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유령소년을 만드는가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푸른숲, 2017.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치듯이 제목을 지나쳐가다 흠칫 놀랐지만 이내 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책을 쓴 이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책제목은 자극적이기도 하면서 보편적이다. 원제목이 Ghost Boy임을 생각하면 제목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얼마나 다른가. 이 책의 서술톤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담담하고 구성 자체도 기교없이 이어진다. 다만,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 있을 뿐이다. 실화의 주인공이 겪는 상황이 놀랍고 안타깝기에 그에 대한 연민과 응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눈에 띈 Ghost Boy가 이 책의 내용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단 한줄로 말하긴 너무 어렵지만 많은 시간이 건너뛴 채 세상에 눈 뜬 소년은 어느날 이유도 없이 쓰러져 세상과 단절된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열두살 소년,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퇴행성 신경증으로 사지가 마비된 채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에 의식이 깨어났다. 그리고 마틴의 의식은 열아홉살 무렵 완전히 살아난다.


나는 열여섯 살 무렵에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열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예전처럼 의식을 되찾은 듯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았고, 나의 진짜 인생을 박탈당했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이글루 안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정신이 들어 보니 빙하 속에 묻혀 있었다. 완전히 무덤 속이었다. p31 


  의식이 깨어나 있는 그 오랜 시간 마틴은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모습을 보았고 들었지만 다른 모든 이들은 마틴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를 돌봐준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움직임없는 미묘한 변화를 알지 못했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두고 반복된 싸움을 벌이는 부모님과 어머니의 자살이 있었다. 어머니가 지쳐 울며 내뱉은 말,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이 말은 마틴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희귀병이나 치매, 중증질환, 장애인 등등의 병을 가진 이를 간병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 절규일 것이다. 가족 안에 치명적인 병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은 가족이 해체되는 극강의 지름길이다. 또한 가족안에서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은, 대체로 어머니는 다른 삶은 포기한 채 헌신적인 노력으로 돌봄을 수행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며 현실적인 절망의 상태에 있다. 이때의 마틴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듣지 않아야 했을 이 말을, 마틴은 깨어난 의식으로 인해 듣고 만다. 그렇다. 듣는 마틴에게도 내뱉은 엄마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잊지 못할 고통이며 절망적인 삶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족이니까, 엄마니까 당연하다는 말로 내버려두기엔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이 세상의 엄마들은 살아내고 있다. 그 절망을 내뱉은 마틴의 엄마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또한 가족의 지지가 없다면 결코 마틴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그 절망과 지침을 이어받고 결코 마틴을 놓지 않으려 한 마틴의 아버지의 노력 역시도 잊을 수 없다. 마틴의 아버지는 직장일과 병행하며 마틴을 돌보며 마틴을 가족과 떨어지게 놔두지 않았다. 마틴이 새로운 삶을 사는데 있어 마틴을 놓지 않으려는 부모님의 강한 의지가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둘 것 같아? 아빠 여기 있다, 마틴. 내가 널 붙잡고 있어. 아무 일도 생기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나를 꽉 붙들고 있는 아빠의 팔과 나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아빠의 힘이 느껴진 순간, 나는 아빠의 사랑이 바다로부터 나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바다 위로 넘칠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p159 


  또한 마틴의 삶을 변하게 해준 이는 버나라는 요양시설 간병인이었다. 학대하고 방치하며 장애물, 당나귀, 쓰레기라고 취급하던 다른 간병인들과 달리 버나는 마틴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내 준 사람이다. 그렇게 마틴을 한 인간으로서 대하며 친구처럼 말을 건네며 돌봐준 버나로 인해 마틴의 의식이 깨어났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이후로 9년의 시간이었다.

  이제 마틴은 컴퓨터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며 제 의사를 조금씩, 더 많이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공포와 같은 삶에서 다른 이들에게 강연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기까지 당연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마틴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에 맞는 적극적 의지와 실천 노력이었다. 이 책은 그런 마틴의 힘겨운 싸움과 도전의 인생을 전하는 얘기다.


나는 무엇보다 누구든 나를 좀 바라봐주길 바랐다. 나를 본다면 내 얼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분명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엔 공포가 쓰여 있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저 유령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p217


  과거로 인해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마틴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간 동안의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견뎌낸 삶에 나태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게 되는 또하나의 지점이 있다. 그것은 돌봄인들의 얘기다. 마틴은 돌봄시설을 이용하는데 그곳의 간병인들의 행태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사실 충격을 받진 않았다. 역시 그렇군이라는 말이 내뱉어지는데, 직업윤리를 떠나서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회의가 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버나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마틴을 대하는 간병인들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이 그토록 처참한 수준이라는데 놀라고 만다. 결국 유령 소년을 만드는데 그들의 지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윤리의식이 유달리 낮은 것인지, 아니면 업무환경이 이들의 의식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인지…. 삶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사실 사무치도록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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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사카이 준코, 바다출판사, 2016.

