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
누운 배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저, 한겨레 출판, 2016.07.14.
배가 누웠다.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 소설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얼핏 ‘세월호’가 연상된다는 리뷰를 본 것 같았는데, 커다란 배가 기울어졌다는 것 외에 세월호 사건을 연관짓자면 누운 배를 일으키는 과정의 이야기들이 제 이익과 이해에 따라 결정되고 중구난방이라는 점일 것이다.
단지 급박한 시간에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해봤지만 이 소설은 한겨레수상이라는 기대만큼의 충족을 주진 않았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경영혁신 사례집으로 유용하다, 라는 것.
회사의 이야기다. 직장인이라면 공감갈 직장의 업무처리 과정의 수직관계, 상사와의 관계가 누운 배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직장생활의 단면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공감이 가는 듯도 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했다라고 볼 수밖에. 일의 처리 과정에서 겪는 갈등은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고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도 예상 가능한 바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이라기보다 어느 회사의 상황을 전해 듣는 것 같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우리 회사에도 그런 사람 있어.”라는 대꾸가 바로 튀어나갈. 그러니 당연히 어느 회사나 똑같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심사위원은 이 소설을 ‘미학’이 아닌 ‘사실’ 소설이라 했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소설이 사실을 아닌 것으로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이나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사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은 압도적이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수필과 어떻게 다른가, 수기와 어떻게 다른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미학이 배제된 소설이 아니라서, ‘혁신’적이라 말하고픈 건가.
임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핵심 관리 지표라는 것도 모두 타 회사 자료에서 베꼈는지 회사 실정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중언부언에 말끝마다 혁신, 혁신, 혁신 모두 그뿐이었다. 말밖에 안 되는 말이 중력 없이 떠돌았고 드러낸 거소다 감춘 것이 더 많은 실적 수치들은 속이 텅 빈 잔망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회장은 아무 불만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수량 넉넉한 호수처럼 관대하게 웃었고, 횡설수설하는 임원들을 지켜보며 이따금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원만히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74~75
혁신. 혁신. IMF 이후에 기업은 이 혁신을 부르짖었지만, 혁신이란 개념에 대한 집착은 사랑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기업을 나와 개개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소설 속 회사에 닥친 ‘위기’를 혁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위의 문구처럼 하나같이 혁신을 외치지만 혁신의 정확한 개념도 성립되지 않은 채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은 항상, 말로만 이루어지는 듯하다. 지난 정권도 혁신을 부르짖었고 변화를 부르짖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태의연함을 유지했을 뿐이다.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말의 난무는 허무함을 끌어올린다.
<누운 배>는 화자가 일하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갑자기 쓰러진 배를 가리킨다. 배는 똑바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이기에 옆으로 누운 배는 일으켜 세움이 마땅하다. 왜 쓰러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가를 계획하고 진행하기 위해선 무수한 대책회의가 필요하고 담당자의 문책과 변경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극대화하는 것인 ‘이기심’이다. 내 이익이 되는 쪽으로. 그리고 ‘회사의 이익’이 되는 것이 직원의 이익보다 선행한다. 다른 말로 대체하자면 이 이익과 이기를 모든 모순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제와 계급구조의 모순들. 배는 쓰러졌고 배가 쓰러졌음이 타당한 문서로 성립하는 과정은 배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책임회피와 보험을 취득하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 최종적으로 배가 완전히 쓰러졌음을 알리는데 일조한다. 도장 쾅. 원인과는 상관없는, 배제된 서류의 낙인이 배의 상태를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누운 배를 세우기 위한 회장의 한마디로 모든 직원들은 전전긍긍 배를 세우기 위해 일한다.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할 겨를 없이 그 말 한마디로 고철같은 배는 세워져야 하는 거고,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배를 세우려는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해야 한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일이 쌓여도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 금방 해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일도 아닌 일을 일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그리고 적당히 틈만 보이면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여 넣는 요령. 요령을 익히니 일은 편해지고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퇴근하면 술마시고 여자를 주무르다 집으로 갔고, 잤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 틀렸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고치거나 치울 수도 없는 것들은 적응하거나 아예 잊어야 했다. 기쁘고 즐거운 것, 보상을 찾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p125
기업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덧 표피에만 머무르며 영혼없는 일터를 오간다. 수직적인 기업의 문화가 기업이익에만 매몰하는 행태가 그러한 직원들을 양상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혁신은 멀고, 혁신 역시도 표피에만 머무른다. 이런 생활이 반복될 때 일하는 인간은 단지 일을 하고 있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출근하고 월말이면 급여를 받지만, 자기성취와 행복감은 알지 못한 채 ‘요령’만을 파악하게끔 하는 기업문화. 그런 구조는 대한민국의 기업의 당연한 문화로 너무나 오래 자리잡았다.
화자가 맞닥뜨린 일은 <누운 배>에 대한 처리과정이지만 작가는 누운 것은 배만이 아님을 말한다. 일방적으로 매몰되고 마는 기업 속의 개인들. 천편일률적인 기업 조직 속에서 또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직장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기도 모르게 까라면 까면서 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들. 어쩌면 모두 똑같이 되어가는 것에 안도를 할지 모를. 여기에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돈벌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떤 질문보다 가장 앞서야 할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이든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말에 길들어가며 세월만 보내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 저 배처럼 다 썪은 채 일어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것은 내가 될 터였다.
다 그렇게 산다고들 말하지만 다 그렇게 죽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죽기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인간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런 것이 회사 생활이라고 스스로 강박하고 세뇌하면서 일생을 보내다 늙고 병든 닭이 돼 죽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기에 나는 아직 젊었고 내게 남은 인생은 너무 길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p306
직 장인의 삶이란 늘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점이긴 하다. 이상을 쫓자면 놓쳐버릴 현실에 울고 현실을 쫓자면 놓쳐버릴 이상에 운다. 어떡하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다음에는 어느덧 회사에서 내쫓겨버릴 상태에 처할 뿐이다. 어쩌면 오래도록 느끼지만, 깨달음은 결정은 한순간일지 모른다. 어디에 발을 더 두느냐에 따라서 여전히 누운 배로 머물 수가 있다. 썩고 썩고 썩은 채 누워 있는 배가.
소설 속 문대리처럼 사람들은, 개인은 이렇게 조직을 벗어나고 또다른 조직에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더 나은 직장인이 되기 위하여,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개인은 끊임없이 누운 채로 발버둥친다. 그러나 그런 발버둥이 무색하게 희망과 선택과 결정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또다시 같은 조직들 속이라면야 얼마나 허무한가. 누운 배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이 무수한 개인들 면면의 노력만큼이라도 커다란 시스템이 얼른 누워있지 않은 채로 탁 버티고 있는 그림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