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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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사회


불편한 미술관-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8-01-08.


  오늘 하루도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와 상위에 랭크되는 기사는 온통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다. 몰카 유출 사건이 세 건이나 되고 성폭력과 폭력과 살인은 빠짐없이 일어나고 있는데다 폭력과 살인의 이유는 너무나 어이없어서 할말을 잊게 한다. 더구나 코미디를 넘어선 짜증나는 정치권 의원, 경쟁이라도 벌이듯 다양한 갑질 레파토리를 내보내는 재력가들의 기사가 체한듯 속을 답답하게 한다. 그 와중에 체증이 내려갈 듯 긍정적인 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배려’다.

  대통령의 배려. 업무를 위한 이동임에도 교통통제로 출퇴근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 야간 헬기 이동을 했다는 기사다. 벌써 대통령 선거를 한지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권으로부터 ‘시민들을 위한 배려’로 정권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무엇보다 이런 일화를 종종 접했기에 일회성이 아니라 진정성과 지속성이 있음을 믿게 된다. 그동안 도넘은 ‘권위주의’에 매몰되었던 권력자들로 인해 국민이 존중받고 배려받아야 할 존재라는 당연함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았다.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배려’라는 메시지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필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착하다거나 나쁘다거나 흑백논리를 들이대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마주치는 인권의 문제는 선과 악의 대립보다 ‘배려하는 생활’ 대 ‘무신경한 태도’라는 구도로 보아야 할 때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앎과 모름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혐오표현의 경우가 그러한데, 어떤 말이 상처를 주는지 미리 알면 가해자가 되지 않지만 잘 모르고 있다가는 가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불편한 미술관』은 그림을 통해 보는 ‘인권’이야기다. 저자의 말처럼 인권에 대한 문제는 배려하지 않음에서 일어난다. 물론 선악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볼 수 없다. 하지만 절대 악이 아니라 무신경함으로 모름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면 정말 심각하지 않은가. 작가는 이것이야말로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간과하는 기본적인 인권과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인권 문제를 그림으로 풀어가고 있어서 이미지에 힘입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미술책에서 본 고대 그리스의 그림과 조각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그림을 넘나들며 시대를 뛰어넘어 여성, 장애인, 인종, 성소수자, 이주민, 빈곤인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표현과 신앙의 자유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나친 미화 역시 일종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타히티 섬에서 신비로운 원주민의 생활을 강렬하게 그린 화가로 평가받는 고갱, 그는 식민지 여성을 대상화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같은 화가들에게도 욕을 먹었다 한다. 고갱처럼 그림 속에서 여성, 장애인, 노인, 흑인 등은 늘 과도하게 희화화하거나 미화되었다. 같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타자화, 대상화되었다.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을 즐기며 간음의 시선으로 여성을 보는 그림들. 이런 시선들이 고착화되어 점점 ‘혐오’로 번져간다. 그런 시선을 두는 것을 당연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인생의 세 단계를 그리면 어떻게 될까. 친구가 이렇게 농담을 했다. “할아버지는 ‘태극기집회’, 아버지는 ‘깨시민’, 아들은 ‘일베’.”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는 웃지 못했다. 정치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 사이 적대감이 문제다. 아들이 일베를 하고 할아버지가 태극기집회를 나가는 이유는 어쩌면 아버지가 깨시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너무 싫은 나머지, 서로가 더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이 말에서 끔찍함을 느꼈다. 하지만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우리 사회에 가족들 간에도 ‘배려’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은 경쟁사회의 교육이 만든 비극이다. 차별을 당연하게 가르친 결과다. 같은 단지임에도 임대 아파트 주민은 놀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적은 평수,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이 ‘배려’라고 가르칠까. 배려를 몸소 보여주었을까. 본 적 없는 ‘배려’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없다. 그러니 새삼 작은 ‘배려’ 하나하나가 주는 놀라움이 크다.

