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왜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지는가


   철학이 뭐 별건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자세이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좀더 비중을 두는 격언같은 것이라 말하면 안되는가? 철학자라고 철학을 공부한 이들만의 언어로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만이 철학인가? 그것만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어야 할 높은 수준인가.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


    이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었을 때 사실 나도 그랬다. 이 책은 너무 쉬운데라고. 그래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성평등지수가 높은 국가인 스웨덴에서 이 책이 성평등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다. 한 칼럼니스트가 “페미니즘의 기치를 교육받고 자란 스웨덴 고등학생에게 이 책의 내용은 좀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라고 했다는데 딱, 내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난 생각하기를, 좀더 강하고 좀더 처절한 성차별적 상황을 보여주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조금 더 포장된 말로 감싼 책을 원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얼만큼 자리잡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것보다 이론적인 말의 향연을 더 기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라는 한 철학자의 기사를 접하면서 내 생각이 짧았다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됐다. 페미니즘에 관한 한, 가장 쉬운 말로 해도 모자라기에 이 책만큼 적격인 것은 없구나라고.

  한편으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철학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삶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그러다 또 생각한다. 왜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여성적 사고라고만 생각하는 건가. 최근 급격히 증가된 혐오논쟁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더욱 강건해지고 공고화되는 듯하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늘 있어 왔지만. 아마도 이 부정적 인식의 전제에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여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치마만다도 거듭 이야기하듯이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모든 성별’이지 결코 ‘여성만’이 아니다.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신주는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는데 왜 이리 어렵게 느껴질까. 짧은 지식으로, 아니 짧은 지식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 보편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내 이해가 일찌감치 철학적이지 못했거나 한없이 형편없거나 한 모양이다.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젠더에 따른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요? 각자의 진정한 자아로 산다면,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요? p37~39


  오히려 강신주 자신이 페미니즘을 폄하하기 위해 여성성을 더욱 강조하며 제한하는 듯하다. 기사 한 줄로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좀더 알아봐야지 하다가 참 마음이 가라앉는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지만 그의 철학은, 그의 책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람의 트윗글, 교복은 입은 여학생에게 "담요 왜 둘러? 그런거 두르면 안이 궁금하잖아. 저 외국엔 성범죄 하나도 안 일어나. 다 벗고 다니거든.“

  저 말이야말로 나온 맥락을 따진다 해도 부정할 수 없이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가진 기본 인식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 말은 페미니즘 발언과 연계가 되면서 그가 말한 수준낮은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주장이라기보다 오히려 ‘남성’적 우월주의에 가득찬 시선이 담긴 의식의 표출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도대체 여성에게 참정권이 20세기에 들어온 것과 인간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발단이 된 그의 새로운 저서 철학 vs 철학을 읽어보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고픈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철학’에 대해 가지는 그의 입장이 허울가득한 텍스트적인 지식의 자랑이었던가. 삶의 의미와는 무관한. 그가 말하는 인문주의 시선이라는 것은, 그토록 편협적이었던가.


젠더는 대화하기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게 여깁니다. 남자도 여자도 젠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며, 혹은 젠더 문제를 성급히 부정해버리려고 합니다. 현 상태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늘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p43


  한편으로는 강신주의 말에 동의도 된다. 페미니즘은 수준 낮은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페미니즘은 기본이니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대한 인식이니까. 그래서 이것은 기본 중에 기본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밥을 먹고 어떤 커피를 마실까를 생각하며 커피가게를 찾아가는가를 고려하는 문제가 아니니까.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가장 낮은 욕구의 문제이니까. 낮을 수밖에.


내가 남자와 동행하여 나이지리아 식당에 들어서면, 웨이터들은 매번 남자에게만 이나를 건네고 나는 무시합니다. 그 웨이터들의 태도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회의 산물일 뿐이고, 나도 그들이 일부러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님을 알지만, 무언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할 때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입니다. 속이 상합니다.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p22~23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프다. 그렇다. 전문가, 학계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난 그들에 대해 전혀 생각 안 한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 50년 지나면 나만 남고, 그들은 아무도 안 남을 텐데”라고 말하는 한 철학가의 이 자만에 내 자존심은 상처입었다. 그의 철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는 건가. 나는 생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그는 내 생존을 한없이 비웃고 있다. 저와 다른 수준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 안 안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젠더 문제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해법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p44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 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p52


  오우! 응고지와의 말을 듣다보면 어떤 철학자는 반드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야심한 밤에 난 분노했다. 하지만 나 역시 반성하지 않겠다.


