤하고 건조해 서린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아버지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 버렸다. 유전병이라는 허파에 바람이 드는 병. 유전병이 아닌 다음에야 해미는 허파에 바람이 들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해미는 건조한 웃음을 날린다. 일찍 세상을 알아버리고 그만큼 세상을 산 아이의 시선이 골목골목, 보이지 않는 방 안까지 스며들어 죽음의 뒷모습까지 끌어내 보여준다.


죽음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안 된다. 

여러 명의 의지가 하나의 죽음을 이끌어낸다. 

누군가의 의지와 누군가의 동의와 누군가의 묵인.

 

  이 말이 동의되는 것도 참 씁쓸한 일이다. 사람을 믿는 것은 희망을 믿기 때문일까. 믿고 의지하며 세상을 버텨내지만, 결국 믿은 이들에 대해 실망하게 될 때, 그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 그것은 죽음을 이끌어내는 의지와 동인이 된다. 더할 나위 없이 허망한 이트륨의 추출 성공. 헛웃음을 일으키는 그 소식. 이 소식 또한 뒤통수다. 삶을 더욱 잔인하게 비트는 저 것, 그것, 그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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