  난무하는 불편한 기사가 많은데 이제는 하다하다 그림을 보면서까지 불편해 해야 하느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길러지는 ‘시선’을 통해 우리는 불편함을 불편하지 않음으로 인식할 것이다. 제 권리만 주장하며 타인의 권리는 간과하는 이기심은 그렇게 길러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세상이 만든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배려가 난무하는 세상이라 끔찍한 기사가 나올 틈이 없는 세상을 보고프다면 익숙하게, 뿌리박힌 타인에 대한 ‘타자화’의 시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사건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트집’이기도 하지만 인권에 관한한 예민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언제나 작은 불편함이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무엇이 불편함인지 느끼며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배려의 사회’가 되기를 불편한 미술관에 들렀다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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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술연구소 - 생활인을 위한 자유의 기술
제현주.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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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드기는 기술들

일상기술연구소-생활인을 위한 자유의 기술, 제현주·금정연, 어크로스, 2017-05-17.


  언제부터 일상이 흐트러졌는지 모르겠다. 일상의 게으름이 규칙적으로 안착되는 것도 참으로 끈질기다. 균열은 한번인데 파동은 징하다. 그렇기에 때때로 일상을 ‘잡아놓고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같다. 물론 꾸준히 지켜지지 않을 것들이다. 현안에 매몰되어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돌려놓았지만 어쩔 수 없는 찝찝함에 마치 새로운 결심이라도 하는 양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한 것인 양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사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어쩌면 이런 반복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련다와 나는 그렇게 못 살겠다는 것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 촘촘한 시간을 쓰려는 나를 해방시키려는 진득한 노력의 과정일 것이다. 맘과는 다른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며 방어막을 형성하는 모습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일정한 삶의 양식이 있잖아요. 그런 사회에서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을 실천하고 유지하면서 살려면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일상은 흐트러졌고 일은 미뤄놓았고 그렇기에 일은 쌓였고 난관을 파헤치기 위해서 규칙과 정리라는 단어를 일부러 끌어다 놓는다. 그래서 굳이 ‘일상기술'을 집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사회가 강요하는 일정한 삶의 양식을 잘 살고 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하면서 그것대로 살기 싫어 발광하는 것일 게다.

  돈을 주고 배우라고 해도 배우지 않을 ‘기술’을 기우적거리며 관심있는 척했는데 이 책은 방학 생활계획표처럼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형성시키는 기술에 관한 책은 아니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불안하기에 일과 삶에 대해 가깝게 초점을 맞추어 하루를, 미래를 살기 위한 방편을 얘기한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려 하다 보면 내일을, 한주를, 한달을, 점점 멀리까지도 잘 살아갈 힘이 생길 거라는 것이 좋은 일상을 만드는 구체적인 기술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은 기획되었다.

  몸은 따라 주지 않지만 마음속에 한번쯤은 저장해 놓은 삶의 방식을 몸으로 행하고 있는 이들의 일상을 얘기한다. 각각의 이야기에 딱 맞는 사람이 돈관리, 일벌이기, 배우기, 운동하기, 독립하기, 함께 살기 등등에 자신의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큰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어떤 면에선 따라하기엔 너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여러 기술 중에서 “함께 살기의 기술”에 눈이 갔다. 셰어하우스처럼 공동주거생활을 하지만 공간나눔만이 아니라 경제와 생활까지도 공유하는 함께 살기의 유용성에 혹하기도 했다. “느슨한 관계”. 느슨한 공동체적 삶은 이상적인 환상인지 실천가능한 대안인지가 궁금해진다. 같은 취미나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맺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필수적인 개인적인 공간에 관한 욕망이 어떻게 조절될지는 겪어봐야 아는 것이니까. 


일에는 자아를 채워주는 일과 통장을 채워주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자아를 채워주는 일은 페이가 좀 적어도 어떻게든 조건을 맞춰서 웬만하면 하고요. 통장을 채워주는 일인데 클라이언트가 딱 봐도 까다로울 것 같고 일정도 촉박하다 싶으면, 페이를 많이 요구해서 협상이 되면 그 일을 수락하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그 두 개를 동시에 할 때인 것 같아요.


