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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더라도 핀란드까지!


 

박정석,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동네 미장원도 일년 넘게 못 가고 있는데 핀란드에 간다니.“

   게으른 자는 여행 또한 귀찮음으로 인식한다. 작가의 저 말이 와 닿는 속에 책 속의 사진은 나룻배가 놓인 호숫가를 보여준다. 냉큼 이런 나룻배가 있는 풍경은 창녕의 우포늪이랑 비슷하네라며 핀란드, 해외를 국내의 풍경과 일치시키는 기술을 구사한다. 하지만 점점 다른 나라의 모습을 국내의 지역으로 대치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게으른 자가 국내라고 발빠르게 움직이길 했겠는가. 사진 속 북유럽, 핀란드의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습기가 쫙 빠진 상쾌함이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난 뒤 따르는 알싸한 쾌감이 뒤따른다.

   북유럽에 대한 동경, 핀란드에 대한 동경을 떠나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라는 제목이 맘에 들었다. 여행이란 들뜨는 일이기도 하고 야심차게 준비했다 한들 기력이 쇠해지기도 하며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으며 정신이 뭉개지기도 하니까. 생각하고 기대했던 만큼 즐겁지 않다면 일정에 치이게 되면 어느덧 일상처럼 화가 차오를 터이니, 현실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여행이란 뒤돌아 그 기억을 감상하는 것이다 보니 좋은 것들을 취사선택하지만 막상 그날을 겪고 있는 중엔 짜증나는 요소도 곳곳에 발견하게 될테다. 그래서 작가는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갔나? 작가가 핀란드까지 가는 여정에 화가 나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작가는 “동물로 태어난 생명의, 소위 식물화 현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무기력과 게으름으로 퇴행하며 지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조언 중 여행을 떠나라는 충고를 새겨듣는다. 당장은 귀찮고 싫고 무서웠지만 결국 여행을 떠나게 된 작가는 핀란드를 선택한다. 끌리지 않음에도 핀란드를 선택한 건 안하던 것을 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두려움의 근원을 밝히는 여행, 편견을 극복하고 취향을 넓히고자, 그렇게 핀란드는 작가에게 선택되었다.

   귀차니즘의 절정에 있었음에도 핀란드로 가기 위한 작가의 여정은 핀란드와 대척점에 있는 터키에서 시작한다.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발트3국을 지나 핀란드에 도달하는 2,300km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에서 작가가 결심하는 것. 절대, 화내지 말 것.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은 작가의 이 여행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무살 시절의 여행가였으니까. 그래서 이 여행기는 장소는 다르지만 지난 스무살 시절의 여행의 기억과 동반한다. 그 시절의 여행은 여행초보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힘찬 발걸음으로 달리는 여행이었다. 작가는 명소와 가이드북에 의지하며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안달하는 여행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여행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기 때문인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핀란드를 향하는 이 여행에서 작가는 전과 다른 느낌들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영화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고 소설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이 여행기에서 나타나는 듯하다. 이 여행기는 조금은 수다스런 기분이 들기도 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여행을 떠나는 시작에서도 그렇듯이 사람들과의 대화가 자주 등장하면서 핀란드의 모습들을 전하는 것이 이 여행기의 특징인 듯하다.

  어느 여행이 그렇듯이 여행기 속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과의 만남과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전달받고 의미를 되새긴다. 여행의 모든 장소가 감탄할 곳은 아니다 보니 몸이 지쳐갈 때면 스피드하게 국경을 넣고 경유지를 지나치며 모든 것을 ‘핀란드’에 집중한 이 여행기의 절정은 역시 핀란드이다. 많은 이들이 북유럽에서 보기를 기대하는 백야와 호숫가의 풍경들. 그것들과 마주하는 작가의 심정이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매우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여행은 핀란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와 다시 기억하는 순간을 맞는다. 사람들과 마주쳤던 기억과 황홀함에 빠졌던 장소에 대한 기억들은 작가가 맞닥뜨린 소중함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이 같은 여정을 떠난대 해도 내게 닥칠 기억은 아니다. 어디어디에서 누구는 이런 경험을 했다던데는 특정한 물건을 판매하는 이들의 서비스 자세에서나 똑같이 반복될 것이고. 작가가 말하듯 그 때 그 장소에서 스쳤던 바람소리, 사람들과의 만남은 온전히 작가의 것이다.


