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상의 도서관 6
이병훈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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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랴찌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병훈 저, 한길사, 2007.12.15.


  문학에 깊이 빠져들기는 러시아문학에서 시작했다. 그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겠다고 밤을 지새우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러시아문학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러시아에 대해서도 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끼, 체호프, 뚜르게네프, 고골, 바흐찐, 푸시킨, 파스테르나크… 이들 덕분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끄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예술가를, 수많은 혁명가를, 수많은 민중을 품고 있다. 냉기가득할 것만 같은 모스끄바는 이들 생생한 인물들의 힘으로 좀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우수에 깃든 도시로 각인된다.


모스끄바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정은 거의 신성불가침에 가깝다. 모스끄바는 러시아인의 영혼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러시아 예술가들은 모스끄바를 수없이 찬양하고 숭배해왔다. 그들은 모스끄바를 러시아 영혼의 성지라고 여겨왔다.


  러시아인에게 마음의 성지이자 영혼의 고향이라는 모스끄바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가고픈 열망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대체하고 몇계절이 흘렀다. 어느 도시나 고유한 속도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러시아는 커다란 나라이고 모스끄바와 블라디보스톡의 속도는 달랐다. 같은 러시아라고 해서 모스끄바가 아닌 곳에서 모스끄바를 느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고 그것은 또한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러시아 전체에 대한, 모스끄바에 대한 책들만을 잔뜩 읽고서 블라디보스톡을 향했으니 그곳에선 레닌이 있을지언정 도스또예프스키며 똘스또이며 이런 예술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술의 자취는 묻어났다.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모스끄바를 사랑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책 속에 있다. 러시아 문학가들만 명확히 각인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러시아의 여름과 겨울에 러시아의 모스끄바와 인근을 여행하며 수많은 예술가의 흔적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만나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걸어서 멀리 이동하여 그들이 직접 살았던 장소를 찾는 여정은 그 풍광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다르다. 특히 저자는 모스끄바 내 박물관, 미술관, 인근 지역을 겨울의 풍경 속에서 거닐었다면 똘스또이가 살던 곳, 뿌쉬낀이 러시아의 파르나소스라고 불렀던 아스따피예보, 러시아 문학의 성지라고 불리는 뽈라냐, 체호프 문학이 깃든 멜리호보, 바쩨르나크의 집 등을 여름에 거닐었다.

  모스끄바 강의 여름을 느끼면서 자작나무 숲이 울창한 곳에서 길을 잃는 저자의 동선을 따라 같이 아득함을 느끼면서 러시아의 여름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은 문학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을 쫓는 여정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왜인지 러시아의 모스끄바는 가기 쉽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겹쳐져서 더 그러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득하고 깊으며 설레면서 애잔함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모스끄바의 여름과 겨울은 이렇게, 느낌이 다른가 싶으면서 이토록 러시아에서 예술가들이 탄생했고 서구에서도 많은 예술인들이 러시아, 모스끄바를 찾았던 것이 단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까 하는 물음도 들었다. 예술혼이라는 것이 자유스러울 때 절정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절정의 혼이 발현된다고 하기도 한 것 같은데. 어쨌든 러시아라는 모스끄바라는 도시가 예술가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칫하다가는 위축되기도 하겠다 싶었다. 조금만 발을 걸어도 대문호라 칭송받는 이들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기에 그들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마감될 것 같고 또 언뜻 그들과 비교하느라 마냥 위축될 수도. 아니 예술가라면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좀더 진취적으로 청출어람의 예술혼이 이루어지려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게을러진데다 겨울이라 더더욱 이불속에서 나오질 않는데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굴랴찌’라고 한다. 이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있을 수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문다고 한다. 굴랴찌! 이것은 산책하다라는 말이다. 내게도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이긴 하다. 그러다 보면 나의 정체성도 확립되어지려나. 수없이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문학으로 회귀하여 러시아문학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작가의 특성이 아무리 깃들어있다지만 나라가 가진 분위기가 글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작가에 대한 선호도를 물리치고는 여전히 문학은 러시아!라는 말이 깃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러시아의 굴랴찌 문화가 어떻게 그들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읽은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굴랴찌를 한다. 뿌쉬낀, 고골, 도스또예프스끼,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부닌의 주인공들을 보라. 예브게니 오네긴, 아까기 아까끼예비치, 라스꼴리니꼬프, 바자로프, 레빈, 아르세니예프 등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연과 교감하거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들은 길 위에 존재한다. 그들은 굴랴찌 문화의 산물이다.

