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

 

누운 배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저, 한겨레 출판, 2016.07.14.

 

   배가 누웠다.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 소설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얼핏 ‘세월호’가 연상된다는 리뷰를 본 것 같았는데, 커다란 배가 기울어졌다는 것 외에 세월호 사건을 연관짓자면 누운 배를 일으키는 과정의 이야기들이 제 이익과 이해에 따라 결정되고 중구난방이라는 점일 것이다.

   단지 급박한 시간에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해봤지만 이 소설은 한겨레수상이라는 기대만큼의 충족을 주진 않았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경영혁신 사례집으로 유용하다, 라는 것.

   회사의 이야기다. 직장인이라면 공감갈 직장의 업무처리 과정의 수직관계, 상사와의 관계가 누운 배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직장생활의 단면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공감이 가는 듯도 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했다라고 볼 수밖에. 일의 처리 과정에서 겪는 갈등은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고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도 예상 가능한 바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이라기보다 어느 회사의 상황을 전해 듣는 것 같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우리 회사에도 그런 사람 있어.”라는 대꾸가 바로 튀어나갈. 그러니 당연히 어느 회사나 똑같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심사위원은 이 소설을 ‘미학’이 아닌 ‘사실’ 소설이라 했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소설이 사실을 아닌 것으로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이나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사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은 압도적이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수필과 어떻게 다른가, 수기와 어떻게 다른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미학이 배제된 소설이 아니라서, ‘혁신’적이라 말하고픈 건가.

 

임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핵심 관리 지표라는 것도 모두 타 회사 자료에서 베꼈는지 회사 실정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중언부언에 말끝마다 혁신, 혁신, 혁신 모두 그뿐이었다. 말밖에 안 되는 말이 중력 없이 떠돌았고 드러낸 거소다 감춘 것이 더 많은 실적 수치들은 속이 텅 빈 잔망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회장은 아무 불만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수량 넉넉한 호수처럼 관대하게 웃었고, 횡설수설하는 임원들을 지켜보며 이따금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원만히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74~75

 

   혁신. 혁신. IMF 이후에 기업은 이 혁신을 부르짖었지만, 혁신이란 개념에 대한 집착은 사랑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기업을 나와 개개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소설 속 회사에 닥친 ‘위기’를 혁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위의 문구처럼 하나같이 혁신을 외치지만 혁신의 정확한 개념도 성립되지 않은 채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은 항상, 말로만 이루어지는 듯하다. 지난 정권도 혁신을 부르짖었고 변화를 부르짖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태의연함을 유지했을 뿐이다.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말의 난무는 허무함을 끌어올린다.

   <누운 배>는 화자가 일하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갑자기 쓰러진 배를 가리킨다. 배는 똑바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이기에 옆으로 누운 배는 일으켜 세움이 마땅하다. 왜 쓰러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가를 계획하고 진행하기 위해선 무수한 대책회의가 필요하고 담당자의 문책과 변경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극대화하는 것인 ‘이기심’이다. 내 이익이 되는 쪽으로. 그리고 ‘회사의 이익’이 되는 것이 직원의 이익보다 선행한다. 다른 말로 대체하자면 이 이익과 이기를 모든 모순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제와 계급구조의 모순들. 배는 쓰러졌고 배가 쓰러졌음이 타당한 문서로 성립하는 과정은 배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책임회피와 보험을 취득하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 최종적으로 배가 완전히 쓰러졌음을 알리는데 일조한다. 도장 쾅. 원인과는 상관없는, 배제된 서류의 낙인이 배의 상태를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누운 배를 세우기 위한 회장의 한마디로 모든 직원들은 전전긍긍 배를 세우기 위해 일한다.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할 겨를 없이 그 말 한마디로 고철같은 배는 세워져야 하는 거고,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배를 세우려는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해야 한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일이 쌓여도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 금방 해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일도 아닌 일을 일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그리고 적당히 틈만 보이면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여 넣는 요령. 요령을 익히니 일은 편해지고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퇴근하면 술마시고 여자를 주무르다 집으로 갔고, 잤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 틀렸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고치거나 치울 수도 없는 것들은 적응하거나 아예 잊어야 했다. 기쁘고 즐거운 것, 보상을 찾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p125

 

   기업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덧 표피에만 머무르며 영혼없는 일터를 오간다. 수직적인 기업의 문화가 기업이익에만 매몰하는 행태가 그러한 직원들을 양상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혁신은 멀고, 혁신 역시도 표피에만 머무른다. 이런 생활이 반복될 때 일하는 인간은 단지 일을 하고 있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출근하고 월말이면 급여를 받지만, 자기성취와 행복감은 알지 못한 채 ‘요령’만을 파악하게끔 하는 기업문화. 그런 구조는 대한민국의 기업의 당연한 문화로 너무나 오래 자리잡았다.