 

  편견이 분명 있긴 하다. 일본 작가의 작품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도 아주 맘에 드는 작품도 없다는 것은 자꾸 나도 모르게 ‘일본풍’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일본풍이 뭔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나면 역시나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문체나 분위기가 유사한 것 같고 이상하게 밝고 경쾌함, 유머와 위트보다는 퇴폐미를 더 느끼게 된다. 시작이야 열린 자세로 읽지만 수렴되는 결과를 보건대, 나의 편견이 너무 깊숙한 건가. 내 취향에 맞는 책을 못 만난 건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제목에서 느낀 위트는 책을 읽어가면서 사라졌다. 심지어는 중년이 처음이 아닌 사람이 어딨어, 라는 회의적인 멘트로 마감을 하고 만다. 중년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 문제의식, 일본 사회의 관점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사라지고 딱히 통찰적이지 않은 반복된 수다를 들은 기분이 되었다.

  중년. 우리나라에서는 마흔의 나이라고 해야 하나. 마흔에 관한 흔들림과 반성과 의지와 성찰에 관한 글들이 원체 많으니 비교가 되는데, 그러고 보면 이미 마흔에 관한 사회학적인 통찰과 개인의 경험에 대한 글에 대해선 익숙했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바가 전혀 신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40대의 생각들.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중년이라는 자각을 강박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으로 그 주제를 다루다 보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열렬한 동조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이 냉소적이고 뜨뜨미지근한 반응을 얻자고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막상 나이가 들면 씁쓸함과 비애가 일상생활마다 마다 묻어나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읽다 보니 외모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비중이 상당히 많다. 그렇기에 너무 단순한 패턴으로 읽혀지나 보다. 개인의 방황과 고뇌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할지언정 낯섦을 느낄 터인데 그저 마흔의 나이는 이십대와는 다른 피부, 거죽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나열하며 아름다움이라는 외모로 인해 우울과 고뇌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자주 피력하니 동조가 잘 안된다. (아니, 이건 난 아직 거죽이 많이 변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인가…)

  인생 100세 시대는 70세 시대와는 다른 중년이란 나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당연, 공감한다. 하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중년기의 모습은 새로운 인식의 변화와는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몇 살이 되어도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인정할 수 없는 중년 여성들이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추함과 불안함. 그것은 90세 인생시대에 중년을 맞이한 버블 세대들이 내뿜는 새로운 분비물이다. 미마녀들은 그런 분비물 따위 본인한테는 없다는 듯 상쾌하게 웃고 있지만, 내 손끝에서는 그 끈적이고 진득한 분비물이 확실히 느껴진다. p15


  이 책은 중년의 경험담인데 중년 중에서도 아줌마라는 자각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가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작가 역시도 ‘난 아줌마와는 달라’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그래, 미혼이라고 하니 ‘아줌마’라고 불리는데 억울함이 있겠지.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도 제3의 성이라 불리는 ‘아줌마’라는 개념과 특성의 명명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에 반한 “미마녀”라는 명명이 생겨난 것일 게다.

  하긴 작가는 중년기 변화의 핵심을 지속적으로 외모의 변화로 바라보니까 해결책도 그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중년이라는 나이의 외모를 이십대와 비교하며 아줌마임을 거부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니까 추함과 불안함이 나온다는 것이 작가의 문제인식이니까. 시든, 노화가 진행되는 몸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중년기를 지나 노년기까지의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안정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이 책은 중년에 대한 어떤 통찰과 선언의 글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미마녀”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동정과 질투섞인 조롱같기도 하다.

  어중간한 나이. 그렇게 보이긴 한다. 청춘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어중간함. 다시 생각하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중년이라는 이미지를 한꺼번에 만들어내려는 시도만 없다면 지금의 중년은, 풍요로운 시대에 풍부한 교육과 다양한 취미를 경험한 세대답게 개개인 얼마나 다른 가치와 이미지를 창출하는 존재들인지. 적당히 안정적이고 적당히 건강한 상태로 여전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나이이기도 한. 그런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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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쏟아지는 동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우박이 쏟아졌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만 해도 우박을 보리라 생각지 못했다. 바람이 먼저 불기 시작했고 머리 위로 검은 구름들이 몰려들었다. 여느 때와 다른 비라고 느낀 건, 아니 비가 오는 게 맞는 건가 한 건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양때문이었다. 바닥을 적시는 빗방울의 밀도가 너무 넓었다. 소리에 비해 바닥을 적시는 물기가 없던 탓이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바닥 한번 쳐다보는데 이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을 튕기며 또르르 굴러다니는 알갱이들이 눈에 띄었다. 차에도 떨어지는데 속도 없이 넋놓고 바라보았다. 시간을 보니 삼십여분쯤 지난 것 같은데, 잔상이 길었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p42, 한강, 눈한송이가 녹는 동안


