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
클레망틴 오탱 지음, 류은소라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마초가 좋니?

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클레망틴 오탱, 미래의창, 2016.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걸스플레인 콘셉트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누나가 알려줄게, 페미니즘 잘 얘기해주는 누나라고나 할까. 남동생의 질문에 답해주는 형태의 이 책은 짧은 페이지 속에 여성운동의 역사를 잘 설명해놓았다. 무엇보다 ‘마초이즘’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재밌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파리 부시장을 지낸 정치인이며 성폭력, 강간 피해자이다. '정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정신병자에게 당했다'라고만 생각하던 작가가 여성과 억압을 성찰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2년 전 오늘, 강남역 살인사건이 촉발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이 단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혐오 확산과 미러링과 함께 전개된 남성혐오, 미투운동과 남성 몰카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성별 대결 논쟁으로 치닫고도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를 테러리스트와 동일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스트를 향한 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빗속에서 추모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염산 테러 공격” 하겠다는 글이 어느 싸이트에 올라왔다. 농담으로, 허세 가득한 글로 치부하기엔 지금의 현실이 녹록치 않고 이런 글을 쉬이 게재한다는 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이처럼 ‘여성이 싫어서’ ‘페미니스트를 증오해서’ ‘여성이 만나주지 않아서‘ 등등의 ’여성 때문에’를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총기난사사건과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서. 남자들이 원하는 형태의 ‘여자가 아니라서’의 이유로.

  ‘마초’. 마초적이라는 이 외국 단어를 남성들은 매우, 격렬하게 좋아하는 듯하다. 마초가 되지 못하는 것이 삶의 실패라도 되는 양 마초적임을 발산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마초적’임을 과시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허세와 멸시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들의 마초성은 여성을 억압하거나 여성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런 식의 말에 발끈하는, 억울한 남성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듯 마초는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여성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다. 어떤가. 마초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토대를 가부장제로 본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게 “그럼 왜 뛰쳐나오지 않고 같이 사는 거야”라며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책은 피해자가 집을 나오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식의 이런 판단은 너무 단순하고 미숙한 태도야.

어떠한 권한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세계의 전부인 가정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런 식의 생각은 정작 심리적 가해자 가 가정 폭력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는 거지. 저마다의 개인이 마른 나뭇가지 꺾듯 단박에 가부장제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이와 같은 말을 오늘도 보았다. 피팅 모델 알바를 하면서 남성들에게 집단 성추행을 당하고 몰카를 찍힌 여성들의 피해를 알리는 글에서다. ‘속옷 촬영을 거부하고 나오면 되지, 왜 못 나왔냐’는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반응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같을까.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겠다고 하니 수사를 지켜봐야하겠지만 당장 피해자도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충격적인 것은 남성들의 집단적인 마초이즘의 발현이다. 그들은 집단으로 함께하고 있어서인지 진정 두려움도 없고 범죄의식도 없이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일들을 지속해왔다. 여성을 억압할 확실한 수단을 쟁취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오래도록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죄의식도 없이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퍼붓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생활해 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를 불편하다 못해 혐오까지 하는 그들의 위선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남동생의 질문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여성들이 받는 일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무수히 차별받고 성폭력의 피해 또한 일상적인 여성들의 상황은 간과하면서도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내는 여성들의 목소리나 퍼포먼스들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은 성폭력 피해자의 울분이나 고용 등 각종 차별받는 여성의 목소리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동참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생각하지않고 과장된 제스처로 행주나 브래지어를 태우는 퍼포먼스 같은 것을 행하는 경우에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는 저런 것’이라며 비이성적, 과격하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렇게 페미니스트들이 전하는 ‘내용’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마초이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지배 관계를 역전하는 것이 아니야. 여성들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버리지 않는 것,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 가증성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기를 바라는 거야.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 동등이라고 무수히 외쳐대도 결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내려온 저 마초이즘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열망 아닐까. 성차별 정책에 대해 무조건 역차별이라거나 특히 한국의 경우 그러면 여자도 군대가라는 말로 모든 논의를 펼치는 이들에게도 페미니스트 작가의 딱 맞는 설명이 있다.


‘역차별’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야! 영미권의 ‘적극적 조치’라는 말의 잘못된 표현이야. 이론 인해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 ‘적극적 조치’ 또는 ‘자발적 조치’라고 하는 게 옳아. 적극적 조치란 피해를 입은 일부 집단에게 혜택을 주어 불평등을 개선해 나가자는 의도에서 실행되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말하는데, 특히 남녀 불평등과 관련,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혜택에서 시작되었어.


  페미니즘의 역사는 이제 100년 즈음인데 늘 주장하는 바가 큰 차이가 없다. 본질적인 것을 두고 반복된 투쟁의 역사가 지속된다. 작가가 이토록 남동생에게 설명을 잘하고 있는 것도 반복된 투쟁의 역사속에 남성들의 질문들이 늘 한곁같았다는 얘기 아닐까. 이해하려는 마음없이 상황을 인식하려는 마음 없이 그렇게 늘. 가부장제 안에서 마초이즘의 환상을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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