그 나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 않은 소소한 것들, 설명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것들, 직접 가서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몇 가지다. 글이나 사진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눈과 귀, 피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들.

바싹 말라 보기보다 아주 쉽게 불이 붙고 놀랄 만큼 화력이 세던 자작나무 장작.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빛은 물론 잔잔한 정도 또한 하늘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던 호수와 물풀, 들꽃, 덤불. 하늘을 향해 똑바로 뻗은 채 가느다란 가지에 앙증맞은 초록 잎사귀를 가득 달고 있던 하얀 숲. 평화 속에 어쩐지 우울함이 느껴지는 도시의 인적 드문 거리. 언제 들어가도 붐비는 일이 절대 없던 슈퍼마켓. 한밤중에도 파르스름하게 빛나던 청색 하늘. 아무리 어려운 질문이라고 해도 술술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던 젊은이들. p363~364


   한 사람의 여행의 기억도 이토록 변화무쌍할진대 사람들마다마다의 여행의 경험은 얼마나 다채로울까. 이토록 여행기가 넘쳐나는 것 역시 그 경험을 잊지 못하는 이들의 감흥이 발산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여행기를 보는 사람들도 같은 장소를 여행했다는 데 것뿐만 아니라 내가 그곳에서 경험치 못한 것에 대한 공유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경험을 내 피부로 느끼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서도 여행이란 쉽게 훅, 떠나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여행사를 통한 잠시의 관광이 아닌, 걷고 걷고 또 걸으며 몇 달에 걸친 여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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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방향


 김남희・쓰지 신이치,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 - 삶의 속도를 선택한 사람들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그곳에서 느끼는 감흥의 기록이다. 평화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통해 만나게 된 한국의 여행작가 김남희와 일본의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는 국적과 성별과 나이를 떠난 교류를 통해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우정의 한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이 관심을 품고 있는 주제에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이기도 하다. 함께, 동일한 시간의 여행이 아니라 동일한 장소에 대한 기억이 흐르는 기록이다. 두 사람은 부탄과 일본의 홋카이도와 나라, 한국의 강원도와 안동과 제주도와 지리산을 여행했고 그곳에서 느꼈던 생각들을 나눈다. 같은 곳에서 느끼는 두 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질문들이 담겨 있다.

  쓰지 신이치는 슬로 라이프 개념을 제안한 학자로서 이들 두 사람의 여행에선 책제목처럼 삶의 속도와 행복의 방향이라는 이미지를 계속 상기시킨다. 여행을 떠나는 발걸음처럼 조용히 뒤따르는 행복이란 의미는 여행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통과해 더욱 확고히 다져진다. 이들의 지향점이 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기에 어쩌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상가능하기도 하지만 여행 속에서 맞닥뜨리는 생각들의 잘 정리되어 나아가는 풍경을 글로써 만나는 감흥도 새롭다. 여기에 두 사람의 글의 차이가 확연하기에 스승과 제자의 문답같은 느낌도 더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에 관한 정의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다.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지난 십 년간 세계를 떠돌며 살아온 내게 여행은 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다. 내가 쌓아온 성 바깥으로 나가 그 성을 균열시키고 흔드는 만남에 나를 내맡기기. 그런 만남을 통해 새롭고 긍정적인 기운을 내 안에 가득 채우기. 그렇게 돌아와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게 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자 바람이었다.p8


  김남희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견고한 성을 굳이 균열시키려는 노력은 더욱 더 확고한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갇혀 있지 않고 수용하면서 바람직한 생각들로 내 성을 더욱 견고히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작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값을 몽땅 빼내 여행을 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여행을 통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쓰지 신이치의 권유로 가게 된 부탄에서부터 행복에 대한 의미를 되새긴다. 작은 나라이며 물자가 풍부하지 않지만 행복한 나라라고 거침없이 꼽는 쓰지 신이치의 말에 그 행복의 느낌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래 얼마나?”라는 꼬인 심정으로 부탄을 향했다는 작가. 마치 반대의 반대를 하듯 계속 부탄의 행복에 대해 의문을 거는 작가의 심경은 어떻게 달라질까.

