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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불다가 터졌어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소설을 읽으면 대체로 나쁘지 않은 억양으로 “이게 뭐야”라며 킥킥거리게 된다. 이것을 단어로 표현하면 김중혁의 이야기는, 글은 재치가 있다라고 하면 되는 건가? 그래서인지 제목을 보고 작가의 이름을 보면서 떠올린 건 ‘나와라 가제트 만능 팔!’이었다. ‘가짜’는 진실하지 못한, 거짓이란 단어인데 가제트 팔이라니. 하지만 첫 이미지는 중요한 모양이다.   어느새 소설속 인물들에게서 가제트를 본다. 다양한 도구들을 뽐내며 열심히 사건을 해결하려 하지만 가제트 자신의 마무리는 사실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마는 것. 그렇지만 가제트는 그것을 모른다. 서툴고 엉뚱한.

  여러 권의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가 이번 소설집 <가짜팔로 하는 포옹>을 자신의 첫 번째 연애소설집이라고 말한다. 연애소설,집. 특별히 ‘연애소설’이라 말하는 이유가 다른 소설집과는 다른 차이가 있다는 얘기겠지. 여덟 편의 이야기가 어떤 ‘연애’를 품고 있을지. 김중혁 소설은 대화체가 많은 데다가 엉뚱함을 품고 웃을 수 있는 경쾌함으로 상당히 빨리 읽힌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 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p222 <보트가 가는 곳>

 

  연애소설이라 이름 붙였으니 더욱 재밌고 엉뚱한 연애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면, 역시 안된다. 연애가 뭐 별거냐, 사랑하는 이야기가 연애소설인 게지라고 한다면야 또 모르지만. 그런 설레임과는 마냥 다른 연애소설의 이야기이다.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 p96 <가짜 팔로 하는 포옹>

 

  표제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시종일관 술주정뱅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네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괴롭고 외로운지는 알겠지만 네가 그것을 술을 빌어 이야기하기에 나의 진심은 ‘네가 한 이야기’보다는 ‘네가 술을 먹고 하는 이야기’라는데 집중되는 듯하다. 말의 진실성이 말을 표현하는 방식에 묻혀 버리는 느낌. 그러니까 다 맞춰진 퍼즐처럼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이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그냥 퍼즐이었던 상황이 되는 기분을 경험한다. 그러니, 그런 상태로 아무리 떠들어도 처음부터 우리에게 ‘과정’은 없었던 것이다.

 

그림을 다 맞추고 나면 새로운 걸 완성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고, 그냥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제자리에 놓아둔 기분이야. 아버지는 밥상 뒤집어엎고 나가고, 나 혼자 남아서 반찬이며 밥이며 국물이며 사방에 엎질러진 걸 다 정리해놓고 소주 마실 때의 기분이랄까. 내가 지금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지? 그런 기분이 갑자기 들어. 다 맞춰진 퍼즐을 보고 있으면. p93 <가짜 팔로 하는 포옹>

 

  풍선을 크게 불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빠져 쪼글쪼글해진 풍선을 보고 있는 기분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내 상태를 나타내는 말 같다. 분명 책을 읽는 과정은 있었는데 여전히 완성된 퍼즐을 보고 있고 그 과정은 어딘가 뿌연 기분이 마냥 드는 것. 이것은 먹먹함과는 다르다. 약간 모호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가만 생각해 보면 그저 무심함인 것도 같다. 그래, 사는 게 그런 거지라고 내뱉어 지는.

 

바닷물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바닷물의 일부가 되는 물의 심정. 그런 게 한 개인의 종말일 것이다. 바다는 연신 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늘 변함없다는 듯 출렁이고 있다. 생명이란 저렇게 무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p222 <보트가 가는 곳>

 

  그런들 저런들 어떠리. 정말로 그렇대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감정이란 늘 격랑이니까. 관계란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고 그런 것. 오랜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는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서 겪는 사랑의 감정이란 폭풍과도 같은 것이기에 가짜 팔로 해주는 위로라도 필요한 것일지도. 가짜 팔로라도 건네는 위로로 폭풍을 잠시 잊을 수도.

