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1980년에는.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달콤한책, 2018.


  이 세계는 1980년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1980년의 테헤란에서도 1980년의 광주에서도.

  소설은 임신 칠개월의 여자가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피해 삼 층으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 뱃속에 있던 아기, 마리암이다.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란혁명을 겪은 마리암은 소용돌이의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여섯 살에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마리암이 두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이 수필처럼 현실을 머금고 소설처럼 환상의 이야기를 머금고 펼쳐진다. 망명한 이들의 겪는 이민자의 설움, 정체성의 혼란을 줌파 라히리는 소설에 담았다. 나라가 달라서인지 같으면서도 다른 결을 보이는 이 소설은 이란이라는 나라를 페르시아로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느낌처럼 조금은 환상문학에 가깝게 느껴진다.

  알라딘과 천일야화를 연결지으며 양탄자가 하늘을 나르고 램프의 요정이 등장하는 이미지속에 늘 신비로운, 동화같은 이라고 생각해버리게 하는 단어, 페르시아. 하지만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다른 나라들이, 특히 서양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페르시아는 이란이고 이란 정부는 1935년부터 국호를 이란이라 부르도록 요청하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신비와 환상은 사라지고 당장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란을 미사일을 떠올리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밤마다 식은땀 흘리며 깨어난 마리암의 아버지가 떠올리는 것처럼, 망자들을 떠올리는 마리암처럼. 마리암의 가족이 떠나온 조국은 그때에도 죽음과 공포가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곳이었기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에 프랑스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지 않기에 마리암은 머릿속에서 페르시아어를 지웠다. 마리암의 성장기를 채운 것은 상상의 이야기를 짓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었다. 허나, 내면과 소통하는 길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이국적인 이야기에 굶주린 청중들 앞에서 이야기꾼이 되어 일화에 살을 붙이고 내 목소리에 가락을 싣는다. 집중하는 작은 눈들이 보인다. 침묵이 홀을 덮는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이겼다.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나만의 작은 세계에 취해 살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자부심의 정체는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낭만저긴 망명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페르시아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에 맞게 가면을 쓴 마리암은 이란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채로 살아온 시절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삶을 힘겨워한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이란의 이미지는 혁명의 순간마저도 환상의 이미지이듯 소비된다. 자신의 조국을 거부하는 마리암에 의해서 잘 다져진 영화처럼 상영된다.  


“마리암, 네가 가진 두 문화를 이제 받아들이렴. 마음을 편히 가져.”

“그게 싫다는 게 아니에요. 남의 상처를 보고 환상을 품는 위선자들에게 화가 난 거예요.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정중하게 내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요.”


  마리암 역시 스스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부추겼고 스스로도 그렇게 하고 있었음을 알까. 할머니는 마리암에게 내면을, 고통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마리이 ‘진짜 프랑스인’이 되어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자 할 때 그때 마리암은 다시 이란을 찾고 페르시아어를 찾는다. 망명자, 이민자의 2세들이 겪는 혼란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대체로 이들을 다룬 소설들은 혼란의 최고 해결은 부모님의 조국과의 화해이며 그곳으로 발디딤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와는 다른 지점이 있다. 마리암의 할머니가 마리암에게 하는 말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할머니’들의 말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명징하게 현실인식을 하게 된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호메이니는 살인자다’ ‘샤 다음에 호메이니라니! 우리의 혁명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는 삐라를 서랍들 속에 넣었다. 아버지는 반정부 활동을 했다.


  아마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까. 소설의 원제는 마르크스와 인형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이란 제목으로는 이미지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예상했기에 작가의 원제목을 곱씹게 된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여전히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금기적인 시각이 있어서는 아니겠지 가장 알맞은 상품성을 위한 선택이겠지 생각하면서 제목으로 인해 책에 대한 무게가 확연히 달라짐을 느낀다.


넌 오랜 세월 끝에 이곳에 돌아와서 근원이라는 바다에 푹 빠져버렸어.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네 인생을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구나. 네 부모는 네가 거기에서 자랄 수 있도록 큰 대가를 치렀어.


  페르시아어를 찾으러 가는 마음의 길은 혼란스러웠지만 마리암은 자유롭다. 그녀는 그녀 세대에서 치뤄야 할 고통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아니 이란 전체의 흔적을 담고 있다. 정치지도자들로 인해 망가진 이란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을 낳기 위해 그들의 부모들은 더 큰 고통을 치뤘다. 이것을 인식하는 한 마리암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마리암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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