얼마 전에 나는 라고스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가 그 글을 읽고는 성난 글이었다며, 그렇게 성난 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성이 나니까요.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더해 내게는 희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자신으로 변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료는 진단을 따른다

 

우에노 치즈코 저,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4.


  치료는 정확한 진단을 통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시작된다. ‘원인’을, ‘진단’을 잘못하면 되면 치료의 방향은 당연 달라지고 결과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처방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진단의 결과에 의한다. 우선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왜?

  진단을 외면하며 치료의 방향을 자꾸 달리 하려는 상황을 또 맞닥뜨린다. 하지만 충분히 예견한 결과여서 놀랍지는 않다. ‘강남역 살인사건’ 얘기다. <검찰,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 아닌 정신질환 탓, 중일일보> <檢 "'강남역 묻지마 살인' 여성 혐오 범죄 아닌 정신분열증에 의한 범행, 조선일보> <강남역 살인사건은 피다 버린 담배에서 시작됐다, 뉴시스>  2016.7.10일자의 기사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보도의 주체는 검찰이다. 한 정신질환자의 치료부족으로 인한 사건이라고 수사의 결론을 지었다. 애당초 살인자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 이후 피해자에 대한 추모분위기에 즉각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며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말해 왔던 만큼 결론은 ‘여성혐오가 아니에요’가 될 것이 뻔한 것이었다. 그래도 새롭게 추가된 것이 ‘여성이 살인자에게 담배꽁초를 버려서 사건이 시작됐어요’라니.

  정부는 이상하게도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줄기차게 싸움을 붙이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이 아니라 외면해 왔다. 성별 싸움은 오래전부터 행해 왔던 것이고 보육료 문제는 전업주부와 워킹맘간의 싸움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싸움을, 노인과 청년층의 싸움 등 국민들 간 경쟁과 싸움붙이기의 달인이었는데, 이번 ‘여성혐오’ 상황에 관해서는 죽어라고 싸우면 안돼 하고 타이르고 있다. 여성혐오범죄라는 수사결론은 정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나?  

  한창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에 대한 공론의 장을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다. 소모적인 논쟁이든 대안을 가진 논쟁이든 최소한의 성별혐오에 대한 문제인식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분위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더욱 논의가 되어야 한다. 보다 대안적인 차원과 열린 인식은 어쨌든 격한 논쟁을 벌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목소리, 주장이 인터넷 상에서만이 아니라 표면 위에서 펼쳐지게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격한 반응도 있고 타인의 의견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은 분위기도 있지만. 

  어쨌든 여성혐오의 역사는 길고 여성혐오의 종류도 많고 여성혐오의 방식도 많고, 그냥 많다. 일본의 사회학자가 쓴 이 책은 상당히 재밌다.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이 낯설지 않은 것은 ‘쉽게 눈에 띄는’ 일이라는 것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혐오는 일상에서 언제든 일어나고 있고 당연 예술작품에도 드러나 있다. 있는 것을 굳이 없다고 소리치는 심리까지도 이해가 된다. 너무 부끄럽기 때문 아니겠는가.

  부끄럽다는 말에 너무 발끈하지 말자. 여성혐오가 ‘남성’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여성혐오라고 해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혐오만을 비판하지 않는다. 여성들 자신이 ‘여성’을 혐오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들은 성차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길들여진 여성들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여성혐오’라는 말에 남성들 스스로를 ‘가해자’로 치부한다고 발끈하지 말자. 저자의 말대로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남자들은 여자들을 괴롭히는 존재다’가 아니니까.


