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의 구멍가게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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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풍경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남해의봄날, 2017-02-10.


  길을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편의점뿐이다. 길을 잃어버리면 찾을 수나 있을까 싶게 똑같은 간판의 편의점이 늘면서 동네 가게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오늘자 한국일보 기사에서 5대 프랜차이즈 점포가 2년 만에 1만개 증가하고 편의점이 과포화 되었다는데 편의점 업계 관계자는 아직 편의점 수가 늘어날 여력은 충분하다고 얘기한다. 편의점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는데도 편의점은 증가하고 동네 가게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걸까. 버찌씨를 받던 위그든 씨가 있는 사탕가게의 추억은 정녕 폴 빌라드에게나 가능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정류장마다 마다의 가게에서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한통 사던 시절이, 슈퍼집 아이이고 싶던 시절이 있었는데 모두, 추억 저 너머의 일이고 지금은 슈퍼집 아이도 편의점집 아이도 모두 싫다. 내가 겪는 슈퍼의 기억이 폴 빌라드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봄이 오니 담장 위로 솟아오른 나무들에 목련이 매화가 벚꽃이 활짝 피고, 피고 있다. 그런 나무 하나가 보초처럼 서 있는 구멍가게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데, 이 책은 그림으로 구멍가게의 추억들을 생각나게 해주고 있다. 정말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시절의 구멍가게의 풍경이 구멍가게를 찾아 이십여년을 노력한 작가의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오래되어 낡고 소소해서 볼품없어 보이는 가게가 지닌 은근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구멍가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두 다른 지역에 자리한 구멍가게들은 신기하게도 같았다. 가게의 풍경도 구조도 어쩜 그렇게 같은지… 그렇지만 가게 앞 나무들이 사계절을 달리하는 것처럼 이들 가게들은 하나같이 다르기도 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편의점이 전해주는 이미지와 가게들이 전해주는 이미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같으면서 소소하게 다른 구멍가게의 풍경은 편안하고 정겨운 느낌을 때론 조용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며 감정을 일렁이게 한다.


   

해남 땅끝마을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려 해남군 산이면 806번 국도 미륵사 옆 오르막을 오르던 중 구멍가게를 하나 만났다. 시대의 애환을 등에 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둑어둑한 초저녁 하늘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구멍가게에는 내가 찾아다니며 그리는 가게의 이미지가 모두 담겨 있었다. 숨죽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에도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청자색 어둠이 깔리고 가게 등 뒤로 빼곡한 나무들이 병풍처럼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묵묵히 서서 현실을 직시하는 듯하였다. 가게 옆에 선 가로등 불빛과 가게 안에서 번져 나오는 주광색 조명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성인의 밝은 눈빛 같았다. 밤의 그늘과 등불이 만나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쇠락하는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내 작품의 모티브가 이곳에 응축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품의 모티브가 응축되어 있는 해남의 가게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전하는 그 처연한 아름다움이 전해져 온다. 점점 사라진다는 낱말과 함께 이들 풍경은 내 지난 시절의 가게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직접 찾은 전국의 구멍가게들 그림 속에서 한없이 추억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한번도 본 적 없는 가게들을 찾아 가방을 둘러메고 싶어지게도 된다. 발품을 팔면 마주할 수 있게 될까. 애잔한 감정이 쌓이면서 아름다운 풍경들이 사라져 가고 있구나 싶어 쓸쓸해진다. 하긴 내게는 풍경이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의 장일 터인데. 작가도 말한다. 점점 사라지는 가게를 ‘추억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라고. 작가의 생각과 노력 덕분에 이 책은 구멍가게에 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 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 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 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듯 소소한 이야기다. 사람 냄새다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그림을 모르면서도 펜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고픈 느낌이 들만큼 눈길을 사로잡는 구멍가게의 그림들이다. 이렇게 작가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향수와 개발과 보존, 사람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될 수 있고 이에 대한 시선이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오늘도 편의점에 밀려난 가게로만 바라보았을지 모르겠다. 안타까움만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가치를 후순위로 미뤄두고 개발과 독재와 이익에 몰두하며 삶의 쇠락을 가져다주는 가치를 심고 뿌린 이가 누구던가. 보다 편리한 환경에서 살고픈 욕망이야 있다 한들, 마냥 무계획적인 채 특정한 집단의 이익 챙기기를 중시한 가치로 일관한 ‘건설’과 ‘개발’ 속에서 결코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은 주어졌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디를 둘러보든 도대체 쉴 곳이, 마음 둘 곳이, 그만큼의 정겨운 곳이 없다. 편리함은 있지만 불편하다는 것.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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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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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성과 상식 때문에…


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비채, 2017.


