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너가의 남매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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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예술, 그리고 불행


타너가의 남매들, 로베르트 발저, 2017-06-28.


  산책과 눈밭 하면 어느새 로베르트 발저가 떠오른다. 자신의 작품에서처럼 크리스마스 아침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된 로베르트 발저는 그의 작품마다에서 걷고 걷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추위가 지배했던 겨울, 밤새 소복하게 쌓인 눈밭에 처음 남기는 발자국에서 근엄한 고독의 느낌이 드는 것은 발저가 남긴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발저의 첫 장편소설 『타너가의 남매들』에서도 걷는 일은 이어지고 있다. 눈쌓인 어느날, 길에서 쓰러진 한 예술가의 마지막 또한 나타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하는 이 소설엔 타너가 다섯 남매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만 마치 혼자만의 생각처럼, 독백처럼 내뱉어지는 이야기가 소설에 가득하다. 그 말하기의 중심엔 타너가의 막내 지몬이 있다.

  지몬은 서적상, 간병인, 변호사 사무원, 대규모 무역상사 직원 등등 수시로 직업을 바꿔가며 거처를 옮기며 살아간다. 늘 의무에 충실한 지몬의 형, 장남 클라우스 박사의 눈엔 이 모든 행동이 마뜩치 않다. 의무에 충실하지도 못한 나는 처음엔 클라우스 박사의 눈이 되어 지몬의 행동의 이유엔 어떤 괴팍스런 연유가 있는 것인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몬은 일을 구함과 그만둠에 있어서 언제나 당당했고 단순히 ‘하기 싫어서’가 행동의 이유가 아니었다. 지몬이 말하는 ‘지금 이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직장인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당하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일과 대우를 받을 때, 그리고 그 자신이 그 일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 지몬은 그 이유를 밝히고 일을 그만두었다.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며 누구라도 고용되어 일하기를 원하는 당신네 사무실들에서 젊은 남자의 발전은 기대하지 못하지요. 확고한 월급을 받는 것과 같은 혜택 따위 안 누려도 그만입니다. 그런 거 있으면 저는 영락하고, 어리석어지고, 쓸개 빠지고, 꽉 막힌 사람이 되거든요.


  젊은 청년 지몬은 일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형제들의 경제적 도움을 거절하면서 방랑하며 살아간다. 그 여정에서 형제들을 만나기도 하고, 누군가와 마주하고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가족과 인생과 삶에 대해 지몬은 이야기한다. 그렇게 지몬의 삶에는 지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족일 때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인물들, 특히 여인들이다. 그들에게 지몬은 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제 삶에, 제 가족과 형제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지몬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지몬을 연민하고 응원한다. 지몬의 이야기에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온갖 삶의 비의들이, 고독과 절망들이 연민들이 묻어난다. 어쩌면 끝없는 방랑이기도 한 그의 걸음에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간절함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모두 다섯이다. 특히 지몬이 사랑하며 따르는 형 카스파는 풍경화가다. 이 소설 속에서 크게 두 삶이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남 클라우스 박사로 나타나는 성실하고 의무에 찬 도시적이고 기계적인 삶과 카스파로 대표되는 방랑과 고독이 가득한 예술가의 삶으로 말이다. 카스파를 비롯하여 눈밭에서 스러져간 시인 제바스티안, 카스파의 동료화가 에르빈 등, 이야기속에서 유독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예술가의 표상처럼 생애 자체가 흔히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재능이 많았지만 정신병원에 있는 지몬의 셋째형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리하여 예술과 더불어 불행에 관해서도 열띤 견해가 펼쳐진다.


불행한 예술가는 불행한 왕과 같은 거예요. 자기가 재능이 없음을 아는 게 얼마나 영혼 깊숙이 고통스럽겠어요.


그는 제가 더 진지하게 예술에 임하기를 바랐지만, 저는 대꾸했지요. 예술을 행할 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 흥에 겨운 열성 그리고 자연 관찰이 필요할 뿐이라고요.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한 과도하고도 신성시하는 진지함이 그 일에 가할 수 있는 해악, 또 가할 수밖에 없는 해악에 대해서도 그에게 주의시켰습니다. 그는 제 말을 정말로 믿었지만 그가 움켜쥐고 있던 요지부동의 진지함을 내던지기엔 너무 나약했어요. 그후 제가 떠나왔지요.