   

“나는 그 ‘선택의 자유’라는 말을 별로 믿지 않아. 우리가 정말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 도대체 뭘 선택할 수 있는 거지?”

“저한테 행복이란 일상의 작은 것들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평화와 만족 같은 거예요. 오늘 내가 뭘 입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입을 옷을 고르는 일에서도 행복을 느끼니까요. 부탄은 그런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거잖아요.”

“규제가 없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아. 규제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고. 무엇을 규제하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행복해지는데 옷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그래도 전 전체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사고가 싫어요.”

“모든 사회는 집단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야. 개발이나 성장이라는 이름 안에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고.” p29


  선택의 자유를 중요시 여기던 작가는 부탄을 여행하고 그곳의 삶을 체험하면서 소비하는 삶에 대해 일과 놀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도. 물질적 성공이 아니라 나눔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관계맺음의 기술 또한 행복한 조건이라 생각해본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점점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점점 신이치 선생님의 말들과 겹쳐간다.

  여행을 하게 되면 느끼게 되는, 아니 일상을 살다 보면 느끼게 되는 회의감들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다 보면 전환적인 생각으로 전개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어도 타인의 여행의 기록을 통해 이러한 마음을, 느낌을 전달받게 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 안에 일상이라는 평범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몇 년 전부터 휩쓸었던 슬로 라이프의 삶은 우리나라에 와서는 그저 걷기와 웰빙 먹거리 열풍으로 이어진 느낌이었다. 이것이 함께, 다같이 살아가기가 전제된 삶의 여유와 행복의 다른 이름일 터인데 빨리빨리 문화가 슬로 라이프의 삶을 수용하는 방식은 자본을 벗어나지 못한 방식일까 생각했었다. 소비와 소유의 문화가 여전한 삶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다. 나 혼자만 그렇지 않게 살아가기라 애쓴다 한들, 환경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가능할 리 없다.

  삶의 속도와 행복의 방향이 모두에게 같을 필요가 없음에도 한국적 삶은 그 라인을 너무나 친절하게 제시하여 주는 까닭에 이 라인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할 때면 힘이 든다. 그렇다고 그 방향대로 산다는 것 또한 지독한 허기를 안겨 준다. 두 작가들이 여행한 곳은 다수가 권위가 제시한 라인에 비켜가 있는 삶의 모습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소비와 소유에서 비켜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가치를 품고 실천하며 사는 이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행복의 방향을 정립하기까지 그들에게도 흔들림과 실패의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삶은 견고해졌고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방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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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따라가면 안되나여?


오소희,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라오스편


 동남아시아 라오스에 발을 디딘 작가와 아이는 팍세에서 시작해 푸앙 프라방까지 북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라오스는 특별히 유명한 건물과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 아니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여행이란 관광과 더불어 휴식도 있으니 익숙하게 보게 되는 건물들보다 자연 속으로 향하는 마음들이 가득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 또한 라오스에서 라오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시작한다. 팍세의 자연은 배경으로 두고 팍세에 사는 사람, 참파삭에서 만난 사람, 비엔티안에서 만난 누군가들. 그렇게 라오스에 살고 있는 이들. 어쩌면 지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라오스의 자연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으로 뭉뚱그러져 보이기에 그곳의 사람들이 더 각인되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라오스를 방문한 것은 2006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처음 머문 곳이 남쪽의 팍세. 하지만 이곳에서 익숙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그리고 아이는 팍세의 공원에서 축구공을 차며 그곳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논다. 처음엔 머뭇거리지만 힘차게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어른들 역시도 놀고 싶을 만큼의 기운들이 아이들에게서 넘쳐난다. 밤이 되어서도 공원에 있는 그 아이들은 노숙생활을 하는 고아들이었다. 작가는 먹을 것과 옷들을 아이들에게 해주지만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들은 야유가 떠나지 않는다. 아이들 역시도 경계와 주눅든 모습이 가득하다.


