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않겠다
이해 없이 당분간, 김금희 외, 걷는사람, 2017-08-06.
어느 순간부터 한국문학에서 소설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일정한 분량을 요구하는 문학상에서도 장편 아닌 중편 정도의 소설로 바뀌고 있다. 여전히 일정한 분량의 단편 소설을 신인의 등단 심사로 하고 있지만, 출판계에서는 적어도 지속적으로 ‘짧은’ 이야기를 펴내고 권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짧은 이야기는 이미, 등단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장르’인 건가?!
다양한 문학상에서 이름을 봐온 많은 작가들이 아주 ‘짧게’ 말하고 있는 책, 『이해없이 당분간』. 22명의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서 나름 어느 작가의 작품이 좋은가를 가늠부터 하면서 책장을 넘기면 그 짧은 이야기에 뭔가 아직 남은 건 아닌가 하며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소설이라기보다 수필같은 느낌을 받는다.
짧다는 건, 22명의 작가가 글을 썼다는 건 22번의 휴지를 둘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휴식을 두고도 이 책은 터무니없이 속독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난 후 책의 제목만 남았다. 이해없이 당분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이해없이 당분간 살자, 뭐 그런 말을 혼자 되뇌였다. ‘이해해라’ ‘이해해줘’ ‘이해해야지’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고 다짐하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때론 누군가를 무언가를 ‘이해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그대로 유지할 때 어떤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도대체 메워지지 않는 간극에 힘겨워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이리라. 그리고 늘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나 자신에게 두었던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지 않으려는 나를 배려없음과 이기심가득한 인간이 되려는가, 채찍질하며 어떡하든 ‘이해’하려 몸부림치려던 때,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음을 이제 알아간다. 그것은 보다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착한’에 대한 강박이었을까.
어떤 사건에 대해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지 않아’를 고수하며 편한 마음을 느꼈던 이후로 억지로 이해하려던 작위적인 형태를 버렸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일도 있는데 이런 이해에 대한 강요가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이 남은 책을 보며 다시금 다짐한다. ‘이해없이 당분간’ 살겠다라고.
마침 인터넷엔 전직 상사가 실검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행태를 알고 있기에 호탕할 수밖에 없는 웃음이 나왔고 “역시 이해가 안되는 Ⅹ”이라 외치며 하루종일 피식거렸다. 실검을 장식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 더 실소가 늘어갔다. 이해되는 건 그 개인의 욕망, 역시 이해가 안되는 것은 ‘나를 뽑아줍쇼’로 자리를 유지하는 자의 결코 변하지 않는 그 행태.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에 맞춰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를,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에도 그런 것은 역시 안중에 없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선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냥 찍어버리는 유권자들에 또한번 이해하지 않겠다가 반복된다.
하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누군가를 얼마나 알겠는가. 가까이서 본다 한들 알기 쉽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은 허무하게 들린다. 누군가를 ‘그럴 사람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짓는 것도 개인적인 관계와 관찰에 따른 나의 ‘느낌과 판단일 뿐, 그것이 진정 맞다, 아니다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그럴 사람 아니다”가 누군가에게는 “그럴 사람이다”를 완전히 반박하는 말이 아니다. 그건 별개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연이어 인터넷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가까이서 보지 못하여 ‘그럴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란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죄’에 대한 이해력은 지니고 있기에 개인에 대해 ‘이해하지 않겠다’는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