 

  깊은 밤과 매서운 추위에 장편소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장편소설을 깊은 밤 내내 읽지 않았겠냐며 러시아 문학에 대해 얘기하던 때가 있었고 수긍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삼 굴랴찌를 생각하며 그 주인공들과 소설을 다시 떠올려 보니 저자가 말한 것처럼 ‘굴랴찌’ 였구나! 싶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에 아열대기후인 미국 플로리다에는 이구아나와 바다거북이 얼어서 기절하고 있는 때다. 다행인지 2018년 1월의 대한민국은 눈도 내리지 않고 강추위라고 불리기엔 미적하다. 책속으로의 굴랴찌가 아니라 진짜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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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김화영 예술기행 김화영 문학선 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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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은, 무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 김화영 예술기행, 문학동네, 2012.


  저자가 만난 성은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문이 활짝 열려지지 않을 때의 성이다. 안개가 어슴프레 끼어 있고 시선에는 보이면서도 여전히 저 멀리 물러앉아 있는 성. 관광안내 책자에서 보는 반짝반짝 빛나거나 광택이 나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을 만나온 저자의 이 책은, 성(城)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포장된, 깔끔한, 생기없는 모습이 아니라 서글프고 애잔한 모습이다. 보일듯 말듯, 울창한 나무에 가리워져 있거나 시간이 내린 빛깔의 흐름으로 흐트러져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안내하는 성을 둘러보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성의 주인들이 고개를 내밀듯하다. 어떤 이는 차한잔 해도 좋다고 기꺼이 성의 방문을 허락하고 어떤 이는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라며 눈앞에서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릴 것도 같다. 아예 성문을 굳게 닫고 문을 두드려도 내다보지 않을 곳도 있을 듯하다.

  가보지 못한 많은 성들이 가진 이야기를 저자는 들려준다. 문학에 등장하는 성, 실존 인물이 살았던 성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이 더해지고 분명 낯선 곳이지만 친숙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문학같은 문체에 한없이 빠져들다 보면 오래 시간이 쌓아올린 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더구나 저자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흥미보다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에 또 가보는 반복 속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변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자신 또한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 이외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변화와 공간의 접촉에서 여행을 실감한다고. 그렇기에 이 책을 들여다보면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낯섦과 호기심보다는 저녁밥을 지을 때쯤 동네에 피어나는 땔감의 온기처럼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하루가저물어 간다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녹아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역시나 웃긴 것이 저자가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감상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인도기행 같은 경우에는 좀더 경쾌한 발놀림과 호기심같은 게 있긴 하다. 아님 단체여행에서 오는 긴박감이거나.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프랑스의 성들을 만나 성에 살았던 주인들을 불러낸다. 성이 가진 특권일까, 살았던 사람의 이름으로 누구네 집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성만의 ‘이름’을 달고 있어서 성이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 성 모두에 인간이 살았지만 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각기 다르다. 성 자체가 품고 있는 특색 또한 달라서 성이라는 명사에 성의 이름이 곁들여지며 명백한 고유명사로서 위풍을 달리한다. 이 책을 통해서 프랑스 귀족들의 연애사를 새삼 확인했고 역시 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감각은 유효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이 서린 공간이기도 하지만 왜인이 한이 서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곳 성 하나하나는 넘쳐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파리의 또 하나의 성을 소개한다. 바로 페르 라셰즈 묘지이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고향 메닐몽탕 가에 위치한 이 묘지는 하나의 도시에 가까우며 수많은 골목길들과 늘어선 대로들이 뻗어 있다 한다. 이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 발자크, 에디트 피아프, 프루스트, 폴 엘뤼아르, 쇼팽, 뮈세, 코로, 오스카 와일드, 콜레트, 도데,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가들, 그리고 파리 코뮌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이곳에 있다. 이 무덤을 돌아보며 이 예술가들의 행적을 알아보려면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무덤이건 무덤은 그 사람 최후의 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저 돌문 뒤의 어둠, 한번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 사자(死者)의 성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 닫혀진 성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어둠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성은, 참다운 성은 그 상상과 그 짐작으로 산 사람이 짓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가장 참다운 성이다. 그 어둠 속으로 난 수많은 보도와 골목길과 지하실……다시 그 지하실 밑으로 망각의 강이 흐른다고 하던가? 