    거지의 정의가 ‘일하지 않고 구걸하여 연명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른 거지가 있을 수는 있어도 어린이 거지가 있을 수는 없다.

    아이들은 일하지 않고 또 구걸하지 않고

    어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의 결핍이 곧 자신들을 향한 수치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채

    쇼핑센터 주변의 어른들은 낄낄대고 있었다. p26


  작가는 우연히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눠주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결국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떠난 엄마로서 이 아이들의 모습이 가슴에 깊게 새겨졌을 것이다. 그러며 생각한다. “비록 여행중이라 해도 지루한 일상 중이라 해도 바쁘더라도 가진 것이 넉넉지 않다 해도 ‘언제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숙이 선의를 가지고 관여할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p31)을”.

  팍세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다르게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저 외국인 호구가 얼마만큼이나 아이들에게 하나 보자라는 듯한. 반대의 상황이라면 이들도 낯선 여행지에서 굶주리고 외로운 아이들을 위해 선의의 시선을 가지지는 않을까. 헤어지는 날 아쉬운 눈빛을 보내는 그 아이들은 또다시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곳에서 익숙하게 받아야만 하는 시선을 참고 견디며 아이들은 기억 속에서 저들에게 따스한 위안을 주던 두 여행객을 기억하며 살아가겠지.

  라오스 첫 여행지의 기억은 그래서인지 보는 이에게도 먹먹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라오스의 여행에서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소제목 역시 ‘사람을 만나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작가가 느낀 라오스인들은 전반적으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향이다. 그들이 4시에 만날 약속을 한다는 건 4시부터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는 뜻이라고. 아무도 미리 준비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고.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걱정도 없지요.” 그들은 또한 묘비명을 쓰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란 글로써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존재”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장하지 않고 느리고 잔잔하다고 작가는 표현한다.


그것이 여행의 힘이겠지요. 여행이란, 의도적으로 길을 잃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행위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이들의 불우함으로부터 당신의 자리가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친다면 여행의 힘은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당신보다 양적으로 더 우월한 자들은 세상의 저편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들의 존재가 쉽게 당신을 일으켜 세웠듯 그들의 존재는 또 쉽게 당신을 넘어뜨리겠지요. 당신의 질문은 그 너머에 있어야 해요. 내 삶은 어찌하여 훨씬 더 나은 조건 속에서도 초조해 하는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는가. 쉽게 지치고 자신과 불화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에요. 진정한 여행의 힘, 그것이 주는 깨달음이란, 떠나 있을 동안만 당신을 부축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당신을 부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해요. p173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여행자에게는 항상 그 낯선 느낌으로 내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작가가 만난 사람들을 내가 만난 듯 그들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며 라오스를 횡단하다 보면 팍세에서 만난 그 아이들처럼 작가에게 이런 말을 건네게 될 것도 같다. “내가 당신을 따라가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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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일 수 있는 방법


오소희,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이 여행의 기록이 터키라는 건 부수적인 것 같다. 터키라는 나라는 동서양의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도시로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물론 전적으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글이 아니라 여행에 대한 에세이기에 터키라는 도시는 여행을 떠난 작가의 감흥을 불러 일으켜주는 소재가 될 뿐이기도 할 것이다. 그 특유의 느낌과 기억을 제공해 주는 것. 그래서 작가는 터키라는 나라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고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내가 행해볼 여행지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오소희 작가는 많은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을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의 꿈을 심어준 작가이자 현재는 동화작가로 그 영역을 넓혀 글을 쓰고 있다.

  작가의 여행기가 책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은 ‘터키’라는 장소에 대한 매혹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책이 첫 출간되었을 시기에도 여전히 ‘여행’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꿈이자 매혹이었으니까. 또한 터키 역시 대표적인 여행지로서 각광받는 곳이니까.

  여행기에서 장소가 부수적이 되는 것은 이 책이 여행을 한 ‘사람’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에 대해 많은 반응이 인 것은 감성적인 문체와 더불어 어린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 엄마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직 어릴 뿐인 아이는, 한국말조차 서투를 듯한 아이는 낯선 땅으로의 여행에 엄마와 동참하고 때로는 엄마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세 살 아이는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잖은가.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강렬한 자극제가 됨과 동시에 희망과 열망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이 말투는 희망적인 뉘앙스이지만 또한 비관적인 뉘앙스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이 글을 읽으며 엄마들은 희망을 꿈꾸었을까, 체념을 되새김했을까.

