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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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난다, 2018-06-25.


  여기 묶인 글들은 2013년에서 2016년에 쓰인 것이 많았다. 그 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아는 까닭에 많은 글이 힘있는 비판의 어조인 것에 고개를 끄덕했다. 그렇지만 씁쓸하게도 느껴졌다. 문득 불문과 전공 교수들의 글이 유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글의 내용은 달랐겠지, 다른 글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이 겹쳐 왔다.

  유독 올해 많은 작가들의 부고를 들었다. 세상의 한부분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어린 왕자 번역본에 관한 글이 있어 책장을 뒤져 어린왕자를 꺼내놓고 선생이 지적한 부분을 찾아본다. 수정되어야 할 일본판을 참고한 번역본임을 알고 빛바랜 책에 소혹성 3251에서 1을 지우고 마흔 세 번이 아니라 마흔 네 번의 해가 지는 걸 구경하며 마흔 네 번의 쓸쓸함을 느끼는 것으로 고치고 나서 그만큼의 쓸쓸함에 물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문학으로, 프랑스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뇌한 작가의 글에 먹먹한 오후 노을이 유독 짙어 보인다.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흉악범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



  흉악 범죄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 때에 벌어진 모든 것들이 우리에겐 일상이었다. 그 일상을 견뎌내고 또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무뎌지고 그랬는데 새삼 그 시절의 뚜렷이 드러나는 글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글들을 억압하고 몰아내고 흉악 범죄만을 일으키던 사람들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때가 더더욱 억울해진다. 그러하기에 이런 글들에 푸욱, 위로를 받게 되는 모양이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와 먹먹함이 있는 내게 말이다. ‘사소한 부탁’을 해야 할만큼 사소한 것들도 지켜지지 않았던 그때. 그때의 분노와 아픔이 없었다면 작가의 병은 없었을까.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미래의 토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 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진보주의는 좌빨이라는 목소리가 너무 크고 시끄럽게 세상을 도배하기에 그 단어에 열내고 반박하는데 급급했지 새삼 내 언어로 정의내리는 일엔 소홀했다 싶었는데 황현산 선생님의 진보주의의 정의가 콕 박힌다. 그래, 그것은 정치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삶의 방식으로서 얘기되는 것이었다.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이 글은 책에서 한번 더 반복된다. 사소한 것들을 지켜낸다면 사소한 것들을 지키고 산다면 소소한 행복들은 지켜질 것이겠지만 그 사소한 것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말해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세상일 터이니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선생이 써내려간 글에서 그의 분노를 비판을, 부탁을 눈여겨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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