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거다. 

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귤프레스, 2018-01-22.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수많은 감정 중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있었다. 세상에 다행이라니. 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채 한밤중 닥친 소식에 망연하던 정신은 어디 가고 장례가 끝났다고 다행이라니. 슬프게도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장례식 내내 슬퍼하기 이전에 전투적이 되었던 나. 돌아보면 장례 전까지 매일을 긴장 상태에 있었다. 두 명의 어머니가 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이입된 모양이다. 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병원에 계신 엄마는 매일을 시어머니를 방문했다. 물론 아버지와 번갈아 가시긴 했지만 미음을 끓이는 일은 엄마의 몫이고 할머니 상태를 묻는 시누이들의 잦은 전화에 답하고 나면 ‘우리 엄마한테도 가야 되는데’라는 말을 읊조리셨다.

  “할머니랑 외할머니랑 같은 날 돌아가시면 어떡해?”

  아버지는 할머니 장례에 엄마는 외할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엄마는 시어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작은 어머니, 작은 며느리였다. 작은 며느리는 실제로 그런 집을 본 적이 있다며 그 집은 각자 자기 부모님 장례에 가기로 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런 집을 보았다는 얘기의 결말이 왜 우리 엄마는 자신의 엄마의 장례식이 아닌 할머니 장례식에 가야하는 것으로 귀결되나. 

  “큰며느리니까.”

  그 집은 다행히 ‘작은 며느리’라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작은 어머니는 말했다. 그 순간 또다시 더할 수 없는 경계를, 벽을 느끼고 말았다. 엄마는 아무말씀 하시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런 거다”라고 말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앉고 무수한 돌멩이가 날아오는 기분이 들진대 울엄마는 어땠을까. 그러니, 우습게도 난 장례식 순간순간 외할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물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는 장례 기간에도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경계짓는 아들과 며느리, 며느리와 시누이의 역할, 관계들.

  웹툰작 『며느라기』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가정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적나라한 이 가족의 모습이 ‘내 가족’의 모습이 아니라고 ‘내’가 겪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며느라기』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며느리”들은 모두가 힘겨워하면서도 ‘함께’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찜찜한 무언가를 느끼면서도 결코 문제를 보려하지 않는 그림이 그려진다. 똑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공감은 없이 나 혼자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고 있다. 왜 이렇게 문제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서로 힘겹다 말한마디, 연대할 말조차 잃어버리고 있는가. 가족이라면서.

  며느라기. 우리 엄마는 기꺼이 “며느라기”가 받겠다고 말했을까. 큰며느리는 이 가정에 들어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의무와 책임이 크다면 큰며느리의 권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큰며느리는 이제 다가올 시아버지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생일날 돌아가신 시아버지 덕분에, 생일날 제사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나날이 오래되었다. 어떤 시누이는 그렇게 말했다. “생일이라고 사람들 다 모이라고 시아버지가 그날 돌아가신 거야.”

  좋게 들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냥 곱게, 좋게 듣기엔 찜찜한 말들이 “며느리”들에게는 가해진다. 속상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그렇다고 듣지 않았다고 하기엔 한으로 쌓일 말들을 며느리는 담고 있다. 나또한 ‘며느리’ 입장으로 고모들을 보면서 ‘시누이’라는 역할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 가부장제 문화에 길들여져 이제는 대꾸하기도 싫어져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 일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최선이 되어버린 날도 적지 않다. 그러니 또, 그렇게 누군가를 무언가를 비판하려 할 때면 못한 일이 생각나 움츠러들고 만다. 결혼 전 민사린이 똑부러지게 무구영에게 효도에 대해 일침하다가도 결혼 후 예쁨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문화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모두가 힘겨워한지 오래되고 행복하지 않은 문화가, 지속되고야 마는 이유는 무언가.