   화자가 맞닥뜨린 일은 <누운 배>에 대한 처리과정이지만 작가는 누운 것은 배만이 아님을 말한다. 일방적으로 매몰되고 마는 기업 속의 개인들. 천편일률적인 기업 조직 속에서 또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직장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기도 모르게 까라면 까면서 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들. 어쩌면 모두 똑같이 되어가는 것에 안도를 할지 모를. 여기에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돈벌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떤 질문보다 가장 앞서야 할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이든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말에 길들어가며 세월만 보내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 저 배처럼 다 썪은 채 일어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것은 내가 될 터였다.

다 그렇게 산다고들 말하지만 다 그렇게 죽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죽기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인간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런 것이 회사 생활이라고 스스로 강박하고 세뇌하면서 일생을 보내다 늙고 병든 닭이 돼 죽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기에 나는 아직 젊었고 내게 남은 인생은 너무 길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p306

 

직  장인의 삶이란 늘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점이긴 하다. 이상을 쫓자면 놓쳐버릴 현실에 울고 현실을 쫓자면 놓쳐버릴 이상에 운다. 어떡하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다음에는 어느덧 회사에서 내쫓겨버릴 상태에 처할 뿐이다. 어쩌면 오래도록 느끼지만, 깨달음은 결정은 한순간일지 모른다. 어디에 발을 더 두느냐에 따라서 여전히 누운 배로 머물 수가 있다. 썩고 썩고 썩은 채 누워 있는 배가.

   소설 속 문대리처럼 사람들은, 개인은 이렇게 조직을 벗어나고 또다른 조직에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더 나은 직장인이 되기 위하여,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개인은 끊임없이 누운 채로 발버둥친다. 그러나 그런 발버둥이 무색하게 희망과 선택과 결정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또다시 같은 조직들 속이라면야 얼마나 허무한가. 누운 배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이 무수한 개인들 면면의 노력만큼이라도 커다란 시스템이 얼른 누워있지 않은 채로 탁 버티고 있는 그림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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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왜!


풍경소리 -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구효서 외, 문학사상


  비가 오는 날 어느 절간 처마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를 듣는 게, 잠을 재워줄 소리로 느껴진다. 풍경소리. 풍경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 풍경소리에서 느껴지는 조근조근한 조용함이지 않을까. 이러한 풍경을 너무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때,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화음을 풍경소리인양 대체하며 하늘을 처마인듯 쳐다보며 이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라고 하니, 풍경소리의 한 문장처럼 나도 어딘지 머쓱.


  네, 저, 그런데, 쓰는 데는……촛불이 좋아요. 네. p13


  시작부터 한 구절에 눈이 꽂힌다. 피식 웃음이 난다. 마냥 차분한 듯도 들뜬 듯도 한 이 기분, 종잡을 수 없는 복합적 상태로 책을 읽고 있겠다 했지만, 집중이 될까 말까 한 생각이었는데 <풍경소리>가 주는 차분함에 어느새 긴장의 마음 틈들이 메워져가는 듯했다.

  왜 번뇌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절로 들어가는지. 깊숙하고 깊숙하고 조용한 어느 곳, 그곳으로. 갈수록 믿고 의지하기가 힘들어지지만 종교 자체가 내뿜는 힘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 의탁해 힘을 내는 것, 그것은 사람의 의지인가. 어쨌든, ‘묘음’을 들려주는 이 <풍경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차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30년 내공의 작가가 가진 힘이라면 마냥 젊은 작가의 동질의 언어에만 반가워하지 않고 이들의 언어의 맛을 계속 느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인생살이의 삶의 언어를 터득한 세대들의 목소리라면 그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다른 소리를 내뱉는다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세대 단절의 소리는, ‘왜’라고 묻는데서 시작하는 것일까? 너는, 너희는, 당신은,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하는 건대요?