  이 소설이 주는 매력이 크기에 몇 번이나 영화화되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난 매혹당하지 않았다. 소설 도입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긴장감이 존 맥버니의 등장에서 시작되었기에 이미 그를 ‘문제적’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소설은 전개될 내용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할 때에야 갈팡질팡하게 되는데 그때만 해도 ‘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은 ‘존’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전하는 대신 다른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목소리로 존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존에 대해 잘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안됐다라는 생각은 갖기로 했다. 스무살 청년인데다 시작은 전쟁에서의 부상이니까.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악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 안에서 악이 어떻게 쌓여가는지 우리 중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떻게 작은 사악한 생각이 다른 사악한 생각 위에 쌓이고, 마침내 우리 안에 얼마나 엄청난 양의 악이 쌓여가는지……. 그러다가 한순간 뱉은 단 한 마디의 고약한 말이 어떻게 우리 마음속의 방아쇠를 당기는지를.


  소설은 1864년 남북전쟁 시기의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판스워스 여자 신학교를 보여준다. 교장과 교사인 두 명의 자매, 나이가 각각 다른 다섯명의 학생들, 한명의 흑인 노예가 지내고 있는 이곳으로 부상당한 북부 연방군 소속 존 맥버니 상병이 기거하게 된다. 노예해방을 둘러싸고 찬반 입장으로 나뉜 전쟁에서 적지에 낙오된 존은 판스워스 신학교의 구성원들에게 ‘기꺼이’ 도움 받을 자격을 얻는다. 부상당한 다리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구성원들 모두가 존의 회복을 도우며 존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은 신학교 구성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회복해가는 존의 상태를 들려준다.  


“선생님은 아주 행복했던 적이 있나요?”

“있었지. 아주 오래전에…….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단다.”

“무엇 때문에 끝났어요?” 어밀리아가 궁금해했다.

“이성과 상식 때문에.”


  행복이 끝난 것이 “이성과 상식을 차렸을 때”일까, “이성과 상식을 버렸을 때”일까. 신학교의 모두가, 한때 존 상병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행복했다면 그들의 이성과 상식은 ‘어떠한 상태’였던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등장인물 모두에게 이성과 상식이 있는가를 묻게 된다.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피폐한 상황 속으로 인간의 사고를 물고 가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성과 상식은 욕망에 맞추어 존을 해석하고 대한다.

  소설을 덮은 후에 이 책의 제목은 ‘매혹하는’ 사람들이 어울린다 생각했다. “돈과 정조와 목숨까지 그에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두는 단 한사람도 수동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존에게 무엇이든 바칠 준비를 ‘철회’할 수도 있었다. 매혹은 당할지언정 사랑은 하지 않았던 판스워스 학교의 여자들은 각각의 결핍과 상처에 대한 위로를 함께 살고 있는 서로에게서 얻지 못한다. 얻으려 하지 않는다. 내면에 가득한 그 결핍은 공공연한 비밀인 채로 그들 각자를 위치지우고 경계지우는 요인이 된다. 그들은 전쟁 중의 판스워스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존’에게만, ‘존’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 각자의 필요와 욕망이 존에게 전해지는 순간 적지에서 부상당한 존에게 그것은 권력과도 같은 힘이었을까. 벗어날 수 없는 덫이었을까.  