  또한 저자는 개선문과 노트르담 보바리 부인의 배경지를 찾아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비교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번역한 후의 저자가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 보바리의 삶을 풀어낼 때 소설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삶을 물리고 보바리 부인의 집, 성당, 약국 등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후손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해졌다. 그리 유쾌하거나 긍정적인 모델로이 아닌 경우에 말이다. 소문으로 인해 마을에서 쉬이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설로 인해 더더욱 강하게 굳혀져버린 가족의 일대기는 남은 자에겐 멍에일 터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플로베르나 라마라크나 빅토르 위고 모두 문장력이 탁월하기에 개선문과 노트르담과 마을을 묘사하는 필력이 남다르기에 그들이 소설속에서 그린 언어로 이 건물을 마을을 보는 기분은 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게 되는 맛이 있다. 눈으로 머물러 말을 잊었을 지 모를 곳이 어쩌면 말로써도 그려진달까.

  동화속에서 공주들이 살았을 성 아니면 유령이 나왔을 성으로만 굳혀졌을 성이 실존인물의 희노애락의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재정립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살던 성의 모습은 위셰 성이 모델이고 레오나르도가 생의 마지막을 머물다가 간 곳은 프랑스의 클로 뤼셰 성이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집이었던 성, 권력자의 애인이었던 이가 머물렀던 성은 관광지가 되어 있다. 일정한 시간에 문을 열어 휘익 둘러보아야 하는 시간을 허락한다. 당연히 그 옛날의 삶이야 느껴볼 시간은 내 마음속에서 정해야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저자는 그곳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을 뿐이고 그곳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일이다. 역시나,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찾아가고프다. 관광지이니 더 찾아가기 쉬울 것임은 분명한데도 아직은 시간으로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과 소설들과 인물들의 생애를 더욱 알고난 후에야 그 공간을 찾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냥 보고프다는 느낌이 있을 때 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터질 것 같은 방랑의 마음을 책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역시 돈과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요건 외에도 기질의 힘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에 일주일 동안 가본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쓴다. 한달 동안 가본 사람은 글을 한편 쓴다. 일년 동안 가본 사람은 중국에 대해 남이 물어보아야만 겨우 대답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중국에 살다 온 사람은 그저 미소짓기만 한다.


   여러 해 프랑스에 살아 돈 사람처럼 그저 미소짓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프랑스에 가보지 않은 채로 리뷰 하나를 썼다. 그럼, 한달 가본 사람처럼 군건가. 정말로 이 책에서 이야기한 성들을 쫒아다니다가 많은 예술가들을 떠올리다 보면 책한권의 얘기는 거뜬히 나옴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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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모르고 살았을까

 

그림자 여행 : 내가 꿈꾸는 강인함, 정여울 저, 이승원 사진, 추수밭, 2015.