  불행한 예술가들의 일상의 삶과 그리고 마지막을 보며, 과연 예술적 재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불행이란 말이 예술가들에게는 필연인 것처럼 예술적 영감을 위한 밑천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얼마나 많고 강하던가! 불행이 아름다움을 위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하지만 불행이 반복된다면 불행이 발판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불행한 삶일 뿐인 것을. 그렇기에 “미래를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갖고자 한다, 미래라는 건 현재를 갖지 못했을 때나 있는 거”라는 말이 와 닿는다. 미래는 늘 희망에 대한 의지의, 기대의 관점이었던 것 같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결국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족, 불안과 불행이라는 현실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판도라 상자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판도라 상자가 재앙만을 쏟아내었던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가장 큰 절망이자 불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불행, 재능, 인생, 형제, 고독, 예술 등등에 관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토해내는 지몬을 따라 여러모로 생각을 덧붙이며 깊이 잠기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들이 조금 가라앉게 하지만 가만히 앉은 채로 지몬을 따라 생각의 방랑을 이어가는 것은 즐겁다.    


말 난 김에 덧붙이자면 잃어버린 것, 지나간 것이 그토록 값어치 있는 것도 전혀 아냐. 왜냐면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보거든, 너무 추하고 악의적이라며 자주 폄하된 우리의 현재에서 나를 매혹시키는 이미지들을 엄청 많이 본다고. 그리고 두 눈에 넘치도록 널린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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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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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걸었어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김정아 (옮긴이), 반비 | 2017-08-21.


  일찌감치 ‘걷기’에 사유의 요소가 가득함을 인지한 리베카 솔닛의 걷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2017년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고 초판은 걷기의 역사였다. 굳이 ‘인문학’이라 제목만 바꿔 표지도 그대로 재출간되었는데 꼭 그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어느 순간 국내의 출판시장에서는 ‘인문학’이라는 제목을 강박적으로 붙이는 것 같다. 역사이든 인문학이든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이니까, 리베카 솔닛의 글이니까 자알 넘어간다. 솔닛이 생각하는 걷기 역시도 누구라도 흔히 걷기에서 연상하듯 건강함, 자유로움이다. 


생태주의 용어로 보행은 ‘지표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표종은 생태계 건강의 지표이고, 지표종이 위험해지거나 감소하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다는 것은 생태계에 문제가 있다는 초기 경고 신호다. 보행은 여러 가지 자유와 기쁨, 예컨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닫혀 있지 않은 멋진 공간, 구속받지 않는 육체라는 생태계의 지표종이다.


  솔닛의 다양하고 깊게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속에서 다시 한번 ‘걷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고 거기에 사유와 주장이 곁들여져 걷기가 일반적인 의미의 ‘운동’ ‘감상’ ‘소일거리’ 이상이 있음을 솔닛은 글을 통해서 보여준다.

  일상을 생각하는 일에 소요하다보니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늘 ‘생각한다’는 행위가 ‘비효율적’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의 우회적인 말인 듯이 치부되어 서러웠는데 걷기나 생각하는 일에 관해 왜 좀더 당당하게, 정치·경제·철학적 관점을 덧붙여 말하지 못했던가 하며 리베카 솔닛의 글에서 위안받고 걷기와 생각의 환상적인 조합을 적극 지지했다.

  수많은 철학자가 걷기를 통해 사유의 세계를 확장해왔고 이를 통해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대표적인 철학자로 루소와 키에르케고르를 들 수 있다. 걷기, 보행은 그 자체로 수단이자 목표이기도 하지만 의식적 문화 행위이기도 하다. 솔닛은 단지 걷는 행위를 두 발로 걷는 것에서 나아가 생각, 사유속에서 걷기와 연결하는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글이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걷기와 사유가 결합된 형태로 이야기한다.