  맞다. 일은 자아와 통장 모두를 채워줘야 만족된다. 이 책은 한편으론 어떻게 될지 모를 ‘직장인의 삶’에 대비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도 같다. 삶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경제적인 면과 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위해 경제적인 면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가 다양한 기술을 전수하는 사람들의 기본 전제로 깔려있다. 한편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직장인이기보다는 프리랜서 혹은 자영업자들이라는 점에서도 직장인이 아닌 삶을 준비하기 위한 기술책인 것도 같다. 왜 이토록 ‘직장인’ 아닌 삶을 원하는가 생각하면서 씁쓸하다. 취업난으로 직장인이 되지 못해 힘겨워하면서 직장인이 되어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힘겨워한다.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선택한 이들의 결과물을 사람들은 궁금해하고 그 방법들을 알고자 한다. 소소하게 준비해야 할 것은 많다. 돈관리 방법도 알아야 하고 손기술을 익히는 것도 더 많은 것들을 배워나가야 하기도 하고 생각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이 어렵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한 사람들은 “꼬드기고” 이런 일들이 궁금한 이들은 “또 기꺼이 꼬드김을 당하려” 한다.

  책을 보다 보면 기술을 터득한 이들의 삶은 모두 좋아 보이고 내게는 어떤 기술이 있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사는 일이란 늘 이렇게 남이 하는 일엔 끌리면서 내가 하는 일은 비루해 보이나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들이 꼬드긴 기술들에 쉬이 꼬드김 당하지 않으려면 내 삶의 방식을 잘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내 삶의 태도와 취향을 잘 알아야 얇은 귀가 벌인 일로 실패하지 않는 확고한 내 삶의 완성을 이루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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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 - 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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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서울, 평양냉면

빛나-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서울셀렉션, 2017.


  왜 서울일까가 가장 궁금했다. 르 클레지오가 친한(?) 작가라는 이야기는 접했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을 때는 그렇게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때 알던 이의 이름인 ‘빛나’라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 소설이 ‘서울’이어야 하는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소설에서 르 클레지오가 저자라는 사실을 지운다면 외국 작가가 썼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묘사는 익숙하다. 다르게 얘기한다면 굳이 ‘서울’이어야 하는 이유나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배경을 뉴욕으로 바꾸고 소녀를 ‘제인’이라 불러도 이 이야기가 가진 차별성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노벨상 수상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썼다는 이 소설에서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익숙해서 그 배경에 대한 묘사에 무뎠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어쩌면 한국이란 나라, 서울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다면 비둘기를 키우는 ‘조한수 아저씨’가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전쟁때 할아버지가 키우던 비둘기 한쌍을 데리고 38선을 넘어왔다. 어머니는 언젠가 그 새들이 고향으로 날아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키우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조씨는 비둘기가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수위로 일하는 아파트 건물 Good Luck! 옥상에서 북에서 온 비둘기 자손을 키운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진 한국. 당연 외국인들에겐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사연들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현재의 한국이 가진 서사이니까. 클레지오는 한국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 분단국가의 상황을,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의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고향의 가족을 향해 날리는 메신저 비둘기들의 여행은 환상적이면서도 마음졸이게 된다. 마침내 그 이야기들이 희망을 전하는 이야기로 대체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인데 생각하게 된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날이라서가 아니라 평화의 상징은 이제 비둘기가 아니라 ‘평양냉면’이라는 글들이 뭔가 벅차오름을 느끼게 하는 날. 이러한 일들이 이어지면 이제 한국에 대해서 서울에 대해서 또다른 이야기가 만들어 질 것이다. 향수에 젖은 그리움 가득한 분위기만을 담지 않은. 비둘기가 날아가며 느껴지는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하며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의 그런 빛깔로.

  조씨의 이야기는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다. 빛나는 전라도 어촌에서 살다 교육은 서울에서 받으라는 부모님으로 인해 서울 고모댁에서 자란다. 고모와 사촌에게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산다. 우연히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을 앓는 살로메, 김세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빛나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으며 살로메는 바깥세상을 보고, 상상의 여행을 한다. 소설은 빛나가 들려주는 다섯 개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명확해 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살로메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수당을 받는 이야기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하는  듯했지만, 이 가상의 이야기들은 빛나가 말하듯 연결되어 있다. Good Luck!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연결이 되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과 함께 윤회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대도시 서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만큼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처하고 있는 상황도 그들 면면도 다르지만 도시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익숙한 이야기가 현실과 환상의 교차로 진행된다. 빛나는, 이 소설은, 빛나기보다 쓸쓸하고 슬프다.