  

   왜라고 묻고 싶을 땐……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군.

   예?

   왜라고 묻는 대신 그렇군, 이요?

   그래요.

   그렇군이라고 말한다고요?

   그래요.


 성불사에서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만 여기, 이 대한민국의 현실의 삶은 성불사가 아니므로 나는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것이다. 왜, 왜, 왜!라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해할 성질이 아니기에.

 성불사에 온 듯 갑작스럽게 “그렇군”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여기 <풍경소리>에 취해 갑자기 전환할 수 없음을 안다. ‘머쓱’하기도 하고. 하루만 지나고 나면, 어쩌면 그때는 하게 될까. 어쩌면 오늘 밤이 지나고 결정의 순간이 오면, 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오면, 오히려 왜라는 질문보다 “그렇군”이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군, 역시 여기는 살만한 데가 못되는군.”


  달라지고 싶어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러 가는 미와의 성불사에서 머문 날의 이야기는 ‘달라지고 싶다’는 미와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도 같지만 ‘묘음’이 이끌어들인 짧은 여행같기만 하다. 소설인듯 아닌듯 끄적거리는 미와의 이야기와 서술자의 글이 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도 증폭된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떨림이 눈가로 스칠듯 말듯. 경건함을 밑바탕에 두고 담백함의 밀도가 꽉 찬 이 느낌이 성불사로 당장 달려가고프게 이끈다. 이미지와 소리 속에서 묘한 근원의 소리를 알아가는, 깨쳐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또한 반복된 소리에 미칠듯한 심경 또한 자신의 탓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무수한 소리들 속 특정한 소리의 강박과 집착에 묶여 있다. 단순한 욕망이라 치부하기엔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는 그런 소리타래들에서 벗어나고픈, 달라지고픈 우리의 마음은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면 정화가 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성불사의 밤은 각자의 방에서 잠든 그들을 달빛과 함께 꼭꼭 품었다. 객실의 미와도 촛불을 끄고 잠든 지 오래. 나만 깨어 그들을 굽어보지만 나는 원래 잠을 모르는 터라 깨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밤이 깊어 사물이 딱 정지해 고요하고 적막해도 모든 소리의 연원인 나마저 잠들거나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p79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보면 한없이 불편해진다. 개인적인 상황에서든 업무적인 상황에서든 불편과 불쾌를 초래하는 시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듯 성불사에서는, 아니 어느 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저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에 대한 욕구가 솟아나는 걸까. 태양은 어느 곳이나 뜬다는 말을 진리라 친다면 태양은 어느 곳에나 같은 빛으로 비추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진리다. 어느 곳에든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시선에게 왜 그림자를 지웠느냐고 묻고 싶은 것일 게다. 왜 나만 불편하고 불쾌하고 힘들고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란 물음을. 무언가 정의롭지 않다는 물음을. 한동안 돌려져 있던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그런 것.

  그러다가도 언제나 시선은 동일했다는 것에 조금의 위안을, 언제나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것에 격한 안도와 변화의 의지를 다지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의지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며 결국 ‘내’가 행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끔도 된다. 그렇더래도 오늘의 이 <풍경소리>는 한동안 지속되어 마음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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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쓴다는 것


매혹의 러시아로 떠난 네 남자의 트래블로그, 서양수·정준오, 미래의창, 2015.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인천공항에는 무수한 인파가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이 나라를 떠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떠나고 있다. 그래, 그동안 너무도 지쳤다.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이다.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나라 때문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채 바짝 긴장된 몸과 마음. 이 기회를 맞아 힐링을 하고 돌아오면 5월엔, 5월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정권을 볼 수 있을까.

  

 “시베리아 자작나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여행은, 홀리듯이 가더라도 몸이 지쳐 돌아와도 다시 가고프다. 여기 네 남자가 떠난 러시아여행처럼, 여행에서의 잊지 못할 기억이 자꾸 불러댄다. 여행 책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어쨌든 떠나라!