침입자가 지는 경우도 많아. 한 번은 애벌레가 붉은 개미의 보금자리를 공격했는데 애벌레가 개미한테 매혹당한 건지 아니면 잠깐 방심했던 건지, 개미들이 산산조각나고 말았어. 조그만 개미들이 촉수로 그를 어루만지는 듯했는데 얼마 안 있어 애벌레 꼬리 쪽에서 액체 같은 게 몇 방울 나왔고, 개미들이 그 액체를 아주 맛있게 나누어 먹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렇게 애벌레 진액을 다 빨아먹고 나서 개미들이 힘을 합쳐 애벌레를 바닥에 파묻어버렸어. 내 눈에는 나중에 먹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어.


  폭풍이 치고 난 후의 고요가 뭔 일이 있었던가 싶게 일상을 들이미는 고요가 떠오른다. 소설이 끝난 후에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어제와 별스럽지 않은 일상이 되어갈 하루하루가 다시금 비밀과 경계가득한 일상이 흘러갈 것이다. 한때나마 행복한 순간은 있었던가? 이 소설에서 다른 무엇보다 행복에 관한 물음이,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관한 질문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불행을 알게 된 순간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그것은 ”오직 순수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해리엇의 말을 떠올리며 결코 판스워스 학교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는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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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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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저‘나’

다른 사람, 강화길, 한겨레출판, 2017-08-29.


  왜, ‘다른’ 사람이어야 할까. 그저 ‘나’이기만 하면 안되는 걸까.

  다른 사람이기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다른 사람』은 읽지 말까 싶을 정도로 짜증스러웠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오를 대로 오른 짜증이라는 감정이 불편함임을 알았다. 소설속 상황은 마냥 현실같아서 지겨우리만치 그 상황에 ‘또’, 어김없이 ‘또’ 있다는 현실이 불편하고 감정적으로 피폐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니 책을 덮고 싶을 수밖에.『82년생 김지영』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상황을 글로 보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소설『다른 사람』. 문득 이 소설을 보면서 환상소설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걸까.

  단편집『괜찮은 사람』이 확장된 이 소설은 반복적 폭력에 놓인 ‘여성’의 상황과 내면의 목소리를 들춘다. 내면의 목소리는 절대 들리지 않는다. 그들 내면에서만 맴돌기에 절대 타인은 알 수 없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 감정에 우선하여 의미를 부여하기에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각자 가지는 내면의 목소리는 항상 한사람의 것처럼 같기만 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으레 특정한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그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된다. 대체로 주인공, 화자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되고 그렇기에 주인공은, 화자는 절대적으로 ‘선’이기를, 되도록 막말을 하지도 않고 타인을 이해하는 언행을 하기를 바라게 된다. 당연한 응원을 주기 위해서. 그러나 진아를 피해자로만 바라보던 시선은 한순간 무너진다. 그것은 진아와 수진이 피해자인 동시에 같은 상처를 받는 이에게는 가해자였기에 그렇다. 진아와 수진 그리고 유리가 겪는 고통은 분노할 수 없을 만큼의 무력함이 흘러 참으로 비참하고 애절하다. 이들은 현재의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데 어김없이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무력화되고 일상화된 폭력에 놓였던 것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옆에 있는 한 수진은 영원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열망하고 노력했던 ‘다른 사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 수진은 단 한 번도 할머니를 원망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수진은 사실 늘 원망했다. 사람들이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밖에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를 원망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사실 수진은 누가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술 먹고 한 번쯤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쟤는 춘자 딸이니까. 바로 세상의 빚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애니까!


  피해자들에게 사회가 ‘어떻게’ 했는지를 목격한 이들이 현재의 폭력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오로지 감추고, 감추고, 감추는 것이다. 진아도 수진도 그들 상황에서 오로지 서로에 대한 견제와 미움으로 삶을 버티어내는 모습은 아프게 다가온다. 같은 고통과 상처를 받는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서로를 고통의 근원, 원인으로 돌리며 스스로의 피해를 지우려는, 감추려는 모습은 왜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렀나를 깨닫게 한다.


