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왜!


풍경소리 -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구효서 외, 문학사상


  비가 오는 날 어느 절간 처마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를 듣는 게, 잠을 재워줄 소리로 느껴진다. 풍경소리. 풍경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 풍경소리에서 느껴지는 조근조근한 조용함이지 않을까. 이러한 풍경을 너무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때,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화음을 풍경소리인양 대체하며 하늘을 처마인듯 쳐다보며 이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라고 하니, 풍경소리의 한 문장처럼 나도 어딘지 머쓱.


  네, 저, 그런데, 쓰는 데는……촛불이 좋아요. 네. p13


  시작부터 한 구절에 눈이 꽂힌다. 피식 웃음이 난다. 마냥 차분한 듯도 들뜬 듯도 한 이 기분, 종잡을 수 없는 복합적 상태로 책을 읽고 있겠다 했지만, 집중이 될까 말까 한 생각이었는데 <풍경소리>가 주는 차분함에 어느새 긴장의 마음 틈들이 메워져가는 듯했다.

  왜 번뇌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절로 들어가는지. 깊숙하고 깊숙하고 조용한 어느 곳, 그곳으로. 갈수록 믿고 의지하기가 힘들어지지만 종교 자체가 내뿜는 힘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 의탁해 힘을 내는 것, 그것은 사람의 의지인가. 어쨌든, ‘묘음’을 들려주는 이 <풍경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차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30년 내공의 작가가 가진 힘이라면 마냥 젊은 작가의 동질의 언어에만 반가워하지 않고 이들의 언어의 맛을 계속 느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인생살이의 삶의 언어를 터득한 세대들의 목소리라면 그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다른 소리를 내뱉는다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세대 단절의 소리는, ‘왜’라고 묻는데서 시작하는 것일까? 너는, 너희는, 당신은,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하는 건대요?

  

   왜라고 묻고 싶을 땐……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군.

   예?

   왜라고 묻는 대신 그렇군, 이요?

   그래요.

   그렇군이라고 말한다고요?

   그래요.


 성불사에서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만 여기, 이 대한민국의 현실의 삶은 성불사가 아니므로 나는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것이다. 왜, 왜, 왜!라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해할 성질이 아니기에.

 성불사에 온 듯 갑작스럽게 “그렇군”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여기 <풍경소리>에 취해 갑자기 전환할 수 없음을 안다. ‘머쓱’하기도 하고. 하루만 지나고 나면, 어쩌면 그때는 하게 될까. 어쩌면 오늘 밤이 지나고 결정의 순간이 오면, 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오면, 오히려 왜라는 질문보다 “그렇군”이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군, 역시 여기는 살만한 데가 못되는군.”


  달라지고 싶어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러 가는 미와의 성불사에서 머문 날의 이야기는 ‘달라지고 싶다’는 미와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도 같지만 ‘묘음’이 이끌어들인 짧은 여행같기만 하다. 소설인듯 아닌듯 끄적거리는 미와의 이야기와 서술자의 글이 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도 증폭된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떨림이 눈가로 스칠듯 말듯. 경건함을 밑바탕에 두고 담백함의 밀도가 꽉 찬 이 느낌이 성불사로 당장 달려가고프게 이끈다. 이미지와 소리 속에서 묘한 근원의 소리를 알아가는, 깨쳐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또한 반복된 소리에 미칠듯한 심경 또한 자신의 탓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무수한 소리들 속 특정한 소리의 강박과 집착에 묶여 있다. 단순한 욕망이라 치부하기엔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는 그런 소리타래들에서 벗어나고픈, 달라지고픈 우리의 마음은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면 정화가 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성불사의 밤은 각자의 방에서 잠든 그들을 달빛과 함께 꼭꼭 품었다. 객실의 미와도 촛불을 끄고 잠든 지 오래. 나만 깨어 그들을 굽어보지만 나는 원래 잠을 모르는 터라 깨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밤이 깊어 사물이 딱 정지해 고요하고 적막해도 모든 소리의 연원인 나마저 잠들거나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p79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보면 한없이 불편해진다. 개인적인 상황에서든 업무적인 상황에서든 불편과 불쾌를 초래하는 시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듯 성불사에서는, 아니 어느 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저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에 대한 욕구가 솟아나는 걸까. 태양은 어느 곳이나 뜬다는 말을 진리라 친다면 태양은 어느 곳에나 같은 빛으로 비추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진리다. 어느 곳에든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시선에게 왜 그림자를 지웠느냐고 묻고 싶은 것일 게다. 왜 나만 불편하고 불쾌하고 힘들고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란 물음을. 무언가 정의롭지 않다는 물음을. 한동안 돌려져 있던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그런 것.

  그러다가도 언제나 시선은 동일했다는 것에 조금의 위안을, 언제나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것에 격한 안도와 변화의 의지를 다지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의지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며 결국 ‘내’가 행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끔도 된다. 그렇더래도 오늘의 이 <풍경소리>는 한동안 지속되어 마음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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