 

  

  50편의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펼쳐진 에세이다. 사진과 이야기는 그림자를 달고 있다. 이야기는 문학비평가 정여울의 시선으로 사진은 작가 이승원이 시선이 담겼다. 사진은 아련한 느낌이 드는 풍경과 인물들 위주다. 이국의 모습.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을 보면서 아련함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련함이란 경험의 측면에서 그리움을 동반한 느낌일 터인데,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다니. 이 책속 사진과 글들이 그런 아련함으로 내내 따라다녔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 그림자가, 보기 좋았다.

   <그림자 여행>이라는 책제목의 부제는 ‘내가 꿈꾸는 강인함’이다. 그림자 여행도 여행일테니 여행속에서 맞이하는 감상의 글인가 했다. 결국 이것은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길고 깊고 멀다. 그림자를 마주하는 여행의 본질적인 목적이 ‘나를 알기’ 나도 모르는 트라우마를 걷어내기인 것처럼 강인함을 외치는 이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것일까.

   여기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모습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로서의 삶과 글쓰기와 독서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살아가면서 받게 된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문득 ‘내가 그랬구나’ ‘나는 그렇다’라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나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것은 굳어 온 습관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자 변하고픈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이는’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보이려는’ 모습이 따로 있다. ‘보여야 하는’ 부분만 보인다. 그 외의 것은 꼬옥 숨겨둔 채 더욱 더 깊이 처박아 두게 된다. 사회에서 우리는 길들여지고 만들어진 나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더러 그것이 ‘나’인 양 지내다가 하릴없는 무기력과 슬픔과 좌절을 경험하고서는 묻는다. 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지?

 

어떤 뼈아픈 자극 없이는, 사람들은 좀처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질문할수록 아프다는 것을, 그 아픔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자기 영혼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때에야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스스로 묻어 두고 밟아 두었던 수많은 나날들의 내 모습이 감정이 구겨지고 헝클어져 곪은 상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수면 위로 올라와 더욱 큰 상처를 만들어 가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주 오랜 시간, 아주 자잘해 보이던, 심지어 하찮아 보이던 작은 선택들이 천천히 만들어온 나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나를 만든 것은 어떤 ‘굵직 굵직한 순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식하게 된다.

 

   나를 안다는 것, 나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 고통을 동반한 것이듯 그 결과 또한 고통이 소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그림자. 그것을 마주하고 그 그림자를 끌어안을 때에야 비로소 나에 대해서 알았다고, 나에 대한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자를 찾는 일도 그림자를 끌어안는 일도 힘겨운 일이기에 많은 나날 외면해 왔던 것이라면 생은 그림자를 알아도 그림자를 외면해도 늘 고통과 상처에 놓인 존재가 된다. 조금 더 편안하게 이 상처를 마주하고 상처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런 길도 있음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오직 달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오래전 칠흑 같은 밤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캄캄한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꽃들의 사생활을 목격했다. 달빛 아래 고요히 드러난 처연한 낙화의 풍경은 할로겐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 보다 더 눈부셨다. 그때 나는 눈을 아프게 하는 압도적인 불빛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본래의 빛깔을 끌어내는 '어둠속의 빛'을 보는 법을 배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어엿한 빛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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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사카이 준코, 바다출판사, 2016.

 

  편견이 분명 있긴 하다. 일본 작가의 작품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도 아주 맘에 드는 작품도 없다는 것은 자꾸 나도 모르게 ‘일본풍’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일본풍이 뭔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나면 역시나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문체나 분위기가 유사한 것 같고 이상하게 밝고 경쾌함, 유머와 위트보다는 퇴폐미를 더 느끼게 된다. 시작이야 열린 자세로 읽지만 수렴되는 결과를 보건대, 나의 편견이 너무 깊숙한 건가. 내 취향에 맞는 책을 못 만난 건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제목에서 느낀 위트는 책을 읽어가면서 사라졌다. 심지어는 중년이 처음이 아닌 사람이 어딨어, 라는 회의적인 멘트로 마감을 하고 만다. 중년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 문제의식, 일본 사회의 관점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사라지고 딱히 통찰적이지 않은 반복된 수다를 들은 기분이 되었다.