  연애기간 처음 남자친구 집에 가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생각하는 김혜리에게 “가사도우미 면접 보느냐”는 물음이 이토록 명확한 물음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명절이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입장이 명확히 바뀌는 모습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일상의 모습이 드라마로 나타날 때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라며 흥분하면서도 “우리집은 안그래”, “나는 안그래”라고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제쯤은 변하겠거니 하면서도 아직은 먼 길. 수없이 이런 이야기들이 난무해도 늘, 내가 겪는 일은 아니라며 나는 아니라며 버티는 것일까.

  『며느라기』에서는 모두가 힘겨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쇼파에 앉은 ‘아버지’만이 그대로다. 그 어떤 불편한 표정도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존재, 그 존재로 인해 이 사회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을 『며느라기』그림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불편하고 속상하고 부당함을 느끼는 모두가 밖으로 나간 상황에서도 쇼파에 드러누운, ‘아버지’라는 존재. 늘 고부갈등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이런 문제의 중심은 ‘아버지’라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럼에도 이 땅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 며느리들 서로간의 감정적인 소모전으로만 치닫고 있다. 무어 그리 큰 권력이라고 떡 버틴 ‘그’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 삶들이 이어져야 된단 말인가.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딸에게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말해놓고 돌아서서 며느리에게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변화.

  “그런 거다”

  같은 며느리에게서 ‘며느리 역할론’이 나왔을 때 느껴야 했던 자조가 더 컸던 것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기에, 그 힘겨움을 가장 잘 알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대했던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도록 며느리의 힘겨움이 토로되면서도 변화가 없던 것이 그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픈 욕구가 강한 나머지 ‘나’에게만 집중해서일까. 각자가 살아남는 방법밖에 달리 없었기에. 같이 힘겨움을 나누고 방법을 고민하지만 그 전투력은 또한 실상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걸까.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겨운 큰며느리의 삶을 사는 엄마를 보면서 수년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슬프다.

  더 많은 가족이 모이면 모일수록 가족 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 방법을 모색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한들 무너져 버리기도 하고. 가족들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가족만으로는 해결이 힘들다는 것을,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느낀다. 그런데 이 변화를 위해 가부장제의 확장된 틀인 사회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으면 희망보다 자조가 먼저 치솟는다. 미투나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방법과 대안에 대한 얘기도 무수히 흘러왔겠지만 '하지마‘라는 것으로만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바꾼 일도 없는데 벌써부터 지치게 된다. 이런 얘기에는 감정이입도 많이 돼서 쉬이 지쳐버리게도 된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감정이입이 되다 보면 쇼파에 누운 아버지도 언젠가는 쇼파에서 내려오는 일이 많은 가족들이 쇼파에서 멀어져 집 밖을 배회하는 일이 소멸되는 날이 오겠지. 그런 깨달음을 느끼도록 이런 책들이 나오는 것이고. 생각해보니 쇼퍼에서 책읽기만큼 편한 일이 어딨나 싶다. 더구나 그림책이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
클레망틴 오탱 지음, 류은소라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마초가 좋니?

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클레망틴 오탱, 미래의창, 2016.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걸스플레인 콘셉트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누나가 알려줄게, 페미니즘 잘 얘기해주는 누나라고나 할까. 남동생의 질문에 답해주는 형태의 이 책은 짧은 페이지 속에 여성운동의 역사를 잘 설명해놓았다. 무엇보다 ‘마초이즘’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재밌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파리 부시장을 지낸 정치인이며 성폭력, 강간 피해자이다. '정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정신병자에게 당했다'라고만 생각하던 작가가 여성과 억압을 성찰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2년 전 오늘, 강남역 살인사건이 촉발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이 단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혐오 확산과 미러링과 함께 전개된 남성혐오, 미투운동과 남성 몰카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성별 대결 논쟁으로 치닫고도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를 테러리스트와 동일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스트를 향한 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빗속에서 추모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염산 테러 공격” 하겠다는 글이 어느 싸이트에 올라왔다. 농담으로, 허세 가득한 글로 치부하기엔 지금의 현실이 녹록치 않고 이런 글을 쉬이 게재한다는 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이처럼 ‘여성이 싫어서’ ‘페미니스트를 증오해서’ ‘여성이 만나주지 않아서‘ 등등의 ’여성 때문에’를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총기난사사건과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서. 남자들이 원하는 형태의 ‘여자가 아니라서’의 이유로.