나도 유리를 그렇게 험담했었지. 그때는 몰랐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누군가 나를 학대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이 소설은 미투 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마침내 진아가 각성한 것처럼 같은 일을 겪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야 함을. ‘다른’ 사람일 필요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세상, 그러한 인식들이 사회에 머물기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그런 “다른 사람”일 필요가 없는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선 필요한 일들을 한창 사회가 시작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여준 불편한 현실이 피해자들의 각성을 계기로 달라질 현실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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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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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살인에 대한 반응

붉은 소파, 조영주 저, 해냄, 2016.05.24.


  가끔 생각한다. 싸이코, 연쇄살인, 실종, 미제 사건…이런 단어에 반응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까. 그 광기에 자극되기 때문일까. 정보가 신속하고 빠르게 전달되면서 전세계의 잔인한 살인사건을 자주 접한다. 뉴스를 통해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참혹하고 끔찍스러워 하면서 굳이 이런 장르의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즐겁지 않은 그 상황에 빠지는 것. 현실에서는 비극으로 끝난 사건을 애도하면서 범인이 잡히고 살인의 이유가 드러나고 악인은 처벌받는 결말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온전히 범인을 쫓는 추리에 스릴을 느끼는 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연쇄살인범의 살해 이유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변함없는 클리셰를 보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문체와 구성으로 휘어잡는 이야기가 있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 범인을 쫓고 있음에도 긴장감이 없거나 무덤덤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자극’의 극대화에만 반응하며 내 몸속에서 잔혹하고 끔찍할수록 반응을 보이는 인자가 있나 섬뜩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맞닥뜨린 연쇄살인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명망있는 스타 사진작가 정석주의 딸이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된다. 사건은 모두 붉은 소파 위에서 일어났기에 정석주는 붉은 소파를 알아볼 범인을 찾기 위해 붉은 소파를 놓고 기다린다. 붉은 쇼파 위에 앉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촬영하며 15년 동안 살인범을 쫓는 삶에 올인하던 중 사건현장 사체 촬영을 제안받게 된다. 현장 사진을 찍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사진과 카메라를 매개로 사건을 추리·해결해 나가며 15년 전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간다.

  사진작가 정석주가 사건을 추리해가는 결정적인 단서는 붉은 소파가 아니라 사진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 사진을 찍는 과정, 촬영 사진 등 사진에 관계된 활동을 통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기억하고 싶은 추억과 마주하고 사건의 진실을 조합한다. 사진은 찰나의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고 찰나의 순간이 지나간 순간에는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도 왜곡되기도 하고, 또한 선명해지기도 한다. 찰나의 순간들.

  정석주에게는 사진이란 인생이다. 사진에 희노애락이 펼쳐진다. 정석주에게 사진은 외면이자 집착, 거짓이자 진실이 된다. 추억과 그리움, 아픔과 상처의 표상이지만 또한 치유의 표상이기도 하다. 사진이라는 매개를 통해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전문가’라는 말이 가지는 위엄을 느끼기도 한다.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것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란.

  등장인물은 몇 되지 않는데 모두 의뭉스러워 보였다.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드러나고 범인이 드러나는 순간의 느낌은 사실 놀랍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연쇄살인사건이었으니 범인은 역시 사이코일 것이라 짐작했고 사이코가 행한 살인의 이유는 놀랍지 않았다. 카메라는 어떤 물체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기도 하지만 잘 가리기도 한다.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사물, 인물은 맨눈으로 볼 때에 비해 ‘다르게’ 보인다.

  어떻든 소설 속 연쇄살인범에 대해 덜 놀란 것이 그의 행위가 잔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정도에 무뎌지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조금 식상해서다. 소설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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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3-2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어요...

모시빛 2018-03-26 20:30   좋아요 0 | URL
가지고 있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추리,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면 더욱...저는 그렇더라구요..
 
유령의 자연사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유령 현상에 대하여
로저 클라크 지음, 김빛나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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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죽지 않는다


유령의 자연사, 로저 클라크, 글항아리, 2017-11-03.