  중년. 우리나라에서는 마흔의 나이라고 해야 하나. 마흔에 관한 흔들림과 반성과 의지와 성찰에 관한 글들이 원체 많으니 비교가 되는데, 그러고 보면 이미 마흔에 관한 사회학적인 통찰과 개인의 경험에 대한 글에 대해선 익숙했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바가 전혀 신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40대의 생각들.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중년이라는 자각을 강박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으로 그 주제를 다루다 보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열렬한 동조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이 냉소적이고 뜨뜨미지근한 반응을 얻자고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막상 나이가 들면 씁쓸함과 비애가 일상생활마다 마다 묻어나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읽다 보니 외모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비중이 상당히 많다. 그렇기에 너무 단순한 패턴으로 읽혀지나 보다. 개인의 방황과 고뇌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할지언정 낯섦을 느낄 터인데 그저 마흔의 나이는 이십대와는 다른 피부, 거죽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나열하며 아름다움이라는 외모로 인해 우울과 고뇌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자주 피력하니 동조가 잘 안된다. (아니, 이건 난 아직 거죽이 많이 변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인가…)

  인생 100세 시대는 70세 시대와는 다른 중년이란 나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당연, 공감한다. 하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중년기의 모습은 새로운 인식의 변화와는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몇 살이 되어도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인정할 수 없는 중년 여성들이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추함과 불안함. 그것은 90세 인생시대에 중년을 맞이한 버블 세대들이 내뿜는 새로운 분비물이다. 미마녀들은 그런 분비물 따위 본인한테는 없다는 듯 상쾌하게 웃고 있지만, 내 손끝에서는 그 끈적이고 진득한 분비물이 확실히 느껴진다. p15


  이 책은 중년의 경험담인데 중년 중에서도 아줌마라는 자각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가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작가 역시도 ‘난 아줌마와는 달라’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그래, 미혼이라고 하니 ‘아줌마’라고 불리는데 억울함이 있겠지.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도 제3의 성이라 불리는 ‘아줌마’라는 개념과 특성의 명명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에 반한 “미마녀”라는 명명이 생겨난 것일 게다.

  하긴 작가는 중년기 변화의 핵심을 지속적으로 외모의 변화로 바라보니까 해결책도 그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중년이라는 나이의 외모를 이십대와 비교하며 아줌마임을 거부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니까 추함과 불안함이 나온다는 것이 작가의 문제인식이니까. 시든, 노화가 진행되는 몸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중년기를 지나 노년기까지의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안정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이 책은 중년에 대한 어떤 통찰과 선언의 글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미마녀”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동정과 질투섞인 조롱같기도 하다.

  어중간한 나이. 그렇게 보이긴 한다. 청춘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어중간함. 다시 생각하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중년이라는 이미지를 한꺼번에 만들어내려는 시도만 없다면 지금의 중년은, 풍요로운 시대에 풍부한 교육과 다양한 취미를 경험한 세대답게 개개인 얼마나 다른 가치와 이미지를 창출하는 존재들인지. 적당히 안정적이고 적당히 건강한 상태로 여전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나이이기도 한. 그런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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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웁게 훌쩍

 

여행자의 인문학-21명의 예술가와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

문갑식, 이서현 (사진), 다산3.0 | 2016-01-25.

 