그녀는 내가 가진 욕망과 이야기에 좌우되면서 구불구불한 상상의 세계를 따라 맹목적으로 나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녀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면서 죽음의 시간을 늦추게 하는 에너지가 계속 흐르게 할 수도, 그 흐름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삶과 죽음과 고통과 희망들이 교차하는 살이. 애정이 교차하고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지는 살이. 살로메의 죽음 후에 더 이상 빛나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됐지만 빛나는 “해방될 것 같다”라고 말한다. “현재만 중요하고 산 사람만 중요한 이 큰 도시에서,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빛나에게 이야기는 살로메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빛나 자신의 세상살이를 견뎌내는 힘이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빛나가 찾아낸 이야기들은 죽음을 앞둔 살로메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얘기이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기 힘들었던 스스로를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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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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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알제리의 유령들, 황여정, 문학동네.


  마르크스가 독일 화폐 모델이 되었다. 통용되기 위해선 가격이 있어야 하지만 0유로. 자본과 적대적이었던 마르크스를 충실히 대변하는 기념 지폐다. 이 세상에서 참 불편한 이름의 대표격이기도 한 마르크스의 얼굴이 10만원권 지폐에 그려진다면 마르크스에게 가지는 불편한 시선들이 거두어질까 궁금해진다. 안타깝게도 마르크스가 한국 지폐 모델이 될 리가 없다. 특정 정당이 거품 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수많은 이들의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삶을 힘겹게 만든 탁월한 존재였다. 히틀러와는 차원이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현재진행형이면서 히틀러급으로 반응하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알제리의 유령들』에서도 사람들을 힘겨운 삶으로 이끄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연애소설처럼 그려진 징과 율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르크스에게 가 닿는가. 가볍게 단문으로 쳐내는 글들은 마르크스가 지닌 존재감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과연 이 이야기를 믿어도 좋은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연극이 끝난다. 마르크스가 쓴 유일한 희곡의 막이 오른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유령을 마주한 듯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린다. 몇 번이나 반복재생된 희곡 <알제리의 유령들>이 마르크스 저작이란 이름을 달고서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아니, 마르크스란 이름만 보면 부르르 떠는 권력이 존재하는 건가. 시절의 음률을 함께 나눈 관계들이 고통받고 상처받으며 서로에게 파괴된 음들을 던진다.


시대는 운명을 다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흔적을 추슬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건 언제나 몇몇의 개인들이며, 그들조차도 기력이 다할 때가 온다. 비단 연극판의 일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현실은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적을 만드는 건 언제나 사람이며, 그래서 결국엔 헷갈리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운명을 다했나. 다해가는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욱 민감하게 이 단어들에 반응하는 나라로 대한민국만한 데가 있을까. 대학생들의 연극적 상상력이 만든 연극을 놓고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권력이 원하는 이념의 잣대로 존엄을 말살하고 생명을 파괴하던 시대는 소멸되었나. 새로운 흐름들이 분명 이어지고 있으니 달뜨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좀처럼 편하게 받아들이기엔 여전한 이념용 말들이 곳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도 듣고 있어야 한다. 종북과 좌파라는 단어만 붙이면 진실은 상관없는 이들이 있으니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진실에 눈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이들의 세상은 얼마나 좋으려나.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내가 보고 듣고 겪은 일도 어떤 땐 사실이 아닐 때도 있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 채 겪었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거짓이 사실이 되는 경우도 있지. 누군가 그걸 사실로 믿을 때. 속았을 수도 있고 그냥 믿었을 수도 있고 속아준 것일 수도 있고 속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애초에 자네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야. 그렇다면 애초에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니 판단을 안 할 건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헤아리는 동안 거짓이 진실을 파괴하고 진실이 필요치 않은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사람 진실에 상관없이 구는 것도 사람.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람. 그 잔인하고 처절한 유린에 유령처럼 생을 배회하는 일들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져 생에 긴 파국을 남기고 쓸쓸함을 남긴다.