  이 책은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네 명의 남자들의 러시아 여행기이다. 네 명의 남자들은 2008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인연으로 다시 한번 러시아를 떠난다. 갑작스럽게. 네 명이지만 두명만이 여행 서술을 담당하고 있고 그들이 방문한 러시아의 감상과 겪은 여행 에피소드를 곁들이고 있는 여행기다. 네 명의 왁자지껄한 여행의 일상이 담겨 있다.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한 욕구를 충독질하는 일이다.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대한 인상을 타인의 경험을 통해 간접경험하며 절실하게 나도 여행을 가겠다는 마음과 그들이 예찬하는 장소 어딘가를 선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여행기 또한 넘쳐난다. 어떤 이는 여행을 가고 시리즈로 여행기를 발행하기도 한다. 세상에 여행할 곳은 너무도 많으니까 여행기는 사람들과 장소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이 될 것이다. 그 많은 여행기 중에서 어떤 여행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여행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감안할 땐 중요한 일일 거다.

  이 책의 특징은 뭐랄까. 편하게 읽히는 만담같다. 여느 여행기나 블로그에서 보듯 방문한 곳의 유명한 장소에 대한 소개와 그곳에 대한 인상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아, 나도 가고 싶어”라고 할만한 장소는 선뜻 와닿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한 장소에 대한 묘사와 강렬한 인상을 담고 있진 않다.

 기억에 남는 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그들의 이력이다. 어떤 여행기는 “여행을 떠난 이유” 자체가 여행의 내용보다 차별화된다.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일인듯 ‘과감’하게 일상의 일들을 접고 떠난 이들의 여행기가 주를 이뤘다. 그들은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거나, 전세금을 빼거나, 전재산을 몽땅 들고서 여행을 간다. 그런 일들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망이기에 그렇게 해서 떠난 여행이 어떤 매력으로 가득했는지, 그들이 후회를 하는지가 궁금해서 그들의 여행기를 보게 된다.

  그다음 작가나 학자의 여행기다. 그들은 학술적인 정보를 감상과 함께 섞어 준다. 문학가의 감상은 남다른 언어를 통해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고 학자들은 그 지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일반인들이 여행을 하지만 여행기를 쓰는 경우 저런 ‘과감한 행동과 이력’이 있어야 눈에 띄는 게 보통이다. 그런 점에서 이 네 남자의 여행기는 직장 생활하거나 공부하거나 일상을 누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여행을 떠났다. 아주 특별할 것도 없이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었다. 아니다. 더 정확히는 여행을 가는 멤버를 영입하기 위해 ‘책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먼저 나왔다. 어쨌든 보통의 사람들이 여행을 갈 때 하는 방법 그대로, 그 전날까지 일에 치여 있다가 날짜에 맞춰 허겁지겁 떠나는 여행이다. 그렇게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하고 또다시 휴가에 여행을 떠나는 그런.

  여행을 떠나는 일이나 혹은 여행을 가서 여행기를 글로 쓰고, 책으로 내는 건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여행기는 일상과 평범이 그대로 녹여있는 여행기이다. 여행을 하고 싶고 여행기를 쓰고 싶은 이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씌워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물론 몇 박 며칠의 휴가를 다녀온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고 해서 출판사해서 즉각 환영하며 출판해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다른 책들과는 다른 ‘차별성’이 필요한 법이니까. 한편으로는 이들 네명의 독특한 이력이 한몫했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우주비행사에 도전하기도 하고 공모에 당선되어 갈라파고스를 촬영하기도 하는 사람들, 이미 20대에 연해주 역사탐방단에서 시베리아 순례를 하던 이들 네 명. 그러나, 지금은 30대 직장인이거나 아직 공부중인 채로 지난 날의 여행의 기억을 마음에 품고 언제든지 그 여행 속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여행은 그리고 여행기는 정해진 누군가의 몫은 아닌 것이다. 누구든 도전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긴 연휴를 앞두고 든다. 도전하고픈 연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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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4-2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모 항공사 광고에서 본 듯한 사람들인데 맞는지 모르겠네요.
이들의 이력이 여행서 출판에 한몫했다는 얘기가 의미있게 다가오네요.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여건이 허락해주지 않은 현실에 살짝
서글퍼지려하네요^^ 의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모시빛 2017-04-29 22:14   좋아요 0 | URL
동감이요. 서글픔...출판에 있어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저자 프로필이 우선하기도 한다더군요. 심지어 프로필이 70%라는 얘기도들은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즐겁게 열심히 책읽고 좋은 콘텐츠를 쌓아보자구요. 화이팅입니닷!
 


