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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5독이어도 오독이어도
창백한 불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문학동네, 20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대해서 창백하리만치 사전정보없이 읽었다는 말인데 몇 장 넘기지 않고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롤리타』를 떠올리게 하는. 그제야 롤리타의 작가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것이 생각났다. 때때로 『롤리타』의 작가를 험버트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창백한 불꽃』에도 훗날 충분히 착각할 만한 요소를 만들어 놓았다.
한번 당한 끝에 작가에게 걸려들지 않겠노라 바짝 다짐을 하고 보니 시 <창백한 불꽃> 작가 존 셰이드, 그 시의 주석을 쓴 찰스 킨보트가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이름 속으로 들어간다. 머리말과 주석과 색인이 딸린 시, 운문인지 산문인지, 시가 중심인지 주석이 중심인지, 진실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게 흩어진 낟알을 주워 모으다 한없는 길로 들어가게 되는 소설, 『창백한 불꽃』. 이 글을 읽어나가는 방향이 전적인 독자의 의지인 것 같지는 않다. 시 <창백한 불꽃>의 가치는 찰스 킨보트로 인해 발견되었고 무엇보다 찰스 킨보트 자신의 주석만이 시의 인간적인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주석자의 중요성에 대한 단언이 이 책을 읽어가는 방향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거라고, 제한하지 않은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창백한 불꽃』에서 구현한 형식은 수많은 평론가들과 출판 관계자들에게 감탄과 찬사의 대상이다. 소설이 씌어진 1960년대에서 머언 2019년을 살고 있는 내게는 시간이 파격적 형식 가득한 작품을 읽게 해 예방주사를 놓아두었기에 경이롭고 얼이 빠질 정도는 아니어서 달뜬 찬사들에 어떤 추임새가 필요할 지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이런 책들은 일명 ‘실시간’ 혹은 지금보다는 어릴 때 읽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몹시도 게을러진 나이의 나는 이 귀찮은 독서법에 궁시렁거리며 책장을 넘나들다 작가에겐 형식과 내용 중 무엇이 우선이었을까를 궁금해한다. 내가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도.
처음엔 머리말에서 찰스 킨보트가 어떻게 떠들든 순수하게 시의 의미를 쫓아가려 했다. 허나 시란 언제나 주석에 의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 고스란히 주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시에서 생각한 이미지와 주석의 괴리가 커질수록 평범한 인간인 나는 시에서의 강렬한 이미지보다도 주석에서 발화된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찰스 킨보트가 말한 ‘사실성’이겠구나. 최후의 말, 그것이겠구나. 언어유희는 잠시의 놀이터가 되고 다급히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구나.
나는 몹시도 평범한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종이 아니던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것을 믿어버릴 수 있는’ 그런 종족. 이야기에 매몰되고 매몰되는 그런 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온전히 그가 창조한 세계를 가지고 수많은 호모 사피엔스를 “관행과 규칙을 따르게 되고 설득당하기 쉽도록” 만들어 놓는다. 주석자의 주석이 허구라는 생각이 스며들어도 주석자 자신이 망상환자가 아닌가 의문이 들지라도 카를 왕과 왕을 암살하려는 그라두스가 떠나온 젬블라라는 나라가 어디인지를 가늠하려 애쓴다.
그렇다면 이것은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의 이야기일까. 존 셰이드의 인생회고록 같은 <창백한 불꽃:네편으로 된 시>의 시행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킨보트에게서 젬블라에서 이 모든 혼란을 일으키도록 이끄는 작가 나보코프를 찾으려 애쓴다. 나보코프가 만든 게임판에 휩쓸리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머나먼 북쪽 나라는 러시아, 킨보트도 셰이드도 보트킨도 카를왕도 그라두스도 모두 작가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내가 삶 속에서
사슬고리와 쌀먹이새 같은 일종의 유음어 유희를.