기억으로 인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해도 계속해서 자기를 일관된 자기로 느낄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피로감은 바로 그 자기감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데서 오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알제리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는 아니었다.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얻어질 수 있는 것, 자기가 이전의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자기로 존재했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이전의 자기로 합류할 때 비로소 자기와 비자기에 폐쇄되었던 자기가 자기이기도 하고 자기가 아니기도 한 자기가 될 수 있고, 그때 경험되는 것이 자유였다.


  부모들이 겪은 일들로 어릴 적부터 잘 지내온 징과 율이 오랜 시간을 서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회복되지 않은 상처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그토록 세상을 서로를 배회하고만 있는 것은 물음을 갖게 했지만 생이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까. 부모들처럼 징과 율은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시대가 겪은 기억이 세대에게 전해질 때에 그것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종북과 좌파라는 두 단어로 진실과 거짓에 공간에 빠지는 이들이 다음 세대들의 자유를 왜곡시키고 말살시킬 때마다 청춘의 세대들의 정신이 회복되는데 무한한 시간이 필요로 된다는 아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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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다빈치 art 18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신성림 옮김 / 다빈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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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보는 시선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J.M.G. 르 클레지오 저, 다빈치, 2008.


  프리다 칼로의 바비인형이 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칼로의 인형은 칼로가 입었던 옷을 입고 칼로의 상징인 눈썹을 하고 닮은 듯 아닌듯한 자태로 서 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미국 완구회사가 제작했다는데 현재는 가족들의 초상권 제기로 판매금지 상태라고 한다. 가족이라는 얘기에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자녀를 먼저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녀는 없고 그들의 부모도 형제들도 사망했을 테니까. 기사엔 칼로의 조카딸과 가족이 초상권을 독점 소유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칼로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영감을 불어넣는 여성’으로 선택되어 자신을 닮은 바비인형의 탄생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초상권 제기로 인해 판매 금지가 되었다는 한국 기사엔 ‘여류 화가’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여성을 억압한 관습에 저항한 페미니스트라 소개하면서 ‘여류 화가’임을 절대 놓치지 않는 기사를 보면서 칼로는 뭐라고 말했을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클레지오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기술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지만 무게중심은 프리다 칼로 쪽으로 기운다. 프리디 칼로의 전생애를 중심으로 한다면 리베라는 연인이자 남편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은 무시못할 만큼이긴 하다. 화가로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 책속에 나타나는데 그림 때문에라도 프리다 칼로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프리다가 자화상을 주로 그렸기 때문이다. 화가로서는 칼로보다는 디에고의 활동이 방대하고 ‘화가’로서의 명성이 큰 것 같다.

  반면에 프리다 칼로는 그림보다도 자신의 생애 자체로 회자된다. 프리다는 한순간도 편치 않고 급박한 삶속에 있었다. 프리다가 살아간 시대는 1907~1954년의 멕시코. 프리다는 화가로서의 명성보다는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끔찍한 사고 후에도 굳건히 생을 살아간 여성으로 위치되었던 삶이기도 했다. 이런 프리다에 대한 평가는 차츰 변화되어 혁명가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강렬한 인상을 전한다.