  이때, 시간 밖에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현실상황은 잊고 마냥 넋을 놓고 있던 그 시간은 좋았다. 비가 그치고 난 뒤에야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였다. 사람에게로 떨어지진 않았나, 농작물엔 피해가지 않았나, 내 차는 멀쩡한가…. 그러고 보면 고통을 잊는 방법 중 하나는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 후보작들에도 눈이 간다. 여러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작품 하나 하나 깊은 울림을 준다. 각각이 다른 작가이며 다른 주제와 소재인 단편들인데도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 하나를 집어 올린다. 그것은 고통 아닐까.


내가 여기를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 p408, 황정은, 웃는 남자.


  우리 모두는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품고, 고통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결코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으면 고통의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삶. 김애란의 <입동>에서처럼 소소한 일상을 살며 그에 맞는 소탈한 행복을 꿈꾸었을 뿐인데 그냥 열심히 살아갔을 뿐인데 한낮에 쏟아져 내린 우박처럼, 머리를 강타하는 그런 상처를 입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삶. 나 혼자 만의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이가 있음으로 행복하다 싶지만 위험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함께 하는 이가 아니라 습관처럼 붙잡고 마는 가방처럼 그 ‘열심히’조차 패턴화되어 있기도 한 삶.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시켜 버리게 되는 그런 삶도.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p407, 황정은, 웃는 남자.


  그리하여 고통tm런 <어제의 일들>은 통째로 잊어버려 버리거나, 지치고 힘들어 억울하다, 억울하다 외치다 마침내 누구도 아닌 이에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화풀이를 하며 괴로워하는 삶.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가?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려 하는가? - 287, 이기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거고. - p184, 권여선, 이모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꽁꽁 숨어도 보고 타인의 손바닥에 담배를 지지기도 하며 맘 속의 화를 발화해 그 추동으로 잘 살아갈 듯도 하지만. 딱히….   상품처럼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거나, 그저 ‘임시’로 순간에 머무르는 삶으로 머물고 만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  p169 , 권여선, 이모


  그래서 이 고통은 기억하는 삶이어야 할지, 기억하지 않는 삶이어야 할 지 모르겠다. 조해진의 <사물의 작별>에서처럼 내가 준 고통은 알츠하이머에 걸려서도 잊지 않고 사과해야 하며 타인이 내게 준 고통은 <어제의 일들>처럼 잊어버리는 게 좋은 걸까.

  하지만,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처럼 어떤 일들에 대해선 그 고통의 밖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가 있다. 삶이란 끊임없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다. 더 나은 사회 속에서 서로가 행복을 꿈꾸며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일진대, 마냥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최선은 아님을 또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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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 김종돈 (옮긴이), 노마드북스, 2010.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 이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작가로 알려진 프리모 레비는 그 경험들을 여러 저서를 통해 나타낸 바 있다. 그의 책들은 그 시대의 경험과 생각들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했던 작가가 ‘소설’이란 형식으로 이 글을 썼을까.

  프리모 레비의 글쓰기는 직접 경험한 일들에 대한 느낌과 생각, 고통과 슬픔, 비해, 분노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하기에 생생하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나 글은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실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라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이란 형식을 빌린 것은 프리모 레비의 마음 속에 이 경험들이 허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경험이 가득한 이야기다.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바뀌었을 뿐,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한 소설이다. 빨치산 유격대원들이 러시아에서 동유럽을 거쳐 밀라노로 도착하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그 기간엔 나치에 대항한 러시아와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유격전을 비롯한 다양한 유격전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제까지의 글들이 경험을 통한 작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기술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등장인물만큼의 수많은 상황과 생각과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달랐으려나.

  그럼에도 작가가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핵심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인간의 선악과 폭력성에 관한 줄기찬 물음. 살아 있음을 대한 부끄러움. 이 살아있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늘 그가 전쟁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음에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생의 의지를 말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살아있음을, 살아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라면 빨치산으로 활동한 이력을 들어 종북좌빨이라 낙인찍었을 작가의 이력. 나치에 대항한 많은 빨치산과 레지스탕스의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많은 탈영병이 있고 길을 잃은 이들이 있다. 살기 위해, 죽이지 않기 위해 그러나 죽이기 위해 빨치산이 되고 레지스탕스가 되려는 이들의 여정은 당연 까마득하다. 굶주림과 공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막연함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떠도는 이들의 삶은 안쓰럽다. 생각보다 전투적이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은 이들의 방랑이 그대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이 책의 제목은 유대인의 애환을 담은 노래에서 따왔다. 유대인 사형수가 처형전에 적은 가사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희망한 것은 바로 노래가사를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래는 이렇게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로 전해졌다.