  『유령의 자연사』를 자연스레 유령의 자연사(自然死)로 인식했기에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손이 뻗었다. 유령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정말로 유령에게 죽음이란 있는 것인지 그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등. 유령에 대한 관심은 죽음에 대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타국에 대한 관심만큼의 다른 나라에 대해 가지는 관심처럼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며 뻗치는 유령의 세계. 많은 것이 미스터리로 존재하는 가운데 유령의 죽음을 알아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自然史에 다소 멈칫했지만 막연하지만 단순하게 대상화했던 유령과 유령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힘’이 ‘필요’가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유령의 죽음에 대한 물리적인 실체를 알고 싶었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유령이 영국에서 특히 많이 출몰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유령 출몰이 많은 것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입증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목격자, 증언이 많을 뿐이다. 과학적인 입증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들였지만 유령 존재에 대한 과학적 입증을 할 방법은 결국 없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유령에 대한 믿음과 관심을 가진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령이 변화했다는 것을 확실히 간파할 수 있었고 유령은 더 이상 영혼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령의 죽음은 결국 소멸이다. 그것은 그 유령을 ‘보는’ 이가 더 이상 없다는, 그 유령은 ‘발견되지 않았다’가 되는 것이다. 유령이 언제 발견되고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죽은 혼령이라는 맥락에서 유령은 한국귀신인데 생각해보면 귀신이나 유령이나 출몰하는 장소나 이유는 같다. ‘귀신을 보았다’에 대해 ‘심리적 요인’이라는 처방이 내려지거나 공동묘지나 사람이 죽거나 살해된 장소에 유령이 대부분 ‘발견’된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볼 때 유령 발견에 대한 역사에 심리적인 역사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심리를 좀 더 조직적으로 ‘이용·활용’하는데 어쩌면 기인 역사의 영국이 탁월했다는 점에서 유령들의 잦은 영국 출몰은 충분히 이해가 됨직하다. 앤 블린과 ‘몽스의 천사들’은 매우 유명한 유령들이며 문학속에도 수많은 유령들이 존재한다. 유령 문학이 많은 것은 유령을 목격한 이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관심에 비례하는 것이니까.


수 세기 동안 유령의 존재는 인식되어왔고,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


  한국의 곤지암에 위치한 정신병원이 CNN으로부터 ‘탁월하게’ 소름끼치는 장소로 선정된 후 단순 폐업하고 건물을 인수할 자가 없던 병원이 유령 출몰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는 과정은 저자가 말하는 바에 딱 들어맞는다. 오래도록 유령은 등장했고 한편으로는 ‘오락’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거대한 자본과 맞물려 ‘유령’이 콘텐츠화되면서 유령은 특정한 이가, 또는 미디어가 그려내는 대로 그 모습을 갖추어 특정 장소를 누비게 된다. 시대마다 유령에 대한 이미지가 변화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상업적인 이유 외에도 유령이 필요한 ‘목적’은 존재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종교, 미디어, 사회적 지위”로 들었다. 유령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공포심을 안겨주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유령의 존재를 조작·조장하며 국가도 종교도 그들의 체제를 강화하는데 활용했다.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유령에서부터 엘리멘털, 폴터가이스트, 타임슬립 등 다양한 종류의 유령이 나타나는 것도 효율적인 유령 활용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왕정복고 이후의 유령들은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잃어버린 문서나 소중한 물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돌아왔다. 섭정 시대의 유령들은 고딕풍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령들은 강령회에서 질문에 답을 내리는 존재였고, 유령을 보는 것은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아들여졌으며, 유령을 목격하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연법칙의 현현이라고 여겨졌다. 1930년대에는 폴터가이스트가 발견되었다.


  존재에 대한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유령에 대한 관심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다. 또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유령을 발견하는 상황들도 좀더 발전되어 왔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저자가 발견한 유령의 법칙을 살펴보면 유령 또한 소비재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의 목적에 맞게 변화·구현된 유령은 인간의 감정, 욕망의 정도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있다. 실체를 규명하려는 과학적인 시도와는 별개로 ‘유령’은 소멸되지 않은 채 일상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한스 홀처의 말처럼 결국 “유령은 어찌 됐든 인간 또는 인간의 일부이며, 따라서 정서적 자극의 영향을 받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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