이십 년이 지난 뒤에도 프리다 칼로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기막힌 시절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 만났던 모든 이들, 그들이 투쟁하던 이상을 고스란히 기억 속에 간직했다. 사실 그녀의 그림은 혁명적이지 않고 벽화주의 화가들의 웅장한 작품처럼 정치적 참여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혁명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의 예술은 참여예술이 아니다. 그녀의 투쟁이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과 그녀의 고독한 삶에 대해, 고통의 감옥에 대해, 그녀의 자존심이 입은 상처에 대해, 그리고 남성이 지배하는 멕시코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섯 살에 소아마비로 인해 장애를 갖고 있는 프리다가 18세에 겪은 버스 사고는 ‘끔찍했다’는 한마디 말로 하기엔 프리다의 고통을 너무나 가볍게 만드는 것 같다.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며 금속 기둥이 프리다의 몸을 관통했고 폭발한 버스의 잔해가 프리다의 몸속에 박혔다. 수술은 끝이 없이 반복되었고 회복은 더뎠고 소녀가 가진 꿈도 날아가 버렸다. 늘 침대에 있어야 했던 프리다는 자신의 고통을 그림으로 그리며 삶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프리다가 화가인 디에고와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르겠다. 프리다에게 있어 그림이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었다면 프리다의 그림을 알아봐준 디에고에게서 고통을 나눌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스물 한 살 연상의 바람둥이 화가에 대한 끌림은 의지하고픈 마음과 자유스럽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투사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어찌 그 심정을 알겠으며 프리다가 끝없이 한 남자로서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사랑이 고통을 더하는 데 결코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디에고의 심각한 여성 편력과 동생과의 불륜을 끝없이 참은 것이 사랑의 힘이었을까. 신체적 고통을 넘어선 정신적 고통을 주는 존재,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의 남편. 왜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역할을 놓지 못했을까. 상처입은 프리다의 자존심도 고통을 이겨낼 의지도 모두 프리다의 내면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 프리다는 계속 ‘디에고의 여자’를 놓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프리다는 심각한 몸 상태에도 몇 번의 유산에도 아이 갖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또다시 상처받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프리다가 디에고를 떠났을 때는 유산 후였고 여전히 디에고는 자신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으니 프리다의 인내심이 다한 것은 디에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혼과 재결합을 제시한 것은 항상 디에고였다. 그래서인지 프리다 칼로의 ‘페미니스트’로서의 부각은 강한 울림으로, 느낌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하긴 프리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자처한 적은 없다.

  초기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동 또한 디에고를 위해, 디에고에 의해서인 것도. 프리다 칼로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프리다에게 강렬하게 매료되었던 것 같은데 프리다의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시선을 끄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프리다에 대한 매혹은 프리다 생애 자체가 주는 스토리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다시 이 책을 훑어보며 처음과는 달리 프리다의 ‘주체적’인 면을 찾게 된다. 디에고의 엄청난 ‘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줄어들지 않았고 디에고는 그런 일로는 화가로서 혁명가로서 달리 평가받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그의 아내 프리다만이 상처입었을 뿐이다. 

  그런 상처를 프리다는 그림으로 그렸다. 한편으로는 디에고로 인해 상처와 고통받은 아내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그림으로 형상화낸 것이 의지와 주체적인 표현이기도 하겠다. 이런 면에서 예술이 가진 힘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할 것을 알았던지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프리다가 ‘원하는 여인’은 어떤 상이었을까. 프리다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온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나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와 조화를 이루리라. 내가 살아갈 날과 시간과 분은 내게 속한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속하겠지. 나의 광기가 작업 속으로 도주할 수단이 되지 못할 테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들 작품의 포로로 가둘 것이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은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


  쉬이 무너지지 않고 초기 생의 고통을 예술혼에 투영하였던 프리다의 삶은 경이롭다. 아마도 그렇기에 프리다의 삶이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 두 화가의 삶이 너무나 비교된다. 내가 그들의 삶을 모르기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이 책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클레지오 작가는 이들의 삶을 한편의 소설처럼 엮어 놓은 솜씨가 있다. 실존 인물의 삶을 전하는 클레지오의 시각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리다의 힘겨운 삶과 그 고통의 면면들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반면에 디에고는 너무도 열정적이고 천재적인 화가이자 혁명가로 부각되는데 프리다는 늘 디에고에 대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도 같다. 제 아무리 디에고를 언제고 사랑했다 하지만 늘 디에고로 귀결되는 이 집착과도 같은 사랑은 아름답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환멸스러움을 더하기도 한다. 어쩌면 불편하고도 짠한 이 연민은 이렇게 묘사한 작가의 언어때문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부 예술가의 삶은 전문가적인 역량에선 늘 여성이 남성보다 ‘못한’ 것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여성의 예술혼은 늘 남성에 ‘의해’ 강화되는 것으로 만든다. 늘 고정적으로 묘사되는 예술가로서의 남성과 여성, 부부들. 그것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늘 ‘그렇게 보는’ 시각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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