여성혐오는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의 깊고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핵이다. 성별이원제의 젠더 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너무나도 자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탓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의식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p12~13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저자의 주장대로 어떤 형태로든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속되어 온 여성혐오의 미러링으로 남성혐오가 촉발되었든 어쨌든 이 사회에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는 공존하고 있고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문제는 드러났는데 이에 대한 대안은 커녕 논의의 장조차 치워버리려는 상황에서 이 고통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물론 완벽한 해결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 의지가 있느냐이다. 저자는 ‘여성혐오’를 치료하려면 여성혐오의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저자는 여성혐오의 실체를 아는 것에서부터 여성혐오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국 혐오가 지향하는 것은 그것이었네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윤보라·임옥희·희진·시우·루인·나라, 현실문화, 2015.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대표적인 감정이 여성혐오다. 그럴 만하기 때문에 여성을 혐오한다는 생각은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만하다는 내용은 무엇인가. 한국의 여성들-혐오 언어의 대표적인 김치녀-이 이기적이고 남성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보라는 그것은 비난과 혐오의 이유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여성의 유형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남성도 이기적이고 여성을 이용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성별 구분없이 비난받을 충분한 이유가 되는 유형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특정한 유형의 여성이 아니라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의 언어를 자랑스러이 떠벌이는 것일까?


1960~1970년대 유명 잡지들은 미혼 여성의 직장 생활을 두고 ’결혼 전 즐겁게 놀기 위한 자금과 친구를 얻기 위한 것‘, ’사치와 낭비, 퇴폐로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비난했다. 언뜻 보기에 사치와 낭비는 미혼 여성의 직장 생활을 비난하는 이유로 비춰지지만, 진짜 이유는 “사회가 여성들의 경제사회적 활동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사치하고 낭비하기 위해 일터에 놀러 나온 미혼 직장 여성‘이라는 유형을 만들어낸다.


  이 예를 보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남성의 군가산점제도 폐지 이후로 여성의 혐오가 확산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과 함께. 그렇다면 이 역시도 경쟁사회에서 기득권처럼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남성들의 두려움의 표현인 걸까. 이에 대해 윤보라는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이 높은 청년 실업률이나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의한 남성의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은 섣부른 단정이다.라고 함으로써 최근의 여성혐오에 또다른 특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왜 혐오를 만들어내는가?


 '나쁜 여자와' '착한 여자'라는 판본을 만들어내고 각 사회 주체들을 배치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첨예한 젠더 정치가 된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비난은 나쁜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성을 참조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p16


 일단, 여성혐오는 이처럼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금, 도대체 어떤 필요가 그들로 하여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었는가. 안타깝게도 여성혐오는 유머와 드립으로 그것을 포장하며 방패막이로 삼고 있기에 문제제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미러링’이라는 형태의 여성혐오에 대한 반대 담론의 장으로서의 남성 혐오가 등장했을 것이다. 미러링은 새로운 담론이라 하겠지만 도저히 답이 없는 것에 대한 지침의 한 형태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 이상 그 어떤 도덕과 올바른 개념으로서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벽에 대한 답답함. 그래서 결과적으로 계속 혐오의 언어만을 양산하고 있는 상황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윤보라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고 했다. 왜 웃음으로 포장한 채로 혐오할 여성을 강박적으로 만들어내는지, 그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어떻게 하려는지. 그래서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혐오의 언어를 계속하고자 하는 것은 임옥희의 말처럼 그들이 연대가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마사 너스바움의 표현처럼 그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미담에도 설득되지만, ’그 인간 왜 그래‘로 시작하는 험담과 뒷담화로 연대한다. p54


혐오 발언 안에는 주목을 통해 자신이 행위 주체임을 인정받으려는 '주체화의 열정'이 들어 있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에서 주목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혐오는 격렬한 열정 중 하나다. p56


  임옥희는 이러한 혐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결국은 사회적 ‘평등’과 분배적 ‘정의’라고 주장하며 폭력과 혐오를 줄여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성은 육체로, 남성은 정신으로 구별 짓고 자기 안의 타자를 억압한 흔적을 젠더 무의식이라고 하는데 젠더 무의식을 활용하는 가부장적 정치체를 함께 변혁시키지 않는 한 혐오 주체들은 끊임없이 생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성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도 수시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그렇다고 여성 혐오에 기죽지 말자고 말한다. 왜냐, 혐오는 깊은 공포와 매혹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으니까.

  정희진은 한국사회는 여성 혐오, 약자 혐오, 피해자 혐오에 대해 유독 관대하다고 말한다. 여성 문제, 성별 제도에 대한 지식은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며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도 없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무지’가 문제다. 인식의 변화는 설득과 대화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권력관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그들이 알아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거나 혐오 발화를 중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우는 남성피해자론과 역차별 주장을 분석하며 “남성 동성사회성 논의”로 설명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남성 간 성적 긴장을 제거하고 여성을 매개로 남성 사이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동성애 혐오와 여성혐오가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특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남성의 동성사회성이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를 기초로 구성되는 것이다.