  ‘마초’. 마초적이라는 이 외국 단어를 남성들은 매우, 격렬하게 좋아하는 듯하다. 마초가 되지 못하는 것이 삶의 실패라도 되는 양 마초적임을 발산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마초적’임을 과시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허세와 멸시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들의 마초성은 여성을 억압하거나 여성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런 식의 말에 발끈하는, 억울한 남성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듯 마초는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여성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다. 어떤가. 마초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토대를 가부장제로 본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게 “그럼 왜 뛰쳐나오지 않고 같이 사는 거야”라며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책은 피해자가 집을 나오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식의 이런 판단은 너무 단순하고 미숙한 태도야.

어떠한 권한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세계의 전부인 가정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런 식의 생각은 정작 심리적 가해자 가 가정 폭력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는 거지. 저마다의 개인이 마른 나뭇가지 꺾듯 단박에 가부장제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이와 같은 말을 오늘도 보았다. 피팅 모델 알바를 하면서 남성들에게 집단 성추행을 당하고 몰카를 찍힌 여성들의 피해를 알리는 글에서다. ‘속옷 촬영을 거부하고 나오면 되지, 왜 못 나왔냐’는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반응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같을까.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겠다고 하니 수사를 지켜봐야하겠지만 당장 피해자도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충격적인 것은 남성들의 집단적인 마초이즘의 발현이다. 그들은 집단으로 함께하고 있어서인지 진정 두려움도 없고 범죄의식도 없이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일들을 지속해왔다. 여성을 억압할 확실한 수단을 쟁취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오래도록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죄의식도 없이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퍼붓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생활해 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를 불편하다 못해 혐오까지 하는 그들의 위선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남동생의 질문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여성들이 받는 일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무수히 차별받고 성폭력의 피해 또한 일상적인 여성들의 상황은 간과하면서도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내는 여성들의 목소리나 퍼포먼스들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은 성폭력 피해자의 울분이나 고용 등 각종 차별받는 여성의 목소리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동참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생각하지않고 과장된 제스처로 행주나 브래지어를 태우는 퍼포먼스 같은 것을 행하는 경우에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는 저런 것’이라며 비이성적, 과격하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렇게 페미니스트들이 전하는 ‘내용’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마초이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지배 관계를 역전하는 것이 아니야. 여성들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버리지 않는 것,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 가증성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기를 바라는 거야.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 동등이라고 무수히 외쳐대도 결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내려온 저 마초이즘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열망 아닐까. 성차별 정책에 대해 무조건 역차별이라거나 특히 한국의 경우 그러면 여자도 군대가라는 말로 모든 논의를 펼치는 이들에게도 페미니스트 작가의 딱 맞는 설명이 있다.


‘역차별’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야! 영미권의 ‘적극적 조치’라는 말의 잘못된 표현이야. 이론 인해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 ‘적극적 조치’ 또는 ‘자발적 조치’라고 하는 게 옳아. 적극적 조치란 피해를 입은 일부 집단에게 혜택을 주어 불평등을 개선해 나가자는 의도에서 실행되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말하는데, 특히 남녀 불평등과 관련,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혜택에서 시작되었어.


  페미니즘의 역사는 이제 100년 즈음인데 늘 주장하는 바가 큰 차이가 없다. 본질적인 것을 두고 반복된 투쟁의 역사가 지속된다. 작가가 이토록 남동생에게 설명을 잘하고 있는 것도 반복된 투쟁의 역사속에 남성들의 질문들이 늘 한곁같았다는 얘기 아닐까. 이해하려는 마음없이 상황을 인식하려는 마음 없이 그렇게 늘. 가부장제 안에서 마초이즘의 환상을 붙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의 얼굴은 폭력 레벨 3입니다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2018-03-08.