  여행을 좋아하여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여행을 두루 다녔다는 작가는 아이가 태어나서도 그 여행의 기억을 잊지 못해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을 선택한다. 어쩌다 한번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리다시피 하는 이 삶에 대해 사람들이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고 말한다.  “좋으니까요.”

  어쩌면 혼자서 하는 여행과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해야 하는 것과 해야 할 것과 생각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남과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도 만나는 여행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아이는 칭얼되지 않으며 엄마의 여행의 방식에 함께 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또한 작가 역시 낯선 이들과 부대끼면서 그 속에 아이를 둠으로써 한발짝 관조적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도 하며 ‘내 나라’에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일깨운다.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다.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p45


  여행이 가져다주는 매력은 그것일 것이다. ‘일상’이라는 잣대에서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생각들을 얻는 것. 그것은 감사한 일이며 어떻든 성장하는 일이다. 작가가 혼자서 하는 여행과 자신의 아들과 하는 여행의 차이는 무얼까. 아이 때문에 여행을 가지 못하는 ‘엄마’가 있고 아이를 위해 ‘여행’을 하는 엄마가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아마도 조금이나마 누군가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그것을 ‘엄마’의 문제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되면 ‘나’는 잠재워야 한다는 사고, 문화의 영향일지 모른다. 작가가 말하는 대로 “좋으니까요”.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방식이 내가 좋은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삶은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경험의 수와 폭이 많을수록 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아침’이란 어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서울에서의 아침이란, 오로지 바쁨과 서두름 속으로 나를 채찍질하는 시계의 분침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아침은 눈과 코와 귀로 음미되고 스며드는 어떤 것이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것에 대해, 위대한 우주가 내게 또 한 번 손길을 내밀어준 것에 대해 저절로 마음으로부터 경배를 올리게 되는 정결한 순간인 것이다. 그 자애로운 우주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인간이 펼쳐놓은 잡다한 그물에 얽혀 허우적거리고 마냥 조바심냈던 나날들이 부끄러워진다. p210


  누군가의 눈엔 한없이 이기적인 엄마이자 생각이 모자란 엄마로 비쳐질 수도 있고 마냥 행복한 이의 가진 자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래서 어쨌든 이 작가에 대해서 이 글에 대해서 부러움과 시기가 공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어 우리 역시 선택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삶의 방식은 내 것이지만 우리는 그 방식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다. 여행 역시도 타인의 여행의 기록을 통해 내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마침 이 ‘엄마’의 여행의 선택에 대한 답변이듯 터키에서 만난 노부부의 삶에서 작가의 대답을 얻는다.


한 터키인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이기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꿈은 이기적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꿈이라는 것의 속성이 현실을 배반하기 때문에, 꿈꾸는 자를 얽어매고 있는 지독한 현실(생계나 가족 같은)에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 꿈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회가 남지 않는 것만이 더 나은 것일 것이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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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일까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이 책의 글 하나하나를 써나간 자는 연암 박지원이다. 그러나 18세기 연암의 문체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고 책의 전체적인 뼈대를 정리한 것은 편역자이다. 물론 그에 앞서 연암의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은 연암의 자제들이다. 따라서 글, 문장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연암에 대한 감상이겠지만 책이라는 틀에 대한 논의는 글들을 정리하고 뼈대를 세운 편역자들에 대한 당부이다. 

  열하일기는 6개월의 여행의 기록이다.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에 따라 글을 적고 있다. 가는 여정에 따라 제목을 붙여 총 7편으로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어떤 기록에는 서장을 첨부하여 그에 대한 부언을 첨부하고 있다. 