  걷기, 직립 보행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직립 보행은 인간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진화론적 관점에 박혀 있는 백인중심주의와 여자는 보행에 서툴다거나 사유가 부족하다는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든 솔닛은 “우리가 보행을 어떤 행위로 만들 것인지가 아니라 보행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질문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말이지 보행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을까. 오랜 시간 동안 걷기, 보행의 삶을 살아왔지만 자동차 등등이 발명된 이래로 사람들은 걷는 일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걷는 일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보다 순례 또는 의지의 표현의 형태로 점차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종교적인 순례 뿐 아니라 특정한 운동으로서의 순례, 걷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와 결합된 이것은 혁명, 행진, 축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민주주의를 위한 일반 시민들의 걷기로 확장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촛불행진 역시도 포함된다.

  솔닛은 보행문학과 등반문학, 보행수필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양한 작품을 살펴보며 문학속에서 나타난 걷기와 등반의 이미지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에 갈망을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적 대도시의 출현으로 이제 이 걷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자유를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대의 도시를 산책하는 일엔 제약이 따른다. 도시는 범죄, 가난, 위생 등의 위험을 안고 있기에 도시를 활보하는 일은 이런 위협에 노출될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인종, 계급, 종교, 민족, 성적지향에 따라 제약은 더해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이런 제약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달라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았다. 보행에 관한 많은 인상적인 기록이나 일과 관련된 인물들이 남성이었던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고 여성들은 단지 걷는 행위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좌절을 토로하고 있다. 실비아 플래스, 조르주 상드, 캐럴라인 와인버그 등등이 이 좌절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글들은 아래에서 보듯 당장 오늘 누군가 쓴 글이라고 해도 전혀 괴리감이 없다.


여자의 보행은 많은 경우 이동이 아니라 공연으로 해석된다. 그런 해석대로라면 여자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걷고,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자기를 보는 남자의 경험을 위해서 걷는 셈이다.


내가 밖에 나가면 살아 있을 권리, 자유로울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없어지는구나, 세상에는 생판 남인데도 내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내가 괴롭기를 바라는 것 같은 사람이 많구나, 성은 이렇게 금방 폭력이 되는구나, 이런 상황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나 말고는 거의 없구나 하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보행’이 성립되기조차 어렵다면 보행이 지닐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보행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가고 있는 걸까. 걷기가 사유의 힘을 주지만 걷지 못할 시공간, 건강을 위한 걷기는 건물속 러닝머신으로 대체되고 정치적 메시지를 위한 행진은 정치적인 이유로 억압당하고…. 걷기를 장려하는 듯하지만 걷기가 제약되고 있는, 점점 거닐 수 있는 공간은 축소되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솔닛이 생태계 건강의 지표종이라 말하는 걷기가 이처럼 위태롭다는 것은 ‘걷기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삶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여유로움과 낭만은 고사하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도 자유롭게 거닐 시공간마저 빼앗긴 인간의 하루가 닫힌 생각속으로만 휘몰아치는 듯한 기분이다.

  걷기와 사유. 한파라서 제약당한 걷기와 사유가 아니라 걷기와 사유할 시간에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만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심적인 압박감이 걷기의 속도에서 나를 내몰고 있다. 내 몸의 지표종도 한껏 빨간불을 반짝거리고 있는데 그나마 리베카 솔닛의 언어를 담아서 한결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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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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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를 상실하려는 의지에 맞서


와일드-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PCT라 하면 PCT활용능력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으로서 인상깊게 본 다큐 <순례> 시리즈에서 마지막 4편의 예고를 보면서는 건너뛰어야지 생각했다. 어쩌다 보게 되고서는 PCT 찾기에 혈안이 되어 한동안 PCT 앓이를 했다. PCT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캘리포니아 주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 너머까지 아홉 개의 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4,285km의 도보여행 길을 말한다. 이 길을 걸으려면 적어도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이 여정을 지나는 동안 사계절을 만나게 되고 사막과 산맥, 여행자들에게 위협이 되는 곰과 뱀, 퓨마 들이 서식하며 출몰하기도 한다.

