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 남성들에게 불리한 제도?

소모되는 남자 - 남녀차에 대한 새로운 사회진화적 해석I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서은국.신지은.이화령 옮김, 시그마북스, 2015


  젠더에 관한 논쟁은 항상 성불평등의 해소, 양성평등을 목표로 한다. 그 세부적인 주장의 차이 그 해결방안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성별을 이유로 차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다. 하지만 성별 논쟁에 관해 승자라 인식되는 남성의 기록은 딱히 없다. 어쩌면 그럴 것이 모든 역사의 기록은 남성의 기록,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탄압과 억압의 역사를 따로 기술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슬프게도 ‘페미니즘’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 게다.  슬프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슬프기 때문이고, 이 사상에 대한 이름붙임이 성차별이라는 정희진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라 말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은 마르크, 프로이트, 루소, 푸코 등의 ‘개인’으로 호명하면서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성차별적 발상에 분노한다고.

  나는 페미니스트다.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도 “어랏, 페미니스트시군”이 되어 버린다. 여성이기에 자동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나에겐 ‘사상’ ‘이론’이 아니라 생존과 일상이라는 생각까지도 들게 만든다. 왜? 타인의 호칭과 명명에 의해서.

  아무튼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오래 기록되고 전수된 페미니즘이 그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라  갈등관계를 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차별해소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되고 있다.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다는 것이고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전에 비해 좀 더 ‘나은’ 상황이라며 그만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디, 그만할 일인가. 차별을 그만한다면 모를까. 물론 최근의 젠더 논쟁은 차이는 인정하며 그 차이를 차별하지 말자라는 주장이 보다 확산되고 있다. 어쨌든 젠더 논의는 이렇듯 보다 억울한 입장의 목소리가 더 많이 있는 까닭에 ‘남성’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남성의 목소리, 이야기도 필요하나 대다수 젠더 논의에서 비중이 작은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는 살만하다는 반증인 것인지.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얏호!하며 기꺼운 마음이었다. 사실은 그럴 수 없을 지라도 공평각으로서 젠더 문제를 바라보리라 생각하며 책을 읽는데.....결론부터 말하자면 좀 실망스럽다라고 해야 하나, 논의에 대해 설득당하지 못하겠다라고 해야 하나. 저자가 주장하는 큰 틀의 이론은 수긍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논리적으로도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계속 의문을 갖게 한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모적이다


  일단 저자가 인정하고 있는 부분은 남녀는 차이는 있으나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신의 주장의 기반으로 삼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문화가 ‘남성을 소모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누가 더 우월한 것이 아니라 각각 우월한 영역이 있으며 문화가 선택한 것이 남성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른 경쟁문화를 능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문화 시스템의 관점에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모적 존재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문화가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이용하는 방법들을 이해하는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남성이 소모적 존재라는 것은 몇 가지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음 세대의 구성원이 될 아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의 남녀 간 차이, 그리고 경쟁 대상인 타 문화를 단순한 수적 우세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관련 있다. 어쨌든 문화의 입장에서는 소수의 남성과 가능한 한 많은 여성이 필요하다.


우리를 인간이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진화하고 적응하고 적응하며 서로 경쟁할 수 있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지속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시스템들을 ‘문화’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화가 어떤 일들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유용하다는 점을 깨닫고, 이런 업무들에 있어서는 통상적으로 남성들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보다 의문이 든다. 문화가 쓸모를 이유로 남성을 소모시켜 왔다면 문화는 여성의 쓸모없음을 이유로 여성을 제거시켜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각자의 쓸모를 ‘추출’하며 남성과 여성 모두를 소모시켜왔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성의 쓸모를 더 확장시키기 위해 여성은 쓸모없음을 강요받아 왔고, 남성의 쓸모를 더욱 소모할 수 있는 여성적 쓸모만으로 남성의 쓸모를 보조하는 역할로 이 세상에 소모되어 왔다. 그것도 저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소수의 남성을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이 모든 것을 운영하는데 어떻게 남성이 착취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실수는 사회의 꼭대기, 즉 최상위층만 보고 사회 전체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 최상위층의 대부분은 남성들이다. 그런데 만약 사회의 밑바닥, 즉 최하위층을 보면 그곳에서도 여성보다 많은 수의 남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좋지 못한 결과들이라 볼 수 있다.


 비로소 사회가 남성을 선호한다는 착각이 왜 발생하는지 이해된다. 여성이 자신들은 권력구조의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들은 남성이었다. 이런 장면을 보면 시스템 전체가 남성에게 혜택을 주고, 남성들을 우월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누군가 남성으로서의 삶이 힘들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남성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불평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의 성역할을 성취하고 생산하고 다른 이들을 부양하고, 필요하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며 남성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남성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로부터 이점을 얻으며 남성들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해석은 주장의 근거가 타당해야 수긍을 하게 될 터인데 저자의 근거들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제법 된다. 적어도 페미니즘의 주장은 전체의 여성의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논의된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 저자의 주장에서 ‘소모되는 남자’란 전체가 아니라 ‘일부’의 남자들이다. 자신도 그렇게 이야기하긴 한다. 일부의, 소수의 남자들이 다 성취하고 있다고. 위의 예를 들며 바닥에 있는 남성도 수두룩하다고 말하는데, 공감이 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노인층에 대한 탄탄한 연금 시스템이나 사회보장제도 혹은 여타 다른 지원이 없는 사회에서는 이런 책임 명시가 극단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경우 아들을 가지려는 욕구가 반드시 어떤 비합리적이고 편협한 여성 혐오의 흔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나이가 많아 일하기 어려울 때 당신을 부양할 사람이 누가 될지에 대한 신중한 고민인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노년기 부양을 회사나 국가 정부에게 기대할 수 없고, 딸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아들에게는 강요할 수 있다. 남성은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지는 반면 여성에게는 이런 의무가 면제된다.