  장소를 이동하는 여정 속에서 연암은 생활과 풍경에 대한 묘사와 감흥에서 나아가 그곳에서 만남 사람들과의 필담, 청나라 문물에 대한 묘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일기에 적은 것 이외에 따로 좀 더 자세한 글들을 정리하고 있으며 일기에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연암이 쓴 글들이 일기와 맞물려 읽고 싶은데 편역자들이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일기 속에 언급한 이야기들을 연결되도록 구성하여 흐름이 끊이지 않도록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내가 연암이라 6개월 간의 여정을 일기로 쓴다면 어떤 방식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날 그날 겪은 일들에 대한 감상을 나열할까. 아니면 뚜렷한 목적을 가진 내용을 다룰까. 연암의 일기는 비교적 연암처럼 그 당시 생경한 경험을 여행기 속에 기록하되 보다 청의 문물에 대한 묘사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주된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좋은 방식으로 보인다. 사실, 감흥이란 그 장소에서 그 때에서야 느낀 감정일 수 있으나 되돌아 보면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기의 기록은 감상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그 나라와 생활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이뤄지는 형태가 와 닿는다.


  연암의 문체는 읽으면 읽을수록 빨려가는 듯하다. 그리하여 어느 한 구절만을 달랑 뽑아낼 수 없다. 그리하여 벽돌에 대한 묘사이든, 수레에 대한 의견이든, 그 논쟁적으로 접근하는 글귀에도 문장 전체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여행기로서 중국 문화와 습속에 대한 묘사 이외에도 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연암 자신의 마음들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여행기에 대해서는 한편으론 감상적이 되기도 하여 호곡장에 대한 서술, 도와 경계 사이의 대화, 아홉 번 강을 건너며 보고 느끼는 감상이 기억에 남겨진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거니와 나 또한 어느 곳 어디에선가 깊은 깨달음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감정이라 쉬이 감정이입이 되어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몇 구절을 뽑아서 실어본다면 막북행정록에서의 이별에 대한 묘사와 다음의 묘사가 생각난다. 아마도 이 부분은 글보다는 분위기가 자아내는 느낌 탓에 기억이 더 날 터였다. 밤에 홀로 성 밑에 앉아, 별빛 아래서 먹을 갈아 글을 쓰고 보자니, 먹을 갈 물이 없어 술통의 물을 부어 글을 쓰는 그 상황에 눈 앞에 그려지면서 웃음과 또한 애잔함이 묻어난다.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행장을 넣은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 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 막북행정록 -


 또한, 연암 스스로 도를 알았다고 서술한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편은 그 상황과 맞물려 글에서 자아내는 느낌과 글이 좋게 다가온다.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으니까 위험을 직접 보며 벌벌 떠느라 그 눈이 근심을 불러온다. 그러니 어찌 귀에 들리는 게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한밤중에 강을 건너느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 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 깊고 지극한 마음) 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밝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열하일기를 읽는 순간부터 처음에 맞닥뜨린 건 이질감이었다. 현대적 언어에 익숙하다 할지라도 당연 18세기의 저서를 읽으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18세기의 그 느낌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나는 너무도 평탄하게 글을 읽고 있었다. 순간 지금 이 글이 연암의 문체가 맞는가, 얼마만큼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되었는가, 이런 것이 생각나면서 읽어보지도 못하겠지만 연암이 쓴 문장 자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 책의 대상이 청소년들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 필요해라는 어이없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낯선 시간의 기록을 진입하는 과정에서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시대의 기록을 위한 사전 배경 설명이 있다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만화 속 캐릭터 같이 사행단 멤버들의 성격과 행동을 서두에서부터 명확하게 명시해 본문 속에서 그들의 관계와 특징을 찾아가는 묘미를 상쇄시키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굳이 친절한 안내로서 등장인물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이 부분은 삭제되어도 무방하다고 보지만) 하권에 연암의 일기가 끝난 뒤에 배치하였으면 한다.

  본문 중에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되게끔 삽화와 부연 설명을 통해 내용의 이해를 덧붙여 주고 있는 점은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매우 편한 부분이다. 그러나 본문의 많은 삽화와 부연 설명이 있는 것에 비해 전체적인 부연 설명,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부가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당시의 시대가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큼 당시 조선시대의 분위기와 더불어 국외, 서양의 상황은 어떠했는가라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박지원의 일기와 글들에 대한 이해도 전체적인 견지에서 어울려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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