    이런 여행이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잠깐, 이런 여행? 아니 이런 장소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행을 생각했지만 준비부족이랄까, 딱히 인문학적인 여행은 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기인 연휴에 끼어 부랴부랴 여행을 다녀왔는데 첫 강렬한 인상은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황금연휴기간답게 공항 인파는 많았고 비행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행기 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서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좌석을 찾아 들어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당연 소란스러웠고 선반에 짐을 싣는 소리들이 굉장했다. 가만, 이제 여행의 출발인데 짐을 싣는 소리라니. 부스럭 부스럭. 비행기를 꽉 채운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 모두의 손엔 면세점 쇼핑백이 한가득 했다. 선반 위로 올라가는 짐은 이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손에 들린 면세품이었다. 나는 이 광경에 놀랐는데, 마치 면세품을 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행이 휴식이라면 여행지에서 만큼은 편안함을 즐겨야 하는데 인문학을 붙들고 있느냐 하겠지만 저자의 여행만큼 편안해 보이는 휴식은 없어 보인다. 장소가 주는 마음의 편안함일 것이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가 아니라 고즈넉함과 여백이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긴장이 누그러지는 그런 느낌들 말이다. 문학속에서 또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보며 상상의 나래와 비교하는 맛 또한 추가되니 일석이조다. 저자는 그런 여행의 기록을 담아 <여행자의 인문학>을 썼다.

   예술가들과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의 흔적이 있는 유럽의 스무 곳. 저자는 가는 곳에서 그들을 떠올리고, 아니 그들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간다. 이미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그렇게 조성해 놓은 곳도 있고 유달리 한국인의 방문이 잦다는 곳도 있다. 어쨌든 낯선 곳임에도 낯설지 않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곳, 작가들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는 기분은 좀 더 들뜨게 되는 모양이다.

 

고원에는 히스꽃과 잡초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입니다. 죽어서야 함께 할 수 있었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유령이 못다 한 사랑을 속삭이며 지금도 벌판을 떠돌아다닐 것만 같습니다. p15~18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요크셔의 황량한 들판마저도 인상적이니만큼 어쩌면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베아트릭스 포터의 유언처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땅에 대한 욕구일지도.

   “자연 그대로 이 땅을 잘 보존해달라.”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예술가들의 생가나 문학관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럽의 그것에 비해 부족하고 미흡해 보인다. 각 지자체의 관광 사업 수단쯤 여기는 행태도 보이고 그저 보여주기식으로만 건립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경외나 배려가 찾아보기 힘든 성장에 급급한 나라에서 살아온 터라고 이해하려 해도 씁쓸하다. 하긴 예술가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나 만드는 나라이니만큼 뭘 기대하겠는가.

 

우리가 근대화한다며 모든 걸 싹 밀어버릴 때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가 걷던 워더링 하이츠 가는 길 돌담에 이끼가 낄 때까지 기다렸으며, 우리가 눈 돌리면 잊는 사이버 잡담에 한눈팔 때 종이신문을 들췄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셜록 홈스와 스크루지와 햄릿과 피터 래빗과 해리 포터다. p58

 

  책 한 권에 스무 곳의 여행지를 돌아보고 관련 지역의 예술가의 생애나 작품들 에피소드, 감상들을 엮으니만큼 각 지역과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소개 정도로 짧다. 조금 가볍게 예술가들에 대해 맛볼 수 있는 정도랄까. 그 감상에 더해 작가나 지역에 대한 매력과 궁금함이 일면 더 깊이 그곳에 대해, 예술가들에 대해 알이 위해 다른 책을 들척여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예술기행으로서 가벼운 산책정도의 느낌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긴 연휴가 끝났는데도 사방 벽들을 보며 벌써부터 너른 들판이 그리워진다. 역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한 휴식이 필요한 나날인 모양이다. 그래도 쉬는 것 같지 않은 휴식을 맞이하지도 불편한 일상에 허덕이지 않아도 될 나날들이 될 거라는 기대감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근원적인 분노와 답답함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가벼웁게 살짝. 그동안 눌렸던 답답함을 조금은 버려도 좋으려나. 


나의 날들을 줄곧 따라다니는 저 샘물 소리. 샘들은 햇빛 밝은 맑은 들판을 거쳐 와 내 주위에서 흐른다. 이윽고 내게 더 가까운 곳으로 와서 흐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소리를 내 안에 갖게 되리라. 마음속의 그 샘, 그 샘물소리는 나의 모든 생각들과 함께 흐르리라. 그것은 망각이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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