스트롱맨에겐 의식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8-02.


  “집에서는 안 그래요. 부드러운 남자에요.”

  집에서 부드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집에서는 안 그런데 왜 밖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가. 어떤 행동은 집에서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밖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있다.

  여러 가지로 두 부부의 발언에 적잖이 놀라고 있다. 나랏일을 하겠다고, 큰일을 할 사람이라 자청하며 목소리 높이고 있는 누군가의 ‘언어’는 개인의 언어로서도 부적절하다.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 후보의 언어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투표일을 앞두고 뱉은 말들을 주워 담기 위해 ‘이해시키려’ 쏟아내는 말들은 오히려 앞의 언어가 ‘한번 삐끗’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언어가 빠져 나온 통 속에는 동종의 언어가 가득함을, 언어통을 지배하는 ‘인식세계’의 수준이 어떠함을 드러낸다. 이 인식체계에서 주워 담은 언어통 속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의미의 무한재생일 뿐이다. 그들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이 책 작가의 말대로 이해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 몫이어야 하는지는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p21


  “설거지를 어떻게…. 남자가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하는 일이 있다.

 남녀 일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다”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여성 비하, 성차별 발언이라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아들은 “아버지는 집에서는 설거지, 청소, 빨래도 자주 하시고 라면도 잘 끓이시는 자상한 분”, 부인은 “빨래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한다”라며 아버지를 두둔했다, 가 아니라 아버지가, 남편이 말한 것이 거짓말임을 밝혔다. 거짓말하는 대통령은 안된다면서 참 쉽게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 후보를 만난다.

  이 발언이 ‘여성혐오적 발언’이라고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후보는 “스트롱맨이라서 웃자고 한 소리다” “센척할려고 한 소리다” 라고 변명했다. 웃자고 한 소리라는 말에 정작 웃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는 건가. 더 정색할 말이 이어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말도 자당 후보를 향한 비판에 유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를 구사한다. 아니 수습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같은 통에서 꺼낸 말로 당 대변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설거지 발언은 이 시대 남성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이 말이 여성혐오의 표현만이겠는가. 남성차별의 언어이기도 하다. “강한” “멋진”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여성을 폄하”하는 데 기대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강함의 진정성은 있는 것인가. 그 강함은 자립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여성을 비하하고서야, 여성을 깔아뭉개고서야 비로소 제 위치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여성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또한 그 속에는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성혐오”의 표현을, 행동을 감행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이 잘못된 언어의 중심에는 결국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 “강한”남성들의 세계관은 여성비하, 폄하 못지않게 남성 자신들의 비하와 폄하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한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여성혐오를 하용하면서 “남성적이지 않은 남자들”을 지적하고 걸러내 또한 차별하고 있음을 정녕 모르고 있는 건가.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 행하는 행동이라는 데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 절대 바꾸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행동 패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히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 인식세계다. 굳이 가부장제를 끌어 오고 싶지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얻어낸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스트레스와 공포를 주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성집단”을 차별함으로써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경쟁 대상을 줄이고 싶은. 정의와 평등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의 언어로 제 존재적 증명을 펴려는 그들만의 언어의 세계. 이 혐오의 언어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점점 집단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제하려는 이유는 결국 제 것을 더 갖기 위한 발악이다. 한편으로 이 여성혐오의 언어는 물론 주욱 이 나라에서 이어져오고 잘 써먹어 온 말이다. 그러나 변화하지 못하는 소멸되는 언어로 만들지 못하는 건 헬조선 사회가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며, 특정한 권력이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이유 아닐까.

  

 이 책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 다른 페미니즘 책보다 그렇게 흥미를 당기진 않았다. 최근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너무 쏟아져 나와서 비슷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분명, 환호할 정도의 공감이나 끄덕거림보다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문득, 한 대선 후보의 발언에 반응하는 내 언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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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경제, 정체성


그저 좋은 사람 Unaccustomed Earth, 줌파 라히리,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2009-09-05.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여러 가지다. 확고한 정체성이 삶을 더욱 안정적으로 이끈다고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하기도 한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민족과 국가. 과연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강도로 영향을 미칠까. 특히 타지에 살고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줌파 라히리는 미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이다. 그런가? 여기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국적을 이야기하고 인도인이라는 것은 종족을 이야기하는 걸까. 줌파 라히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곧 미국에서 살았다. 부모에게 인도인의 문화를 몸에 익히며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헤쳐 나가야 했다. 어쨌든 그런 작가의 삶의 궤적이 나타나는 소설에서 이민 세대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한참 느끼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떻게, 이토록, 미국에 ‘비교적’ 잘 정착하고 있는가,라는.