 

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p300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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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제의


   최진영, 구의 증명


   ‘구의 증명’에 당연하게 수학적인 논리의 전개를 생각했다. 수학을 좋아하지도 않고 푸는 것은 더 더욱 좋아하지 않고, 잘 풀지 못하면서, ‘증명하라’를 떠올리다니. 그런데 구가 구임을 증명하는 문제는 어떻게 풀릴까. 왜 흥미있게 느껴지는가. 그런데...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p10


  소설책 제목을 보면서 수학, 논리, 증명을 생각했는데 그 ‘구’가 그 ‘구’가 아니라니. 수학적 사고, 논리적 전개를 생각한 나는 저 문구가 눈에 딱 들어온다. 나처럼 생각한 사람을 위한 문구가 전혀 아니긴 하지만, 그 간극이 너무 크기에 “말도 안 돼”를 외쳐야 할 지, 무조건 “믿음”을 끌어들여야 할 지 망설이는 동안, 한가지가 확실해졌다. 어쨌든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의 어조가 아리고 쓰린 탓에 일단 믿어 보자고.


불행해도 행복해도 구를 생각할 텐데,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구를 생각하면서 살기는 싫었다. 구와 같이 살고 싶었다. 우리는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라고 구는 말했다. 멍청한 집착이라고 했다. 분명 더 큰 불행이 올 거라고 했다. 불행이 커지면 함께 있어도 외로울 것이고, 자기와 같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괴로울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p151


  그 애들의 이름은 왜 ‘구’이고 ‘담’인가. 왜 어릴 적부터 인연으로 맺어져 돌고 돌아도 서로가 되게 만들었을까. ‘구’의 이름에선 오래라는 말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의미가 떠오른다. 그러면 ‘담’은, 담담하다인가. ‘넓고 큰 도화지를 두 손으로 구깃구깃 구겨 아주 작은 공처럼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구’를 ‘담’은 사랑한다. ‘구’도 담을 사랑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뭐든 상관없는 덤덤하게 보이는 사랑. 덤덤하지 않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불행해도 같이 있고 싶다는 담인데,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라고 말하는 구인데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고, 덤덤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힘겨운 삶 가운데 “영원이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과도 같은 것”이다.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이었다. p73


  구의 말처럼, 담은 조각조각 구를 먹는다. 어둠이 깔린 길 위에서 담은 구를 붙잡고 먹는다. 풍경으로 길바닥 위의 두 연인의 모습이 비쳐진다. 사람을 먹는 사람은 식인종이고 우리는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인육을 위해 살인하는 식인종과는 달리 죽은 이를 먹는 식인종에게는 그것은 제의와도 같다. 그러니, 구를 죽여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구를 먹는 담의 행위는 일종의 제의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구가 죽으면 따라 죽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의 시체를 걱정하는 담이기에 마치 죽은 동물을 태우듯 형식적이고 의미없이 처리되고 말리라는 걱정을 하던 담이니까. 태우기도 묻기도 싫었던 서로이니까, 담의 이 행위는 구가 죽기 이전부터 구에게도 얘기했듯이 죽은 후의 제례의식인 것이다. 야만적이라고 말하기엔 먹먹한. 또한 경건한.

   

여기 네가 있다.

    나는 너와 있는데, 너는 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여기 없거나 내가 여기 없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싶다가도, 고통스럽게 나를 뜯어먹는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있든 없든 그건 어디까지나 감각의 영역일 텐데, 나는 죽은 자다. 죽어 몸을 두고 온 자에게 감각이라니 무슨 개소리인가. 하지만 느껴진다. 나는 분명 너를 느끼고 있다. p172


   소설의 시작부터 담은 구를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환상인지 농담인지, 이것이 가능한지 가늠할 수 없었던 시작에서 논리따위는 멀리 치우고 ‘믿음’을 이끌어냈어야 했던 거다. 지금은 믿는다. 담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구의 시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으리라고.

  작가는 애인과 같이 잇을 때 그의 살을 손가락을 뜯어 씹어 먹는 상상을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담이 구를 먹는 것은 이 이야기는 그 상상에서 발현된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읽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작가는 그 상상을 하며 혼자 좋아 웃곤 했다고 말하는데 담의 처절한 행위가 작가의 말을 입으면서는 그냥 그런 연인들의 애정행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애정이 비극적이고 처절하기를 바라다니, 무슨 가학적인 심보인가 싶긴 하지만, 여튼 그랬다. 그래서 여운이라는 것이 지속된 것이겠지만.

  최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도 독특한 스타일의 구성이었다. 구성과 느낌이 구의 증명과 비슷하다. 내용의 차이와 좀 더 긴 장편과 짧은 장편의 차이. 어떤 책은 스토리에 집중하게 되고 어떤 책은 스타일에 집중되기도 한다. 이 책은 스토리보다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 눈이 더 간다. 제목과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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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빛과 그림자


꽃그림자놀이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소연 저, 나무옆의자. 2015.