  길이란 이어지는 것이고 그냥 존재하는 것이니 이 코스에 대한 명칭이 존재하고 관련 안내서적이 있다는 것은 최초 누군가의 시도 이후 오랫동안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 역시 이 여정에 도전하는 스물 여섯의 여성이다.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로 PCT 여정을 떠나게 된 배경과 그 여정을 담고 있다. 여정 중간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 길을 걷는 이유가 엄마를 잃은 후 처절하게 무너진 자신의 절망과 상처 회복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다 아버지의 학대와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엄마에 대한 분노에 감정을 보이기도 한다. 시종일관 반복되는 엄마 때문이라는 말, 엄마로 인해 자신의 삶이 무너졌고 회복불능이라는 말이 안타까이 느껴지면서도 엄마가 돌아가신 상실감에 약물과 불륜을 반복지속하며 자신을 놓아버렸다는 저자의 얘기에 드문드문 의아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한 의문, 그 순간들에 대한 의문들이었다. 손쓸 수 없이 무력하게 되는 항거불능의 상황이겠지만 드문드문 셰릴이 부러 의지를 상실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우연히 PCT를 알게 되어 이 여정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저자는 ‘의지를 상실하려는 의지’를 놓아버린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여정의 성공 여부는 저자의 감정 정화의 여정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셰릴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여정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놓아버릴 때처럼 자신을 붙잡으려는 명분이라는 생각을 언뜻 했다.


나는 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 계획을 세우는 몇 개월 동안 나를 밀어붙이는 힘이 되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전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 PCT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줄 터였다. 그곳을 걸으면서 내 인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참이었다. 인생을 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채, 내 의지와 힘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기 이렇게 PCT에 서고 보니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비록 조금 다른 형태이긴 했지만. 여행 첫날부터 이렇게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웅크린 채 걷고 있는 모습이라니.


  셰릴은 엄마에 대한 집착적인 감정과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망쳐버린 가정을,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걸으면서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 괴롭고 상처받은 감정들은 현실적인 ‘생존’이라는 상황 앞에서 조금은 작게 보이고 부차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육체의 피폐함 앞에서 뒤로 물러나며 아물어지기도 했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자연의 경관 앞에서 인생에 대한 숙연함을 느끼기도 하면서 셰릴은 이 험난한 여정의 끝에 다다른다. 이 도보여행을 함께 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기고 주기도 하고 그러나 더 많은 나날 홀로 외로움과 추위와 배고픔과 고통, 두려움을 이겨내고 찾아낸 것은 환희였으니 그것은 셰릴이 앞으로 살아나갈 인생에 대한 깨달음과 의지를 얻어낸 덕분이고 힘든 여정을 마침내 완전히 제 힘으로 해냈다라는 의미였다.


PCT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 있지, 흉측한 내 발에 달려 있지 않았다. 온갖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가려는 강한 의지 말이다.


  셰릴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놓아버렸던 만큼이나 다시 감정을 부여잡고 길을 떠나 완성하는 과정은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거듭 가지게 했다. 수많은 사람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 도보여행에 도전하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다. 다큐에서 이 여정에 참여한 몇몇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보았다. 여성군인도 있었다. 이들이 신체적으로는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겠구나 싶었지만 그들이 이러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 단시 신체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겪은 일에 대한 정신적인 회복 욕구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고난을 통해서 고난을 잊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에 응원이 더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냥 걷고 싶은 기분이 들거나 잡다한 일에 매몰될 때마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던 기억들을 생각해보면 이 도보여행에 대한 끌림이 우연은 아니구나 싶었다.