  이 책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라는 반박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이민세대와 2세대의 내적인 혼란과 방황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일상에서 그것을 느끼고 그들 스스로의 생에 대한 질문이 된다. 그런 그들에 대한 질문이 스친다. 그들을 규정해 나가는 그냥, 소설적 질문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시선의 질문이라고 생각해보면 되겠다. 그들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지 못한 경우 우리는 물을 수 있다. 한국인에게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어떻게 그렇게 ‘미국에서’, ‘영국에서’ 공부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가.”

  인물들은 타국에서 겪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정체성, 일상에서의 고독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인도인의 문화와 관습을 명확히 지닌 채 미국 생활 정착에 집중하는 부모 세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바탕에서 살아가는 자녀 세대들은 인도와 미국의 관습과 사고, 생활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 사이에서 일상의 행동을 장악하는 것은 인도인의 관습이기에 충돌할 수밖에.

  그래서 「머물지 않은 방」의 등장인물이 아밋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상처라고 한다면  랭포드를 보낸 것, 타지에서 생활하게 된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민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인 반응일 것이다.  


큰 상처를 겪으면 젊을 때 머리가 셀 수도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가 갑자기 죽거나 사고를 당한 기억은 없었고, 삶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그를 랭포드로 보낸 것 외에는. p115


  일상이라 부르는 생활사건들에 대한 소설속 인물들의 감정적인 동요가 눈에 띄는데, 이것이 줌파 라히리 소설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이들 삶의 피폐함은 정서와 정체성에 기반되어 있고 환경적인 요소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싶기도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삶의 경제적인 어려움, 육체적인 고단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섬세한 감정의 선들이 또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반면 노동자인 이민 세대의 삶의 모습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들 삶은 내면의 고통 외에 현실적 고통의 강도가 더욱 세게 지배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겨를 없이 여전히 ‘생존’에 더 방점을 두지 않았을까. 이민자이진 않지만, 미국인 메간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른 삶의 방향을 생각할 겨를 없이 일상을 버티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민세대로서의 인도인인 이들은 일상이라는 생활사건 속에서 ‘경제적 고민’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물들이 “먹고 살기 충분하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물론 인도에서 살았다면 충분히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지금의 삶은 상대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보다는 약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물들 대부분의 삶에서 경제적 힘듦은 삶에 추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도 충분히 ‘먹힐’ 직업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여러 면에서 그들은 타지에서도 충분히 뿌리내릴 여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저 좋은 사람>을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은 시점에서, 줌파 라히리 소설에 대한 끌림과는 별개로, 왜 이 점에 자꾸 집착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괴로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고. 그것은 정체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인간성’을 상실할 파괴력을 지녔다고. 아니다, 편견이 아니라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경제적으로도 피폐해지면 어느 곳에서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어렵다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둔 이들이 인생의 큰 상처로서 “경계에 있는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버지가 루마의 일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일은 중요하다, 루마야. 경제적인 안정도 주지만 정신적인 안정도 있다. 내 평생, 열여섯 살 때부터 난 쭉 일을 해왔다.” p50


  아버지의 의도는 다르게 말했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땅」의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인용한다. 누군가에게는 경제적인 안정이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데 주요한 일이 된다는 것을.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느끼는 감정적 상실과 혼란은 개인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아련한 이야기 속에서도 한편으론 이들 방황이 처절한 고통에서는 한발짝 먼 느낌이 드는 것은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경험하지 못했구나가 느껴졌다. 그렇게 보니 줌파 라히리의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식인층이다. 충분히 교육받고 충분히 안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영국으로, 미국으로 가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적인 피폐함을 타개하기 위한 이민과는 또다른 것이다. 이런 경험이라면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선 어떻게 다뤄질까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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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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