게임에서 상호 연관된 패턴을,
오묘한 예술적 수완을, 게임을 하는 그들이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충분치 못하다. 게임을 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5독과 오독 속에서 아찔하고 다급하다. 이 재밌는 언어유희는 번역이 아닌 채로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번역자의 주석에 의지해야 하기에 이런 류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의 언어적 한계로 인해 아쉽기 그지없다. 따지고 들면 배경지식도 한몫한다. 작가는 이 글을 읽는 동안 내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요구를 요하면서도 내 해석에 대한 만족감을 극대화시키진 않는다. 읽어도 읽어도 갈증과 창백함을 안기는 『창백한 불꽃』앞에서 독자로서, 작품을 향한 평가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린다. 셰이드가 진저리치는 “읽긴 읽되 바보천치 같이 읽는 것“이 아닐까라는 염려가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킨보트일 수도, 킨보트만큼도, 킨보트일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킨보트는 일차적으로는 독자이다. 그러나 킨보트는 존 셰이드의 시와 삶에 과도하게 개입한다. 셰이드 부부와의 친분은 일방적이고 이웃에 인접해 살면서 원활한 스토킹을 가한다. 킨보트는 셰이드가 시를 창작할 때부터 자신이 영감을 주었음을, 젬블라 왕에 관해 쓰기를 재촉했고 설마 정말로 쓸 줄은 몰랐다며 온통 젬블라에 관한 주석으로 도배를 해놓는다. 그 방식은 마냥 무질서하지는 않아서 셰이드의 시어를 붙잡아 언어유희를 펼치며 은근슬쩍 젬블라와 연관시키고, 셰이드가 아내 이야기를 하면 주석에선 젬블라의 카를 왕의 아내 디사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왕을 죽이려는 암살자 그라두스도 언어유희와 함께 등장한다. 세 개의 이야기를 무질서한듯 질서있게 배치한 킨보트의 주석은 시를 보다 잘 이해하고 사실성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펼쳐놓을 수 있는 무대, 그런 것을 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킨보트는 권위있는 학자이자 시인의 시에 기생하여 제 이야기를 펼친다. 반복되는 시인의 시,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에서 죽은 여새가 시인이라면 그림자는 셰이드가 되는 시. 결국 네편으로 된 시인 창백한 불꽃의 ‘나=죽은 여새’이기보다 ‘나=그림자’라는 등식이 어울린다. 끝내 여새는 죽지 않는가. 또한 자신을 카를 왕과 동일시하는 킨보트는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볼셰비키 혁명으로 망명한 작가와 겹쳐진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번역하고 방대한 주석을 단 전적을 가지고 있는 만큼 킨보트가 작가로 등치되기에 작가도 괴이한, 괴랄한 캐릭터였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와 함께 머나먼 북쪽 나라, 젬블라에 대한 그리움과 불안이 가득한 듯이 보여 과한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킨보트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분명 허위의 먼 풍경이 가득해 보이지만 압도하는 형식을 걷어내고 나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필멸의 존재가 생각해야 할 삶과 죽음. 셰이드의 딸 헤이즐은 ‘새로운 패배와 새로운 비참함을 경험하고 눈물에 젖은 채’ 자살한다. 기이한 고모의 손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있는 셰이드의 고통은 딸의 죽음으로 더해진다. 사후에 대한 인식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경이를, 달콤한 충동을 느끼는 셰이드와 킨보트가 ‘죽음으로의 이행을 멈추는, 참기 어려운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이 시를 짓는 일, 언어적 유희에 휘감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암살자 그라두스의 존재도 끊임없이 죽음을 환기시키는 인물이 된다. 강렬함이라든지 뚜렷한 신념이 느껴지기보다는 어설픈 살인자로 보일지라도 죽음이란 늘 그렇게 비장미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니까.
삼단논법: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이 소설에서 오로지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은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이라 여겨진다. 필멸에 대한 자각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가중시키며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로서의 강한 자기애를 발현하곤 한다. 삼단논법의 증명자가 되지 못한 셰이드뿐만 아니라 망상이, 대부분 자기과시 형태로 나타난 킨보트의 죽음에 대한 동경또한 이 같은 맥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곧 죽음의 이야기다. 세상 모든 필멸의 존재가 영원의 존재이고픈 열망을 담은 것이 예술,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인식은 예술혼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시이든지 주석이든지… 5독이어도 오독이어도 거듭 창백한 불꽃을 읽고 남는 것, 그것은 인간의 살아가는 인생의 이야기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휘갈겨쓴 메시지’에서 결국 살아가야 할 나의 메시지를 찾고픈 열망에 빠진다. 나만의 시어와 주석을 단 삶의 이야기, 인생의 메시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창백한 불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