  폭력의 피해자가 인터뷰를 했다. CCTV에 공개된 모습만으로도 공분을 일으키기 충분한 부산에서 벌어진 데이트폭력 사건. 보이지 않는 데에선 더 끔찍한 폭력이 이루어졌다. 헤어지자 했다는 이유로 감금·폭력당하고 옷이 벗겨진 채 짐짝처럼 끌려가던 피해자는 보복이 두려워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력의 피해를 알려야만 데이트 폭력에 대한 특례법이 만들어지고 가해자 처벌이 강화될 것이라며, 자신을 보며 피해당한 이들이 용기내기를 바란다며 피해 모습을 공개하고 인터뷰했다. 가해자의 처벌은 원체 있으나마나 하니까.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되어 있는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라 더 경악스럽다. 데이트 폭력은 성폭력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인지, 폭력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살인’에 가까운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는 반성도 없다. 끔찍한 영상과 골절된 피해자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가해자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이 일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에 대한 외모 품평 댓글도 있다. 그것이 일부이라 하더라도, ‘일베’의 글이라 하더라도, 수긍할 만한 일인가.

  사람이 폭력당해야 할 타당한 이유란 없다. 더구나 외모가 폭력의 이유가 될 순 없다. 폭력 피해자의 외모와 행동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다. 피해자는 ‘맞아도 싼 얼굴 또는 몸매’이거나 ‘맞을 만한 행동’을 했기에 그 정도는 맞을 만하다니. ‘성폭력 당할 만큼 생겼네’, ‘성폭력 당할 만큼 생기지 않았는데’라니. 제 자신의 외모 선호에 따라 폭력의 정도를 정하는 피해자에 대한 외모 품평도 폭력 게임에 몰두한 모습 같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향한 이 손가락질은 가정 내에서, 집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뻔히 보이는 곳에서도 거리낌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처벌받지 않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는 가해자를 만들어 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숨도록 만드는 현실에서 이번 피해자의 인터뷰는 데이트 폭력 가해자에 관한 합당한 처벌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몇십명은 더 다치고 죽어야만, 법이 만들어질까. 자신보다 27살 어린 중학생을 임신시킨 40대의 남성이 무죄로 판결되는 세상에서, 데이트 폭력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형량은 과연 얼만큼이나 높아질 수 있을까 싶다. 남성은 사랑이라 우기고 미성년자는 사랑이 아니라 했지만, 법은 ‘그건 사랑이야’라고 미성년자의 감정까지도 판단해줬다. 록산 게이가 지적했듯이 “너무나 자주 ‘그가 말했다’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실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록산 게이는 자전적 에세이 「헝거」에서 열두살에 당한 집단 강간 이후로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었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무기력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보호받지 못한 그때,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끔찍한 고통을 잊기 위해 게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먹는 것이었다.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 먹고 먹고 또 먹어 뚱뚱해지도록 만들었고 190cm에 261kg의 거구가 되었다. 또 짧은 커트 머리에 큰 남자 옷을 입고 자신을 부치(남성 역할을 하는 여성 동성애자)로 만들어 행동했다. 법원 판결에 의해 “사랑을 한” 중학생도 숏커트를 하고 여성적인 모습을 지우고 있었다. 록산 게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지만 폭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또다른 고통과 상처를 받게 되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멸시와 혐오,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혐오가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록산 게이는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껴 집단 성폭력 당한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말을 했다고 해도 “집단 성폭력을 당한 몸”으로 록산 게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거기에 조금은 이해를 조금 섞은 동정의 시선을 던졌을지 모른다. ‘그러니 몸이 그렇게 뚱뚱해도 어쩌겠어’라거나 ‘그런 몸으로 무슨 성폭력’이라거나 그런. 어찌되었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몸에 대해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시선을 던질 것이다. 흑인이라는 것까지 더해져 더한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받는 록산 게이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가하는 이 시선들을 내버려두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더욱 제 몸에 통제권을 잃었다. 그런 자신을 싫어하며 혐오하며 세상을 버텨왔다.