  

   어떤 종류의 소설을 읽는지는 개인의 취향이니까 진지함을 깔고 왜 읽는 거냐고 물어본들 그 대답에 특별히 반박할 이유는 없다. 또한 아무리 진지하게 물었다 해도 “재밌다”가 절반 이상의 답으로 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소설을 왜 읽느냐라는 물음엔 좀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간혹 그 물음은 ‘소설을 읽지 마’라는 전제를 깔고, 그것을 결론으로 하기 위한 질문일 수도 있으니까.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한번씩은 들어보기도 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소리들은 사실은 ‘책을 읽어야 된다’라고 가르치던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읽지 마’, ‘자율학습 시간엔 읽지 마’, ‘시험기간엔 읽지 마’ ‘이런 소설은 읽지 마’ ‘그거 읽을 시간 있으면 교과서나 봐’.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읽어야 할 책은 정해져 있고, 늘 목록화된다. 취향과는 상관없이, 취향을 찾을 여력도 없이 ‘읽어야 한다’는 책을 만나서 왜 그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암기하고 나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건가.

  과거에나 지금에나 여전히 소설을 금기하고 천시하는 분위기는 있다. 지금은 성적에, 대학 진학에 ‘방해’된다는 이유였고 과거엔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여기, 이 책은 조선 정조 시대 소설을 금지하던 때,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미스터리와 액자 소설 형식으로 담고 있다.


소설가는 세속의 지기(知己)라지 않나? 문체가 시대를 반영하는 그림자라면, 소설은 조선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세! 난 그 변화를 소설이란 방식으로 기록하고 싶어. p13


  정쟁이 심화되고 사회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때, 사회의 사람들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친구 최린의 얘기에 시골에서 스승의 조언에 따라 소설을 멀리 한 선비 조인서는 친구를 극구 말린다. 그러나 운명은 오히려 조인서로 하여금 소설을 읽고 쓰게 만든다.    

  조인서가 소설을 읽게 된 계기는 귀신이 나오는 집에 갇혔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갇힘이긴 하지만. 우연히도 겨울날 매화꽃에 홀린 조인서는 폐가를 방문하고 한 노인으로부터 그곳에 귀신이 없다는 걸 밝혀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곳에 얽힌 비밀을 밝힐 마음에 ‘유현당((幽玄堂)’이라는 폐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데 생계 때문에 소설을 써 세책점에 팔거나 중국 소설을 번역하게 된다.

  그의 일과는 소설을 읽고 쓰는 일과 집 안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그을린 소설책을 발견하면서 빈집에 얽힌 이야기와 자신이 왜 빈 집에 살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데 모든 것은 ‘역모 사건’과 얽혀 있었다. 그리고 이 역모사건과 유현당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아수라』가 세간에 나온다. 이 큰 틀의 이야기 속에 조인서가 읽는 여러 종류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알던 설화, 민담, 소설 등의 이야기를 새로 각색한 형태다. 주된 이야기와 맞물려 이런 소설 속 소설을 읽는 느낌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작가가 『천일야화』 속 셰에라자드처럼 이 소설을 썼다고 한 것처럼, 소설 속 이야기들이 과거와 현재의 옷을 입고 글 속에 잘 녹여 들어 있다. 작가는 이것을 제목의 꽃그림자놀이로 표현한다.


소설은 일종의 그림자놀이예요. 현실이 실체를 드러낼 수 없으니, 대신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지요.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자는 실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아요. 이 손으로 토끼도 되었다 여우도 되었다 하잖아요? 이런 묘미가 나를 소설로 이끌었나 봐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비추면서도,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던 그림자만의 재미있는 세계가 펼쳐지니 말이에요. p207


  누구에겐가 소설은 ‘도구’가 된다. 그것은 비밀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그럴 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된다. 소설 속에 ‘이야기’를 담으려는 자와 이야기의 재앙을 피하려는 이가 맞붙을 때, 그것은 소설의 박해로 이어진다. 그것은 언제나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담으려는 자는 억울하거나 소망을 가진 자이자 민중들이고, 억압하려는 이는 권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소설을 읽는 폐인 중에 기생 계심과 최린의 여동생 란의 소설읽기는 남다르다. 계심은 소설 읽기를 통해 자신의 허한 마음을 달래고 자 하며 최란은 소설을 통해 사내들이 암글이라 천시하는 한글로 ‘조정에서 주도하는 문체반정과는 다르게, 수컷이 지배하는 조선의 문체를 바꿔보고 싶은 꿈’을 갖는다.