 부양의 의무를 경제적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돈이 일차적인 부양의 핵심사항이라고 여기는 것. 그래서 남자들은 여성을 고용하여 부모를 부양하게 한다. 어떻게 몸을 사용하여. 실질적인 행동으로 수발드는 것은 여성이다. 문화는 여성을 이렇게 이용한다. 문화에 소모되는 남성은 여성을 이렇게 소모한다.


일부다처제는 남성들에게 불리한 제도다


남성이 우월한가. 한번 확인해 보시라. 남녀를 겨루게 하는 TV광고에서는 늘 여성이 이긴다.


 광고에서 여성이 늘 이기는가?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광고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되는가. 실제 사례에서 여성이 남성을 이기는가가 근거로 사용되어야 하지 않나? 저자는 이러한 이유가 단지 오랫동안 남성이 우월하다는 시각이 지배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크 트웨인의 이런 말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망할 놈의 거짓말, 그리고 통계치.” 모든 통계치가 여성이 불리하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착각과 현실에 대한 분리가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이 문화적으로 착취당하고 희생당해 왔다는 주장을 완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도 착취당하고 희생당해 왔다는 것이며 그 사례들이 무수히 많으며 ‘남성’에 의해서 당한 착취와 희생이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남성에게는 ‘문화’가 문제였다면 여성에겐 ‘남성’이 그 자체로 문화였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례들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주장이나 근거가 너무나 지엽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소수의 남성들에 희생된 다수의 남성에 대한 부제가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여성들은 위대함을 추구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를 가졌다. 위대함을 추구하지 않았던 여성들도 추구했던 여성들만큼의 아이들을 가졌다.


  이 얘기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것은 무언가. 자신의 유전자를 다른 이에게 남기지 못했기에 남성들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특정 소수의 남성들의 자손만이 후세에 전했다며 꼭대기에 있는 남성들만을 보고 발생한 오류이며 일부다처제의 실제 피해자는 다수의 남성들이라고 주장한다.


핵심은 일부다처제가 남성의 소모성을 기반으로 한 제도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가 대부분의 성공한 남성들에게 보상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문화는 남성들이 가정을 얻고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이용해 그들이 서로 경쟁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도록 몰아붙인다. 하지만 일부다처제는 많은 남성들이 전혀 아내를 맞이할 수 없게 한다. 이 남성들은 단지 시스템의 패배자일 뿐이다. 참 안됐지만 그들은 소모적 존재다.


  책을 읽으며 공감의 요소보다 반감의 요소가 많았다. 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드는 예들이 이토록 와닿지 않을까. 문화적인 차이일까. 이런 혼란과 반감을 아는 것인지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남성에게는 익숙했던 소모적 존재로서의 대우가 여성에게는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문화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편향된 이유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문화가 형성되게끔 모의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적인 이유는 여성은 남성과 달리 문화나 큰 기관들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뒤늦게 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문화가 여성들을 충분히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창조한 남성들 전체에 죄를 씌우는 것은 슬픈 아이러니다. 여성들은 스스로 문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남성들이 일군 문화를 필요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남성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편도 들고 있지 않는가?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 중에서 수긍이 가지 않는 표현은 이거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나는 저자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착취당하고 희생양이 되었다. 불운했던 여성들의 삶이 사회로 인해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남성 또한 착취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가 여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보는 것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점 때문에 여성의 반대편인 남성의 입장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문화적 착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맞다. 그렇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결국 ‘권력’ ‘제도’에 의해 희생되고 착취당해 왔다. 물론, 누가 제도를 만들고 권력을 더 쥐고 있느냐는 예외로 쳐야 되겠지만. 저자의 이 주장을 동의하기 위해선 근거들이 좀더 흥미있고 예리하고 보편적이었으면 한다. 어쩌면 젠더 논쟁은 언제나 소모적인 논쟁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결론은 없는 평행성. 늘, 협력을 말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목표로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이 책은 착취당하는 남성들의 얘기를 보여준다는 것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어쩌면 비교의 대상이 잘못된 건 아닐까. 오히려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 소수의 남성과 다수의 남성의 비교가 알맞은 것 같다. 문화가 남성들만의 경쟁을 부추겨 그들을 이용하여 왔기에 소수의 남성들을 제외하고 다수의 남성들이 얼마나 착취당해 왔는가를 알아달라고 한다면... 저자의 남성들이 소모적으로 이용당해왔다라는 느낌의 이 책도 하나의 사례로 잘 생각하며 더 큰 논의를 확장시키도록 하는 게 논쟁을 위한 논쟁을 중지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긴 할 것이다. 공감하지 못함은 나의 문제이겠지만 두 번은 못 읽겠어서 한번으로 끝낸 이 책의 주장에 좀더 설득력있는 이야기들로 남성들의 착취와 억압을 보여주는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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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미 2017-09-2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다음 페미
니들 꼴페미 도서들도 보통사람이 읽으면 당신이랑 똑같은 감정 느껴.
심지어 과학적 방법론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왜 페미니스트라고 묶이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매번 그렇게 묶이는거야 ㅋㅋㅋㅋ

천칭자리 2021-06-26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댓글 중에 가장 세련된 해석입니다. 찜찜한 점을 정확히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