나는 나를 싫어한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내가 나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내 생각에 적어도 내가 이것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몸을 싫어한다고.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사람들이 내 몸을 훑어보고 내 몸을 대하고 내 몸에 말을 보태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이런 록산 게이가 마침내 조금 자신에 대한 혐오의 시선을 거두는 변화는 눈물겹다.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그로 인해 변해버린 거구의 몸으로 인해 또다른 시선에 힘겨워하지만 마침내 무거운 몸으로 인해 발목까지 부서져버린 상황에서 자각하는 그때. 그것은 스스로가 가한 유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록산 게이는 자신을 치유하는 일이 거창한 이름으로 필요하리라 생각지 않고 그저 자신이 몸을 돌보고 자신의 몸과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깨달았다. 그리고 치유가 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치유가 되리라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제 그 스스로 가졌던 허기를 지우고 치유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겪은 일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내 몸에 남겨져 있다. 내가 겪은 일에서 살아남긴 했으나 그것은 이야기의 전부라 할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살아남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생존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되었으나 누가 날 여전히 ‘피해자’라 해도 신경 쓰지는 않는다. 나는 성폭행을 당한 순간 피해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이름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피해자이고 그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산 게이와 여학생처럼 폭력으로 인해 자신을 지우며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숨어 있는지, 앞으로도 얼마나 숨게 될지는 움직이지 않는 ‘법’의 변화가 조금 좌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오래도록 당연시하는 이 사회에 끊임없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려주어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록산 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것은 폭력의 역사이다. 록산 게이는 이 폭력의 역사에서 자신에 대한 많을 것을 알려주며 다시금 사회속으로 발을 내밀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했는지”를 알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삶의 문제


나쁜 페미니스트-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최근 상당히 의아함을 자아내는 두 일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갑작스레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실시간에 올랐다. 사람들이 이 단어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검색하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누군가 관련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얼마만큼 알까. 이때의 단어는 사전상의 의미일까, 인터넷에 회자되며 부정적 의미를 가득 담은 의미일까. 이런 궁금증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될 때마다 궁금해졌다.

  실시간 검색어는 한 연예인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 일과 관계가 있다. 누군가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놀랄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뜬금없는’ 선언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은 이 선언에서 중요한 요인은 아니라고 보았기에 나름 대단한 걸이란 생각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람의 언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담배피는 사진을 올리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기에 그 이유와 연관성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야 하는 성격”이라며 자신으로 인해 “페미니스트임을 당당히 밝히는 여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에선 사실, 경악했다. 논란이 일자 “'여성스럽게 입는다”, “남성적이게 운전을 한다”라는 말을 한 것과 페미니스트 발언에 대해 경솔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페미니즘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주창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부족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요즘 한창 떠들썩한 김광석 부인의 발언이다. “이런 나라에요? 여자를 보호하지 않는 나라입니까?” 흔히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대표가 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저런 ‘불리할 때만 여자냐’라는 말이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저 발언에 또한 경악했다.

  여성이며 페미니즘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페미니스트라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나로선 이로 인해 생겨날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염려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행동력, 실천력과 관계된다. 페미니즘 또한 하나의 운동이기에 이를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길을 가다 쓰러진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을 일으켜 줘야 할 텐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행동하지 못했다면 ‘길가다 다친 사람을 도와줬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적어도 내 부족을 자각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때론 소극적 저항에 머물며 스스로의 인식전환에만 만족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는 나와 같은 사람에겐 상당히 의미있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한때 ‘나쁜’을 붙여볼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뜬금없어 보이긴 할 것이고 어쩌면 “새삼스럽긴”이나 “당연한걸”이란 반응이 튀어나올 것도 같다.


