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박이 쏟아지는 동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우박이 쏟아졌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만 해도 우박을 보리라 생각지 못했다. 바람이 먼저 불기 시작했고 머리 위로 검은 구름들이 몰려들었다. 여느 때와 다른 비라고 느낀 건, 아니 비가 오는 게 맞는 건가 한 건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양때문이었다. 바닥을 적시는 빗방울의 밀도가 너무 넓었다. 소리에 비해 바닥을 적시는 물기가 없던 탓이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바닥 한번 쳐다보는데 이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을 튕기며 또르르 굴러다니는 알갱이들이 눈에 띄었다. 차에도 떨어지는데 속도 없이 넋놓고 바라보았다. 시간을 보니 삼십여분쯤 지난 것 같은데, 잔상이 길었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p42, 한강, 눈한송이가 녹는 동안


  이때, 시간 밖에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현실상황은 잊고 마냥 넋을 놓고 있던 그 시간은 좋았다. 비가 그치고 난 뒤에야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였다. 사람에게로 떨어지진 않았나, 농작물엔 피해가지 않았나, 내 차는 멀쩡한가…. 그러고 보면 고통을 잊는 방법 중 하나는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 후보작들에도 눈이 간다. 여러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작품 하나 하나 깊은 울림을 준다. 각각이 다른 작가이며 다른 주제와 소재인 단편들인데도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 하나를 집어 올린다. 그것은 고통 아닐까.


내가 여기를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 p408, 황정은, 웃는 남자.


  우리 모두는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품고, 고통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결코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으면 고통의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삶. 김애란의 <입동>에서처럼 소소한 일상을 살며 그에 맞는 소탈한 행복을 꿈꾸었을 뿐인데 그냥 열심히 살아갔을 뿐인데 한낮에 쏟아져 내린 우박처럼, 머리를 강타하는 그런 상처를 입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삶. 나 혼자 만의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이가 있음으로 행복하다 싶지만 위험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함께 하는 이가 아니라 습관처럼 붙잡고 마는 가방처럼 그 ‘열심히’조차 패턴화되어 있기도 한 삶.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시켜 버리게 되는 그런 삶도.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p407, 황정은, 웃는 남자.


  그리하여 고통tm런 <어제의 일들>은 통째로 잊어버려 버리거나, 지치고 힘들어 억울하다, 억울하다 외치다 마침내 누구도 아닌 이에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화풀이를 하며 괴로워하는 삶.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가?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려 하는가? - 287, 이기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거고. - p184, 권여선, 이모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꽁꽁 숨어도 보고 타인의 손바닥에 담배를 지지기도 하며 맘 속의 화를 발화해 그 추동으로 잘 살아갈 듯도 하지만. 딱히….   상품처럼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거나, 그저 ‘임시’로 순간에 머무르는 삶으로 머물고 만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  p169 , 권여선, 이모


  그래서 이 고통은 기억하는 삶이어야 할지, 기억하지 않는 삶이어야 할 지 모르겠다. 조해진의 <사물의 작별>에서처럼 내가 준 고통은 알츠하이머에 걸려서도 잊지 않고 사과해야 하며 타인이 내게 준 고통은 <어제의 일들>처럼 잊어버리는 게 좋은 걸까.

  하지만,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처럼 어떤 일들에 대해선 그 고통의 밖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가 있다. 삶이란 끊임없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다. 더 나은 사회 속에서 서로가 행복을 꿈꾸며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일진대, 마냥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최선은 아님을 또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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