  변화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를 채운 셰릴이 이 여정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그녀의 아이들에게 도보여행에 성공한 장소에서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해주는 모습은 아주 평화로운 풍경으로 보였다. 감정의 격량을 잠재우고 의지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자의 여유로움이 보였다고나 할까. 이 여정을 걸어나가는 의지 이전에 이 여정을 하겠다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와일드가 내게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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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 우리 주변에 널린 자연의 신호와 단서들을 알아보는 법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1
트리스탄 굴리 지음, 김지원 옮김 / 이케이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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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로망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197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마존 상공에서 여객기 공중 폭발에서 열일곱의 줄리안 케프케만이 폭발 직전 좌석이 분리되어 살아남았다. 홀로 정글에 추락한 케프케는 사고후 11일만에 원주민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줄리안이 한 일은 놀라웠다. 나무의 나이테를 파악해 북쪽 방향을 향했고 갑각류가 살고 있는 물과 식용 가능한 식물을 골라 먹었다. 밤에는 모닥불로 불을 피우기까지 했다하니 본능적인 생존의 기술인가 싶었지만 생태학자인 줄리안의 아버지는 평소 외딴곳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잊지 않고 활용하며 그 고통의 날들을 견뎌낸 것이다. 더구나 허벅지 상처에 구더기가 생길 정도의 극심한 상태였는데 버려진 오두막에서 석유를 부어 응급처치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마을을 찾아 강가를 걷고 건다가 쓰려진 상황에서 원주민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다가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마비될 것 같은데 자연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데도 오지탐험에 대한 갈망은 주기적으로 살아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오지탐험은 로망이다. 오지탐험이 일반적인 여행이나 관광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은 자연·원시적 생태에 대한 로망과 맞먹는 문명사회에 대한 회피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역시 고난과 환멸을 겪게 되겠지만 현실세계만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로망을 부추기는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20년이 넘는 야외 탐험과 연구로 자연 탐험의 기술들을 터득하고 있다. 오지에서 저자의 생존력에 대한 부러움을 가득 안고서 가벼웁게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을 보면서 마냥 생존방법을 터득하는 책인양 보고 있다.

  이 책은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볼 수 있는 자연에서 특정한 신호와 단서를 알아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하늘의 별과 나무뿌리의 선을 통해 방향을 숙지하는 법, 구름과 무지개 식물 등을 통해 날씨를 읽어내는 법, 동식물을 통해 지대를 읽는 법 등등 재밌고 의미있는 관찰의 결과를 알려준다. 가벼운 산책을 더할 수 있는 흥미와 함께 길을 잃어버린 경우 유용함을 줄 수 있기도 한 방법들이다. 특히 저자는 인도네시아 고립된 지역에 살고 있는 다약족과 함께 자연의 단서로 살아가는 모습에 관해서도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다약족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든 오랜 삶의 경험으로 터득한 자연현상을 읽어내는 방법들이 노래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진다.


   참나무를 조심하라, 벼락을 끌어들인다.

   물푸레나무를 피하라, 번개를 유혹한다.

   산사나무 아래로 들어가라. 그러면 해가 없을 거다.


  전혀 생각지 못한 단서는 네잎클로버가 주는 단서다. 당연 네잎클로버 군락지를 보면 이런 더할나위없는 행운에 기뻐하겠건만 저자는 네잎클로버 여러 개가 한군데 모여 있다면 그것은 제초제를 뿌렸다는 징후라고 말한다. 제초제와 식물 비정상적으로 자라게 한다는 점, 그리고 네잎클로버가 비정상적이었기에 나폴레옹 역기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삼 네잎클로버가 클러버의 돌연변이 형태라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 인간이 뿌린 농약이 가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네잎클로버가 한무더기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좋다고 달려가 마구 뜯거나 그 위에 드러누울 듯한데 그곳이 농약 한무더기 뿌려진 곳이라니.

  하지만 저자가 알려주는 방법들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동네 산책을 나가며 이 단서들을 파악하고 확인하리라 하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알지 못하지만 마냥 눈여겨 관찰하기는 할 지도 모르겠다. 이건 왜 이렇지라는 생각으로 흘낏.

  저자는 하늘의 별과 달, 해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당장 오늘밤 35년여 만에 펼쳐지는 '슈퍼 블루문 개기월식'이다. 오늘이 지나면 19년 뒤에야 이 현상을 볼 수 있다는데 나는 이 책의 지식으로 이 현상을 잘 관찰할 수 있을까. 북극성, 북두칠성을 찾던 어린시절에도 내가 찾은 것이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별을 바라봤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제대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찾은 것인지. 산책을 가든 등산을 가든 정상에 오르는데만 급급하고 산책을 하면서는 세밀하기 보다는 꽃이 폈네, 바람이 부네, 사람이 많네, 이런 정도로만 바라보면서 오지탐험에 대한 열망을 꿈꿀 때마다 우스워지곤 한다. 정말 바라는 것이 오지를 향한 여성이 아니라 현실을 탈피하고픈 욕망이라면 그속에서인들 기꺼이 산책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는 있을런지 싶어서.