  2차 세계대전이 유태인 학살임을 알기에 등장하는 유태인의 대화는 여러 모로 자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유태인 풍자극이나 사람을 만나면 유대인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모습이 그 시대를 지배했던 유대인이라는 공포가 유대인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세계 곳곳에 수많은 유대인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유대인의 최종지가 늘 수용소, 죽음이 되는 그 공포에서 그들은 나치에 대항한 여러 활동을 계획하기도 하고 서로가 의지하며 가족이 연인이 부부가 된다. 어깨에 총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어느 순간 바이올린을 켜는 게달레 빨치산 대장 같은 사람도 있다. 전쟁통에도 공포 속에도 사랑은 있고. 당연 배신도 있고. 일상의 삶 또한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전쟁의 카테고리와 마주한 순간 이야기는 훨씬 더 암흑이 되고 만다. 전쟁이란 이름은 쉽게 동지가 되었다가 쉽게 적이 되기도 한다. 필요라는 이름으로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그 필요와 필연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유대인의 최종지, 나치는 패망했음에도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유격대의 여정의 끝은 어디가 될까. 암흑에서 시작해서 암흑으로 향해 가는, 그런 암흑을 마주하기에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깊은 내면의 성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인물로 인해 자연적으로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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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뜨거운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창비, 2009.


  분명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은 변했다. 민주주의가 실체가 잡히지 않은 채 피로 쟁취해야 하는 이미지에서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수준높은 우아함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를 다시 쓴다.

  그래서인지 민주주의의 국민 의사표현 방식으로으써 새롭게 ‘문자’에 대한 공방이 오가고 있다. 말끝마다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문자를 특정 집단의 테러로, 폭탄으로 규정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라 명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정보혁명 시대에 맞춘 새로운 의사표현 수단으로서 문자를 정의하며 당당하게 개인의 번호를 노출한 만큼 문제테러범, 폭탄투하범이라 규정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다.

  어쨌든 분노는 좋다. 분노는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되는 힘이다. 다만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발전은 깨어 있는 시민의 폭압적 권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국민들의 대응방식은 변화했고 여전히, 정치인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은 채다.

  100℃는 1987년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날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정신의 계승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평탄할 새가 없었다. 전쟁과 독재가 연이어지고 폭력과 폭압 속에서 짓눌리며 살아야 했다. 경제마저도 피폐한 상황에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또한 폭압아래 허물어졌다. 그 피폐한 삶에서도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으며 목숨과 민주화의 가치를 바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스러져갔고 빨갱이란 딱지를 붙이며 시뻘건 피를 빼내는 일이 당연한 듯 권력에 의해 휘둘려지던 그 때. 삶은 삶이 아니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댄 이야기만이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전해졌다. 그렇기에,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수많은 이들이 충격과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여전히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독재가 휘두르고 있었으니, 국민들이 분노의 함성을 일으키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고 깨어 있는 이들이었고 내 가족과 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영호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고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보이는 가족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대학생 영호의 이야기라기보다 영호의 어머니 이야기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어머니는 여러 의미로 정말 강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100℃는 그리고 있다. 아들의 학생운동에 반대하며 빨갱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서린 어머니가 진정, 민주화운동에 열성적이게 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강력하고 불합리한 억압이 만드는 것이다.

  눈물과 피와 목숨으로 이룬 민주주의가 어이없게도 무너지는, 독재로 회귀하는 현상을 경험한 이들의 분노와 허탈은 얼마나 강했을까. 그럼에도 촛불을 들어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꼭, 피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역사가 잘 이어져가기 위해선 또한 피흘렸던 그 시간들을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라에서 자행된 폭압적인 시위 진압방식을 보며 이 나라의 독재적이고 무식한 권력은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처럼 국민들이 폭탄 테러를 자행하지 않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이제까지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은 개인은 희생했지만 타인을 죽이면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야만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 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불을 더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100℃』가 보여주는 세계는 시민의 힘을 보여준다. 1980년, 1987년. 그리고 또한 무수한 나날들. 그리고 처음 촛불을 들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겨울부터의 경험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되고 엄숙한 분위기가 좀더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미되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의식으로 점점 변화되고 발전되어 간다. 영원히 ‘완성’ ‘완결’형이 아닌 만큼, 계속 지켜보고 관심을 쏟으며 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이 만화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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