소설은 보잘것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것의 힘을 증명하려는 문장일세. p12


  이 보잘것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탄압이 거세어진다. 탄압이 거세다는 것은 또한 소설이, 이야기가 가진 ‘힘’을 반증한다.


『아수라』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유현당의 옛 제자들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움직이고 있단 얘기를 들었어요. 유현당을 역모죄인으로 몰았던 노론은 긴장하고 있을 거예요. 오빠, 노론에는 소설 폐인이 많아요. 그들이 이 소설을 지켜보고만 있진 않겠지요. 『아수라』를 쓴 사람은, 유현당 집안과 사건의 내막을 훤히 아는 이가 틀림없어요! 노론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찾아내 위험을 알려야 해요! p 174~175   


  소설이 가진 ‘힘’ 있다면 계속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문학이 죽고, 소설을 읽는 이가 시를 읽는 이가 점점 사라져간다고 해도. 어떤 이야기는 ‘금지’당한다 해도 그 금지의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소설 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어쩌면 특정 작가에 한정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의 박해를 견뎌온 소설이 다시금 그 명맥을 이거나가고 사람들마다마다 가진 꿈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질 수 있기를. 소설을 통해서 펼쳐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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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을수록 좋은 이야기


  작가는 도시에 대해, 그리고 수십만 개의 좁고 더 좁은 골목에, 혼자 걷고 있는 사람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잠시 혼자였던  그 순간에 대해서.

  바쁜 도시, 바쁜 생활의 도시인의 잠시의 그 시간,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이야기가 짧은가. 짧은 소설이다. 그것두 매우.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쳤음 직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좋은 사람들인 건가.

  

그해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내가 춥고 겁에 질려 있었다면, 춥고 겁에 질린 사람이 오직 나 하나뿐인 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p148~149 <그 여름의 끝>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당장 옆에도 함께 하는 가족들이, 애인이, 친구가 있지만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 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혼자이고 싶은 시간들이 있다. 순간이란 아득하리만치 짧아도 그 틈에 비집고 들어오는 감정의 내용들은 다양하다. 불안, 공포, 외로움, 편안함, 자유........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은 혼자라는 것. 혼자의 시간에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질까.

  <비밀의 화원> 속 아내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소망이라고 해야 할까 욕망이라 해야 할까. 아내는 스마트폰의 세계에 빠져 점점 예전의 모습과는 다른 행동을 보인다. 그리고 아내가 비밀처럼 간직한 페이스북의 세상에선 아내와는 다른 누군가가 삶을 살고 있다. 아내인데 아내는 아닌 다른 누군가. 현실의 ‘나’가 아닌 위장된 ‘나’로 살아가는 가상 세계에 헤어나지 못하는 아내의 시간. 그것은 꿈꾸는 시간일까. 지치고 병든 시간일까.

  <말하자면 좋은 사람>의 짧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현실에서 ‘나’를 견디며 현실에서 벗어난 곳을 향해 내 마음을 두고 있는. 그렇게 그들은 삶을 견디고 있는 것인가. 이별하고, 취업을 위해 애쓰지만 힘들고, 시험에 낙방하고, 집을 구하기 위해 전전하며, 마이너스 통장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근근히’ 견디고 있는 그들.

  

 이럴 때 누군가 툭 어깨를 치며 “같이 가자!”고 말해주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면 든든할까? 하지만 혼자도 나쁘지 않았다. p121 <아일랜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옆에 있어서, 그래서 위안이 될 리는 없다. 그런 삶을 같이 하고 있기에, 나 혼자 겪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삶 속에서 견디며, 버티며 같게 되는 ‘불안’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없다면야, 그때야말로 혼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짧은 소설, 몇 페이지 안되는 이야기들을 담은 소설들을 몇 권 보고 느낀 생각은 이야기가 ‘짧아서 다행이다’였다. 그들 이야기가 희망과 아름다움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라 힘겨운 삶의 현실을 다룬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짧은 소설들은 마치 ‘이렇게 힘든 현실이군요’를 말하는 수기들 같다. 그러니 슬프고 답답한 이야기는 짧을수록 좋다. 고되고 힘겨운 삶의 이야기는 길수록, 답답하다. 삶은 그런 것 같다. 쉽게 결정내리지 못하고, 정확히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것.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모든 것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p27 <견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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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소각의 여왕, 이유, 문학동네

 

지창씨는 딱 한마디만 했다.