  한편으로 이 책이 산책의 욕구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보다는 수그러지게 만들었다. 날이 추워서가 아니라 순간 ‘너무 머리가 아파서’. 자연학습 테스트처럼 이것을 다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들자 한숨부터 나왔던 까닭이다. 간사하고 모순에 가득찼다. 그러면서도 다약족과 함께 도보여행을,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라고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면 고난이고 누군가에겐 짐이 될 테인데도 다약족의 도움을 얻어서, 내가 가진 지식이 없더라도 누군가의 지식과 경험을 얻어서 그곳을 살아보고픈 욕구. 나같은 사람이 많아서 오지탐험, 정글의 법칙같은 프로가 장수를 누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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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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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노래의 도돌이표


힐빌리의 노래-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아무런 정보없이 이 책을 읽은 저녁 일찌감치 차지한 것은 할머니에게, 늙어가는 엄마, 아빠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잘해야겠다의 구체적인 내용은 설정하지 않았으니 책을 읽으면서의 반사적이고 수사적인 생각이었겠지만 또한, 다짐이기도 했다. 할모, 할보라는 호칭에 대응해 나의 할매와 할매와 할배로 불리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 나이든다는 생각,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울려대는 전화는 내 다짐이 얼마나 실행력 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듯, 늦은 건 아니냐는 듯 불안하게 들렸다. 이럴 때면 영화나 드라마에선 불길한 음악이 삽입되며 긴장을 조성하는 연출을 했다. 다음 장면에서 중환자실에 앉은 나는 다시금 깨달음은 항상 늦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원을 오가며 긴장과 불안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자의 할모와 할보처럼 나의 할매의 굴곡진 삶에 대해 생각했다. 선거 때면 각자의 주장에 소리높였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자식, 손주들의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지지하면서도 자신이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 결코 여유롭지 못했던 할매가 삶의 위기를 넘나들다 기억의 끈을 놓는 시간 동안 할매의 기쁨이 되는 자식들이 연이어 방문했다. 하나같이 연로한 노인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아프다는 말에 대해 일상적으로 반응한 것을 자아비판하는 동안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그 사람의 생애를 거듭 회고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할매가 가질 수밖에 없던,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을 이해하지만 수용하지 못한 비판과 함께 다음 선거에는 할매랑 그런 일로 투닥투닥하진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 책에 대해서도 뭔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가지고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비판을 찾고 있었을 테다. 이해는 되지만 수용하기엔 마냥 탐탁지 않은 것은 무얼까 생각하며 저자의 말대로 논문이 아니니까 저자가 겪은 일들에 대해 일단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어쩌면 ‘성공한 삶’이라 불리는 그의 인생에, 힐빌리 문화에서 탈출한 것에 적지않은 박수 또한 보냈다.     

  이 책의 흥미 요소는 이른바 슬럼가로 묘사되는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 특히 저자의 조부모님과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의 향연이다.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재밌는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초반 이 책을 흡입력있게 몰아갔고 또한 내 조부모님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더해져 애틋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벗어나는 후반부의 이야기, 어쩌면 저자의 생각이 더해지고 설교조처럼 이야기하는 후반부에서는 흥미와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논쟁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생각들이 펼쳐졌고 복지와 정책, 정치 등의 쟁점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자신의 삶을 겪으며 가지는 시각에 대해 자꾸 거리낌이 느껴졌다. 저자의 인식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나의 감정을 느꼈고 저자의 생각에 불안과 위험, 불편함이 들었다. 나에게는 무엇이 그토록 와닿지 않았던 걸까. 모든 생각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 부분 부분 맞다고 수긍하는 점은 있었다. 다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시선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고 있는 나를, 그리고 감정적인 것을 떠나서 이성적으로도 명확한 근거와 가치관으로 설득하고픈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이래저래 지친 상태로는 ‘그것은 아닌데’ ‘위험한 생각인데’라는 말만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흩어졌을 뿐이다.