  루인은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시스플레인의 문제점을 말한다. 맨스플레인이 상대방을 여성으로 만드는 행위며 성역할의 반복이자 재확인이라면 시스플레인은 젠더 규범을 강화하고 단속하고 자연화할 뿐 아니라 성역할 반복을 요구하고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들로 인해 트랜스젠더퀴어는 끊임없는 자기혐오 속에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훈계할 수 있다는 권력감, 그리고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퀴어 정체성의 진위를 가릴 수 있고 진위를 가려줘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다는 권력 행위가 문제의 핵심이다. 계속해서 타자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확인하는 태도, 그리고 이 태도로 구축되고 이 태도를 재생산하는 사회구조가 논의의 핵심이다. p214


나라는 혐오가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혐오가 이에 해당한다. 성소수자 혐오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사회적 약자 일반을 향한 혐오를 용인하고 조장하는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성소수자 반대 운동도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고 복지와 노동조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성장했다.


오늘날 성소수자 혐오는 사회적 위기의 책임을 소수자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면서 각개 생존의 미로에 갇히길 바라는 자들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성소수자 운동과 시민사회, 진보 진영은 성소수자 혐오의 정치적 구실과 효과를 이해하고 사회 변화의 전망을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 혐오라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단지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또 다른 소수 집단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길 바라는 자들은 누구인가. 혐오가 파괴하는 누군가의 존엄은 나의 존엄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질문에 함께 답해야 할 때다. p255


  이 책은 여섯 명의 저자가 여성혐오에 대한 각자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논의의 내용은 다양한 형태이더라도 결국 집중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것이다. 혐오가 어떤 이유로 형태로 야기되었든 그것이 이용되고 있는 방식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권력구조가 함께 하고 있다. 우리가 이 혐오의 언어를, 정말로 혐오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부다처제, 남성들에게 불리한 제도?

소모되는 남자 - 남녀차에 대한 새로운 사회진화적 해석I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서은국.신지은.이화령 옮김, 시그마북스, 2015


  젠더에 관한 논쟁은 항상 성불평등의 해소, 양성평등을 목표로 한다. 그 세부적인 주장의 차이 그 해결방안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성별을 이유로 차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다. 하지만 성별 논쟁에 관해 승자라 인식되는 남성의 기록은 딱히 없다. 어쩌면 그럴 것이 모든 역사의 기록은 남성의 기록,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탄압과 억압의 역사를 따로 기술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슬프게도 ‘페미니즘’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 게다.  슬프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슬프기 때문이고, 이 사상에 대한 이름붙임이 성차별이라는 정희진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라 말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은 마르크, 프로이트, 루소, 푸코 등의 ‘개인’으로 호명하면서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성차별적 발상에 분노한다고.

  나는 페미니스트다.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도 “어랏, 페미니스트시군”이 되어 버린다. 여성이기에 자동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나에겐 ‘사상’ ‘이론’이 아니라 생존과 일상이라는 생각까지도 들게 만든다. 왜? 타인의 호칭과 명명에 의해서.

  아무튼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오래 기록되고 전수된 페미니즘이 그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라  갈등관계를 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차별해소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되고 있다.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다는 것이고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전에 비해 좀 더 ‘나은’ 상황이라며 그만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디, 그만할 일인가. 차별을 그만한다면 모를까. 물론 최근의 젠더 논쟁은 차이는 인정하며 그 차이를 차별하지 말자라는 주장이 보다 확산되고 있다. 어쨌든 젠더 논의는 이렇듯 보다 억울한 입장의 목소리가 더 많이 있는 까닭에 ‘남성’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남성의 목소리, 이야기도 필요하나 대다수 젠더 논의에서 비중이 작은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는 살만하다는 반증인 것인지.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얏호!하며 기꺼운 마음이었다. 사실은 그럴 수 없을 지라도 공평각으로서 젠더 문제를 바라보리라 생각하며 책을 읽는데.....결론부터 말하자면 좀 실망스럽다라고 해야 하나, 논의에 대해 설득당하지 못하겠다라고 해야 하나. 저자가 주장하는 큰 틀의 이론은 수긍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논리적으로도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계속 의문을 갖게 한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모적이다


  일단 저자가 인정하고 있는 부분은 남녀는 차이는 있으나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신의 주장의 기반으로 삼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문화가 ‘남성을 소모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누가 더 우월한 것이 아니라 각각 우월한 영역이 있으며 문화가 선택한 것이 남성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른 경쟁문화를 능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문화 시스템의 관점에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모적 존재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문화가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이용하는 방법들을 이해하는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남성이 소모적 존재라는 것은 몇 가지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음 세대의 구성원이 될 아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의 남녀 간 차이, 그리고 경쟁 대상인 타 문화를 단순한 수적 우세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관련 있다. 어쨌든 문화의 입장에서는 소수의 남성과 가능한 한 많은 여성이 필요하다.