“요즘은 나쁜 짓 안 하고 잘사냐?”

“나쁜 짓 안 하고 어떻게 잘살아?”

해미가 끼어들었다.

 

   청소년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다 보면 묘하게 하나로 정리가 된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 보는 ‘문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핍을 끌어안은 채 왜 그다지도 성숙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왜 그토록 의젓한지. 인터넷 속 사건·사고 속의 청소년들은 모두 문제를 일으키고, 반성하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성숙이라는 건 아예 물 건너갔고, 반성이란 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설 속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뇌한다. 바쁘고 힘든 삶 속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깊다. 그래서, 주인공이겠지.

  여기 소각의 여왕 해미 역시도 그런 청소년의 한 명이다. 그렇게 자라난 해미가 직업으로 모으는 고물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소각의 여왕> 속에 담겨 있다. 등장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해미와 해미 아버지 지창씨와, 지창 씨의 친구와, 고물상 직원이었던 두 명 정도. 그들의 삶은 정리해야 할 수많은 고물들보다도 단촐하다. 그래서 더욱, 쓸쓸함을 부추긴다. 낡은 고물들을 분류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긴 하지만 많은 물량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산업의 변화와 함께 고물 사업도 위기를 맞게 된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고물상의 진리처럼 이 세상에서 점점 사람들은 뭉치려고 하기보다 각자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결핍이 가져다주는 것은 남들과는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미는 여느 학생들처럼 대학생이기 되기보다 아버지와 함께 고물상을 운영하는 삶을 택한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물상의 주인 해미 아버지, 지창 씨의 남다른 점이라면 면허도 없는 해미에게 1톤 포터를 몰게끔 한다는 것이다. 포터를 타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고물을 수집하던 해미는 이제 고물 대신 유품정리사가 된다. 몰래 아버지가 하던 이 일을 해미는 선택한다. 죽음이 휩쓸고 간 공간을 말끔히 치우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리고 아버지는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고물 속에서 희귀 금속 이트륨을 분리해 내는 꿈을. 폐허가 되어 가는 고물상의 운명에서 뽑아내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지창 씨는 이에 몰두한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고물과 고물상을 팔면서까지 지창 씨는 이트륨을 뽑아내는 기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얻어지는 것은 늘 검은 돌덩어리. 지창씨가 삶을 위해 삶을 팽개치고 집 안에 머물며 기계를 들여다보는 동안 해미는 죽은 이의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중엔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슨 과랬더라? 그래, 항공우주공학과.”

“얼마나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까.”

 

  그들은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까. 아마도 해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삶에서 보다 멀리, 멀리. 하지만 해미는 정말로 꿋꿋이 삶을 이겨내는 듯 보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묵묵히.

  세상은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쓰레기를 내놓아 환경위기가 심각한데 고물상의 운영은 어렵다니. 하긴, 그만큼 수많은 고물들이 쏟아져 나오니 고물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런데, 이 지점. 고물정리에서 유품정리사가 되는 자연스런 흐름이라는 해미의 말이 어쩐지 애달프다. 마치 인간의 죽음이 고물과도 같은 위치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인간의 삶이 죽음이 고물로 전락해버린 기분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해미의 어조가 시종일관 무덤덤하고 건조해 서린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아버지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 버렸다. 유전병이라는 허파에 바람이 드는 병. 유전병이 아닌 다음에야 해미는 허파에 바람이 들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해미는 건조한 웃음을 날린다. 일찍 세상을 알아버리고 그만큼 세상을 산 아이의 시선이 골목골목, 보이지 않는 방 안까지 스며들어 죽음의 뒷모습까지 끌어내 보여준다.


죽음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안 된다. 

여러 명의 의지가 하나의 죽음을 이끌어낸다. 

누군가의 의지와 누군가의 동의와 누군가의 묵인.

 

  이 말이 동의되는 것도 참 씁쓸한 일이다. 사람을 믿는 것은 희망을 믿기 때문일까. 믿고 의지하며 세상을 버텨내지만, 결국 믿은 이들에 대해 실망하게 될 때, 그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 그것은 죽음을 이끌어내는 의지와 동인이 된다. 더할 나위 없이 허망한 이트륨의 추출 성공. 헛웃음을 일으키는 그 소식. 이 소식 또한 뒤통수다. 삶을 더욱 잔인하게 비트는 저 것, 그것, 그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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