나는 페미니즘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빈틈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나도 페미니즘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좋을 것을, 너무 이론에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이 뭐 별건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만큼 부담감이나 거부감없이 이 책은 읽힌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함께 서술되어 그의 경험을 함께 나누며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리고, 재미있다. 대체로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용어의 낯섦과 어려움이 가득하다는 걸 생각하면 몇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한 페미니즘 서적 중에서 이 책만큼 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외국인의 저서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이론의 언어가 아니라 공감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된다. 좀더 대중적이도록 운동으로 한정된 느낌이 들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가 되지 않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십대 후반과 이십대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면 매사에 일관적이고 논리정연한 사람으로만 살아야 할까봐 거부했던 것도 같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으니까. (…)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얼마 전 지구촌 뉴스에서는 도로를 단속하던 경찰이 이유없이 흑인 여성을 세워 신분증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경찰은 조롱조의 태도로 일관하다 흑인 여성이 ‘검사’임을 보증하는 신분증을 받아들고 무척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흑인+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여주었는데 록산 게이 역시 흑인 여성이다. 그 역시 미국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차별과 편견을 겪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대중문화에 나타난 다양하고 많은 여성혐오와 여성폭력 언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여전히 많은 페미니스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페미니즘이 백인 여성 위주로 흘러가고 있음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록산 게이가 지적하듯 아직 페미니즘이 헤쳐 가야 할 길은 멀다. 또한 페미니즘 역시 생물로서 존재하기에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분명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불리기를 주저하거나 특정한 이가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니, 변화는 있겠으나 발전은 없겠다. 변화하되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겠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것이 ‘인신공격’ 같았다 고백했다. 그리고 차츰 록산 게이가 알아간 세상에서 어쩌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경험해야 했다. 어쩜 필연적인 것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기만의 언어를 정립한 록산 게이는 이제, 스스로를 ‘나쁜 페미니스트’라 자처한다. 이때의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이에 대항해 전혀 흠잡히지 않으려 스스로를 옥죄는 그런 페미니스트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주류로서의 페미니즘과는 다를 지라도, 그 실천방식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여성이기에 개똥같은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전제에서 행동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흑인 여성으로서 당해온 록산 게이의 경험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여성에게 인식의 문제이기보다 삶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의 풍경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교양인, 2013-02-12.


더욱 중요한 시사점은 평화시 남성 중심적인 놀이 문화가 바로 전쟁시에 집단 강간이나 대략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집단 강간, 고문 등 전시 폭력은 ‘광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 문화의 연장선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폭력적인 일상 문화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납치살인사건 납치 목격자, 부부싸움하는 줄 알고 지나쳤다 

 ∙내연녀 말다툼 후 목졸라 살해, 시신 유기…지난 남자 만난 얘기에 홧김에

 ∙동거녀 목졸라 살해 교회 베란다 유기… “끝내겠다” 범행 암시

 ∙‘예전에’ 식당주인과 다퉜다고, 여친 창밖 던지려한 30대, 흉기도 휘둘렀으나…감형

 ∙하동 대안학교 40대男 교사 여중생 3명 강간·성추행, 현재 잠적. 교장, 교사 3명, 행정실장, 교직원 2명 같은 혐의로 입건


  지난 한주의 ‘흔한’ 기사다. 익숙한 사건에 놀람이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 개의 기사에서 세명의 여성이 ‘목졸라’ 살해됐고 버려졌다. 한명은 수없이 폭행당했고 죽을 뻔했다. 몇 명일지 모르는 중학생 아이들이 폭행당했고 어떤 아이들은 성폭행당했다. 한명이 아니라 몇 명일지 모르는 이들로부터 일 수 있다.

  내연녀가 “지난 남자를 만난 얘기를 해서” 홧김에 목을 졸랐다는 남편 있는 여자를 만나는 남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며 친구와 통화하고 실행한 남자, 관계를 끝내는 방법이 목졸라 화단에 버리는 것인가? 떡볶이를 먹는데 ‘전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격분해 여자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베란다로 끌고 가 창밖으로 던지려하고 흉기로 죽여버린다 위협하고 폭행했고, 이전에도 10여 차례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했으나 감형된 남자.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고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납치가 벌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직원….