우리를 인간이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진화하고 적응하고 적응하며 서로 경쟁할 수 있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지속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시스템들을 ‘문화’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화가 어떤 일들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유용하다는 점을 깨닫고, 이런 업무들에 있어서는 통상적으로 남성들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보다 의문이 든다. 문화가 쓸모를 이유로 남성을 소모시켜 왔다면 문화는 여성의 쓸모없음을 이유로 여성을 제거시켜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각자의 쓸모를 ‘추출’하며 남성과 여성 모두를 소모시켜왔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성의 쓸모를 더 확장시키기 위해 여성은 쓸모없음을 강요받아 왔고, 남성의 쓸모를 더욱 소모할 수 있는 여성적 쓸모만으로 남성의 쓸모를 보조하는 역할로 이 세상에 소모되어 왔다. 그것도 저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소수의 남성을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이 모든 것을 운영하는데 어떻게 남성이 착취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실수는 사회의 꼭대기, 즉 최상위층만 보고 사회 전체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 최상위층의 대부분은 남성들이다. 그런데 만약 사회의 밑바닥, 즉 최하위층을 보면 그곳에서도 여성보다 많은 수의 남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좋지 못한 결과들이라 볼 수 있다.


 비로소 사회가 남성을 선호한다는 착각이 왜 발생하는지 이해된다. 여성이 자신들은 권력구조의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들은 남성이었다. 이런 장면을 보면 시스템 전체가 남성에게 혜택을 주고, 남성들을 우월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누군가 남성으로서의 삶이 힘들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남성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불평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의 성역할을 성취하고 생산하고 다른 이들을 부양하고, 필요하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며 남성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남성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로부터 이점을 얻으며 남성들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해석은 주장의 근거가 타당해야 수긍을 하게 될 터인데 저자의 근거들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제법 된다. 적어도 페미니즘의 주장은 전체의 여성의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논의된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 저자의 주장에서 ‘소모되는 남자’란 전체가 아니라 ‘일부’의 남자들이다. 자신도 그렇게 이야기하긴 한다. 일부의, 소수의 남자들이 다 성취하고 있다고. 위의 예를 들며 바닥에 있는 남성도 수두룩하다고 말하는데, 공감이 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노인층에 대한 탄탄한 연금 시스템이나 사회보장제도 혹은 여타 다른 지원이 없는 사회에서는 이런 책임 명시가 극단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경우 아들을 가지려는 욕구가 반드시 어떤 비합리적이고 편협한 여성 혐오의 흔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나이가 많아 일하기 어려울 때 당신을 부양할 사람이 누가 될지에 대한 신중한 고민인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노년기 부양을 회사나 국가 정부에게 기대할 수 없고, 딸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아들에게는 강요할 수 있다. 남성은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지는 반면 여성에게는 이런 의무가 면제된다.


 부양의 의무를 경제적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돈이 일차적인 부양의 핵심사항이라고 여기는 것. 그래서 남자들은 여성을 고용하여 부모를 부양하게 한다. 어떻게 몸을 사용하여. 실질적인 행동으로 수발드는 것은 여성이다. 문화는 여성을 이렇게 이용한다. 문화에 소모되는 남성은 여성을 이렇게 소모한다.


일부다처제는 남성들에게 불리한 제도다


남성이 우월한가. 한번 확인해 보시라. 남녀를 겨루게 하는 TV광고에서는 늘 여성이 이긴다.


