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혐오가 지향하는 것은 그것이었네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윤보라·임옥희·희진·시우·루인·나라, 현실문화, 2015.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대표적인 감정이 여성혐오다. 그럴 만하기 때문에 여성을 혐오한다는 생각은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만하다는 내용은 무엇인가. 한국의 여성들-혐오 언어의 대표적인 김치녀-이 이기적이고 남성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보라는 그것은 비난과 혐오의 이유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여성의 유형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남성도 이기적이고 여성을 이용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성별 구분없이 비난받을 충분한 이유가 되는 유형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특정한 유형의 여성이 아니라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의 언어를 자랑스러이 떠벌이는 것일까?


1960~1970년대 유명 잡지들은 미혼 여성의 직장 생활을 두고 ’결혼 전 즐겁게 놀기 위한 자금과 친구를 얻기 위한 것‘, ’사치와 낭비, 퇴폐로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비난했다. 언뜻 보기에 사치와 낭비는 미혼 여성의 직장 생활을 비난하는 이유로 비춰지지만, 진짜 이유는 “사회가 여성들의 경제사회적 활동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사치하고 낭비하기 위해 일터에 놀러 나온 미혼 직장 여성‘이라는 유형을 만들어낸다.


  이 예를 보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남성의 군가산점제도 폐지 이후로 여성의 혐오가 확산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과 함께. 그렇다면 이 역시도 경쟁사회에서 기득권처럼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남성들의 두려움의 표현인 걸까. 이에 대해 윤보라는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이 높은 청년 실업률이나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의한 남성의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은 섣부른 단정이다.라고 함으로써 최근의 여성혐오에 또다른 특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왜 혐오를 만들어내는가?


 '나쁜 여자와' '착한 여자'라는 판본을 만들어내고 각 사회 주체들을 배치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첨예한 젠더 정치가 된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비난은 나쁜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성을 참조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p16


 일단, 여성혐오는 이처럼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금, 도대체 어떤 필요가 그들로 하여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었는가. 안타깝게도 여성혐오는 유머와 드립으로 그것을 포장하며 방패막이로 삼고 있기에 문제제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미러링’이라는 형태의 여성혐오에 대한 반대 담론의 장으로서의 남성 혐오가 등장했을 것이다. 미러링은 새로운 담론이라 하겠지만 도저히 답이 없는 것에 대한 지침의 한 형태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 이상 그 어떤 도덕과 올바른 개념으로서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벽에 대한 답답함. 그래서 결과적으로 계속 혐오의 언어만을 양산하고 있는 상황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윤보라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고 했다. 왜 웃음으로 포장한 채로 혐오할 여성을 강박적으로 만들어내는지, 그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어떻게 하려는지. 그래서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혐오의 언어를 계속하고자 하는 것은 임옥희의 말처럼 그들이 연대가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마사 너스바움의 표현처럼 그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미담에도 설득되지만, ’그 인간 왜 그래‘로 시작하는 험담과 뒷담화로 연대한다. p54


혐오 발언 안에는 주목을 통해 자신이 행위 주체임을 인정받으려는 '주체화의 열정'이 들어 있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에서 주목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혐오는 격렬한 열정 중 하나다. p56


  임옥희는 이러한 혐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결국은 사회적 ‘평등’과 분배적 ‘정의’라고 주장하며 폭력과 혐오를 줄여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성은 육체로, 남성은 정신으로 구별 짓고 자기 안의 타자를 억압한 흔적을 젠더 무의식이라고 하는데 젠더 무의식을 활용하는 가부장적 정치체를 함께 변혁시키지 않는 한 혐오 주체들은 끊임없이 생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성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도 수시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그렇다고 여성 혐오에 기죽지 말자고 말한다. 왜냐, 혐오는 깊은 공포와 매혹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으니까.

  정희진은 한국사회는 여성 혐오, 약자 혐오, 피해자 혐오에 대해 유독 관대하다고 말한다. 여성 문제, 성별 제도에 대한 지식은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며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도 없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무지’가 문제다. 인식의 변화는 설득과 대화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권력관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그들이 알아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거나 혐오 발화를 중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우는 남성피해자론과 역차별 주장을 분석하며 “남성 동성사회성 논의”로 설명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남성 간 성적 긴장을 제거하고 여성을 매개로 남성 사이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동성애 혐오와 여성혐오가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특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남성의 동성사회성이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를 기초로 구성되는 것이다.

  루인은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시스플레인의 문제점을 말한다. 맨스플레인이 상대방을 여성으로 만드는 행위며 성역할의 반복이자 재확인이라면 시스플레인은 젠더 규범을 강화하고 단속하고 자연화할 뿐 아니라 성역할 반복을 요구하고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들로 인해 트랜스젠더퀴어는 끊임없는 자기혐오 속에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훈계할 수 있다는 권력감, 그리고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퀴어 정체성의 진위를 가릴 수 있고 진위를 가려줘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다는 권력 행위가 문제의 핵심이다. 계속해서 타자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확인하는 태도, 그리고 이 태도로 구축되고 이 태도를 재생산하는 사회구조가 논의의 핵심이다. p214


나라는 혐오가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혐오가 이에 해당한다. 성소수자 혐오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사회적 약자 일반을 향한 혐오를 용인하고 조장하는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성소수자 반대 운동도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고 복지와 노동조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성장했다.


오늘날 성소수자 혐오는 사회적 위기의 책임을 소수자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면서 각개 생존의 미로에 갇히길 바라는 자들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성소수자 운동과 시민사회, 진보 진영은 성소수자 혐오의 정치적 구실과 효과를 이해하고 사회 변화의 전망을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 혐오라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단지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또 다른 소수 집단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길 바라는 자들은 누구인가. 혐오가 파괴하는 누군가의 존엄은 나의 존엄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질문에 함께 답해야 할 때다. p255


  이 책은 여섯 명의 저자가 여성혐오에 대한 각자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논의의 내용은 다양한 형태이더라도 결국 집중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것이다. 혐오가 어떤 이유로 형태로 야기되었든 그것이 이용되고 있는 방식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권력구조가 함께 하고 있다. 우리가 이 혐오의 언어를, 정말로 혐오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