  떡볶이를 먹다가 여자친구가 ‘옛날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고 “격분”하는 이도 있는데 이런 뉴스를 보면서 “격분”하지도 못하는 난 뭔가. 다음 주에도 이런 기사들은 또 나타날 거라는 걸 아는 이의 반응이다. 인터넷에 파주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인 ‘파주 내연녀’만 검색해도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 연도별로 파주에서 벌어진 내연녀 살인·폭행 사건 기사가 쏟아진다. 성폭행, 강간 사건 역시 넘쳐나는데 단순히 ‘폭력’만 행사한 사건은 수두룩하다.

  개인의 비윤리성이라 성토한다 하더라도 반복된 이 ‘구조’를 들여다보면 역시 지친다. 정말 이 모든 기사들 속 가해자들의 인성과 윤리의 부족이거나 정신병의 문제일까. 기사는 A, B, C, 혹은 김모씨, 이모씨로 나타나니 넘치는 기사들 속에서 어떤 사건이 ‘나’에 대한 기사인지 쉽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이,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이다. 부부 싸움의 경우 큰 폭력으로 번지기도 하고 이때 대체로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생명이 오가는 상황일지라도 부부싸움을 말리기 위해 접근·관여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 해도,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사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정말로 남성들에겐 폭력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희진이 지적했듯이 말이다.


남성은 여성을 때릴 권리를 타고났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 그 자체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당연하거나 폭력이 아니다. 따라서 쟁점은 폭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인가, 왜 언제인가 따위다. 그래서 여성들은 “당신 미쳤어? 너도 나한테 맞을래?”가 아니라 “왜 이러세요?(지금이 그 때인가요?)”라고 가해자에게 묻는 것이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다. 세상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한 지난 겨울과 봄의 경험이 여전히 ‘대통령’만 바뀌고 다른 것은 바뀌지 않았다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남녀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 역시 바뀐 듯 보일 뿐, 바뀌지 않았다.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이야기 중에 몇 번이라도 ‘여성’이 들어가면 당장 페미니즘이니 메갈이니 하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격분’하는 목소리가 있는 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슬픔과 분노와 비통함 등등의 감정이 마구 휘몰아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 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최근 모임 뒤풀이에서 후배가 여자 선배에게 선배를 보는 순간 자신의 시누와 너무 닮아서 지금까지 아무 말을 건네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여전히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며 오래도록 감정을 토로한 일이 없었는데, 시누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았다. 개인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들이 뒷담화로 시댁을 “까는” 그런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진솔한 성찰이었다. 그런데…얘기를 듣던 남자 선배가 “공통의 주제로 얘기를 하자”했다. 다른 남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며.

  이 말에 격분까지 갈 뻔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공통의 주제라는 말도 그러했고 남자와 여자의 선을 긋는 태도에 불쾌함, 실망감, 섭섭함이 솟았다. 한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듣는구나 싶으면서도 개인의 무의식과 성찰을 주제로 한 이야기 끝의 그 말은, 배움이라는 것의 소용없음까지도 느껴졌다. 삐딱한 마음에 그 선배 앞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만 줄창 꺼내볼까 싶기도 했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이니 여성주의니 하는 용어에 많은 이들이, 특히 남성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여성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남성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 가는 듯한데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만이 힘을 뻗어가는 기분은 왜일까. 존중, 존중하면서도 뒤에서는 비난하며 ‘결정적인’ 상황에 수용되는 목소리가 따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 폭력을 견인하는 이 권력의 힘. 여전히 페미니즘은 도전받고 있고, 도전해야 하고 갈 길이 멀다. 그나마 정희진처럼 풍부하고 쉬운 언어로 페미니즘에 대해 일상의 성정치학에 대해 글을 쓰는 이가 있어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많이 배우게 되어 힘이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