 광고에서 여성이 늘 이기는가?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광고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되는가. 실제 사례에서 여성이 남성을 이기는가가 근거로 사용되어야 하지 않나? 저자는 이러한 이유가 단지 오랫동안 남성이 우월하다는 시각이 지배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크 트웨인의 이런 말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망할 놈의 거짓말, 그리고 통계치.” 모든 통계치가 여성이 불리하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착각과 현실에 대한 분리가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이 문화적으로 착취당하고 희생당해 왔다는 주장을 완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도 착취당하고 희생당해 왔다는 것이며 그 사례들이 무수히 많으며 ‘남성’에 의해서 당한 착취와 희생이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남성에게는 ‘문화’가 문제였다면 여성에겐 ‘남성’이 그 자체로 문화였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례들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주장이나 근거가 너무나 지엽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소수의 남성들에 희생된 다수의 남성에 대한 부제가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여성들은 위대함을 추구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를 가졌다. 위대함을 추구하지 않았던 여성들도 추구했던 여성들만큼의 아이들을 가졌다.


  이 얘기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것은 무언가. 자신의 유전자를 다른 이에게 남기지 못했기에 남성들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특정 소수의 남성들의 자손만이 후세에 전했다며 꼭대기에 있는 남성들만을 보고 발생한 오류이며 일부다처제의 실제 피해자는 다수의 남성들이라고 주장한다.


핵심은 일부다처제가 남성의 소모성을 기반으로 한 제도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가 대부분의 성공한 남성들에게 보상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문화는 남성들이 가정을 얻고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이용해 그들이 서로 경쟁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도록 몰아붙인다. 하지만 일부다처제는 많은 남성들이 전혀 아내를 맞이할 수 없게 한다. 이 남성들은 단지 시스템의 패배자일 뿐이다. 참 안됐지만 그들은 소모적 존재다.


  책을 읽으며 공감의 요소보다 반감의 요소가 많았다. 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드는 예들이 이토록 와닿지 않을까. 문화적인 차이일까. 이런 혼란과 반감을 아는 것인지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남성에게는 익숙했던 소모적 존재로서의 대우가 여성에게는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문화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편향된 이유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문화가 형성되게끔 모의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적인 이유는 여성은 남성과 달리 문화나 큰 기관들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뒤늦게 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문화가 여성들을 충분히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창조한 남성들 전체에 죄를 씌우는 것은 슬픈 아이러니다. 여성들은 스스로 문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남성들이 일군 문화를 필요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남성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편도 들고 있지 않는가?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 중에서 수긍이 가지 않는 표현은 이거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나는 저자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착취당하고 희생양이 되었다. 불운했던 여성들의 삶이 사회로 인해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남성 또한 착취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가 여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보는 것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점 때문에 여성의 반대편인 남성의 입장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문화적 착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맞다. 그렇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결국 ‘권력’ ‘제도’에 의해 희생되고 착취당해 왔다. 물론, 누가 제도를 만들고 권력을 더 쥐고 있느냐는 예외로 쳐야 되겠지만. 저자의 이 주장을 동의하기 위해선 근거들이 좀더 흥미있고 예리하고 보편적이었으면 한다. 어쩌면 젠더 논쟁은 언제나 소모적인 논쟁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결론은 없는 평행성. 늘, 협력을 말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목표로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이 책은 착취당하는 남성들의 얘기를 보여준다는 것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어쩌면 비교의 대상이 잘못된 건 아닐까. 오히려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 소수의 남성과 다수의 남성의 비교가 알맞은 것 같다. 문화가 남성들만의 경쟁을 부추겨 그들을 이용하여 왔기에 소수의 남성들을 제외하고 다수의 남성들이 얼마나 착취당해 왔는가를 알아달라고 한다면... 저자의 남성들이 소모적으로 이용당해왔다라는 느낌의 이 책도 하나의 사례로 잘 생각하며 더 큰 논의를 확장시키도록 하는 게 논쟁을 위한 논쟁을 중지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긴 할 것이다. 공감하지 못함은 나의 문제이겠지만 두 번은 못 읽겠어서 한번으로 끝낸 이 책의 주장에 좀더 설득력있는 이야기들로 남성들의 착취와 억압을 보여주는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오미 2017-09-2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다음 페미
니들 꼴페미 도서들도 보통사람이 읽으면 당신이랑 똑같은 감정 느껴.
심지어 과학적 방법론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왜 페미니스트라고 묶이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매번 그렇게 묶이는거야 ㅋㅋㅋㅋ

천칭자리 2021-06-26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댓글 중에 가장 세련된 해석입니다. 찜찜한 점을 정확히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