  복지 문제 또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정책은 정치행위와 연관되어 결정되니까. 다만 그 정도가, 그것의 기본 바탕에 대한 합의와 추구해야 할 것은 지켜져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형태로, 아니 무조건적으로 복지정책이 나올 때마다 제 것을 뺏긴 양하며 공산주의를 외쳐대거나 복지대상자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 형성되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 책 속 저자가 가난과 마약과 폭력이 가득한 그들 힐빌리 문화에서 자신은 벗어났다고 말하며 혐오가 담긴 시선을 건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개인의 힘으로, 의지로 벗어나 그곳을 바라보며 지긋지긋함을 느낄 수는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저자에게서 우리나라 6~70년대, 80년대에도 가난한 시골에서 힘겹게 살다가 가족들의 희생을 업고 서울로 공부하러 가 출세한 자가 제 가족과 고향마을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특유의 시선이 느껴졌다. 드라마 속에서 자주 다루던 ‘나는 내 가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를 강조하는 주인공들의 모습. 대개는 법학을 공부하지만 기업쪽으로 빠지기도 하는. 그런 주인공들. 너희들의 그 가난하고 힘겨운 삶은 모자라 머리와 못난 몸뚱아리 때문이라 말하는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이, 언뜻.


우리 집안에서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다른 배경을 지닌 배우자와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이런 것들을 깨닫는 순간, 그동안 내가 내 삶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산신이 부서졌다. 머릿속에서 나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사람이고 강한 사람이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동네를 떠났고, 해병으로 복무하면서 나라를 지켰으며,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명문 로스쿨에 진학했다. 내게는 나쁜 영향력도, 성격적 결함도,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행복한 배우자와 꾸리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가장 소중한 꿈을 이루려면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야 했다. 내 자아상은 오만함이라는 가면을 쓴 괴로움에 가까웠다.


  힐빌리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접하고 있기에 저자처럼 때로는 징글징글하다는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방식이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도 느끼고 있듯이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이 아닌 것이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자본 말이다. 실력보다 운이 낫고 운보다는 인맥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저자의 경험이다. 이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이 상황, 가진 자에게는 유리하고 가지지 못한 자에겐 불리한 형태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달려갈 것이다. 거기에 맞서 적절한 인식과 대응으로 제동을 걸고 공평과 공정이라 불리는 가치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안을 애써 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당연하게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살고 있다.

  자칫 저자의 이야기는 ‘성공’의 힘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의지이며,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거대한 사회의 흐름을 따라야 하리라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그 흐름이라는 것은 내게 불필요한 것에 대한 외면과 비난은 당연한 것이고 이익이 되고 필요한 것에 대한 줄잡기이고, 그것이 어떻게 불공정하게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힐빌리 문화에서처럼 복지의 대상자인 이들에게는 마구 비난을 퍼부으면서 부정과 사기로 권력과 재력을 형성하는 이에 대해서는 약하게 비난하거나 또는 비난없이 그들의 방법을 수용하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시선은 이토록 다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의 무기력하고 의지없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 부정과 거짓, 사기, 착취로써 삶의 권력과 재력을 형성한 이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없다, 혹은 약하게 있다.  

  힐빌리문화라 불리는 공간에서 성공한 하나의 사례로 얘기되는 저자의 경험담, 성공담에 굳이 열광하지 못할 것도 없긴 하다. 잘 살고 만족한다니 다른 이들 또한 자신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몇 주 사이 각지에서 모인 친척들의 견해와 친구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의 힐빌리문화층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넘어선 혐오를 들으며,  책의 저자가 생각하는 힐빌리 문화와 복지를 떠올리며 이래저래 많은 생각들을 했다. 확실히 저자가 바라보는 복지정책의 시각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고에 가깝긴 하다.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은 다양하고 한자기를 들어 정책을 수립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프레임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성을 따르기에 쓸데없이 우려가 된다. 이 책이 사례를 넘어선 대안으로 굳어질까,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가 된 이유, 트럼프가 당선된 것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대입하게 되면서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내가 정녕 못마땅한 것은 무엇일까. 힐빌리 특유의 문화적인 특성들이 일반적으로 만연된 빈곤한 자들의 태도들이라는 것은 대체로 수급자들에게서 보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지 않는가.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없고 늘 얘기되어 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지지는 항상 정서적 지지가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되어 왔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새로운 사실인양 하며 정치놀음에 끼워 맞추는 것이 마땅치 않은 걸까. 아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가난한 이들에게만 가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일까. 저자가 말하는 ‘성공’한 삶에 대한 의문과 회의 때문일까. 결론없이 되풀이되는 문제인식과 해결방안에 대한 답답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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