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우스 범우희곡선 6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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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셰퍼는 1926년 5월, 영국 리버풀에서 앤소니의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다. 런던 세인트 폴스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3년간 광부 생활을 한 후에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다고 했으니 여유 있는 가정은 아니었겠다. 졸업 후에 쌍둥이 형제 안소니와 합작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단박에 저 소련의 스트루가츠키 형제를 떠올리는 대목이지만, 셰퍼 형제는 그들과 달리 합작 작업을 한 5년 만에 끝내고 각자 독립적으로 희곡과 소설을 쓰게 된다. 앤소니는 희곡 <탐정>을 써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도 하지만, 피터가 <5중주>와 공전의 히트상품 <에쿠우스>를 발표해 훨씬 유명세를 탄다.
  <에쿠우스>는 1973년 여름에 영국 런던 올드빅에서 국립극단에 의하여 초연되고, 74년 10월에 뉴욕 폴리머드 극장에서 공연하기 시작해 77년 10월까지 1천2백 회 공연하는 기염을 토한다. 주인공인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역은 앤소니 홉킨스가 맡았고, 이어서 리처드 버튼, 레너드 리모이, 앤소니 퍼킨스가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에도 1975년 9월 실험극단 전용 소극장에서 초연한 이후 1991년 5월 현재 1천8십 회를 공연했다고 한다. 내가 연극 <에쿠우스>를 본 것은 1980년인지 81년인지 그랬는데, 역시 안국동 실험극장 공연이었으며 당시 열일곱 소년 알런 역은 이미 고인이 된 강태기가 열연했다. 다른 배우들은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무섭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다.
  작품은 소아 정신과 의사가 말(horse)을 향해 병적이고 종교적인 매력에 빠진 열일곱 살 먹은 소년을 치료하는 내용이다.
  피터 셰퍼는 1970년경 차를 타고 영국의 시골을 달리다가, 서포크Suffolk 근방의 작은 마을에서 열일곱 살 소년이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찌른 놀라운 사건에 대하여 친구에게 약 1분 동안 듣는다. 이게 전부다. 셰퍼는 이 사실만 가지고 두 해 반에 걸쳐 희곡 <에쿠우스> 작업을 한다. 따라서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찌른 사건 이외의 것은 전부 창작이다.

 

  작품을 번역한 신정옥 선생은, 이미 셰익스피어 독후감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특히 드라마 번역에 권위가 있는 영문학자다. 내가 지금 어떻게 <에쿠우스>의 독후감을 써야 할지 고민하면서, 도무지 풀리지 않아 선생의 해설을 뒤적이다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단 한 문장으로 두 명의 주인공, 청소년 신경정신과 전문의 다이사트 씨와, 환자 알런 스트랑의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해놓았다.

 

  “알런에게서 슬픈 반역과 이단과 원초에의 정열을 찾아볼 수 있다면, 다이사트에게서는 회의와 권태와 무력감과 자기 연민의 소리를 읽을 수 있다.”

 

  인용하고 보니, 이것이 작품의 주제다. 한 젊은이의 반역과 이단, 원초적 정열과, 중년의 권태와 무력감과 자기 연민의 충돌.
  권위적인 가정과 부모 슬하에서 평범하게 지내던 알런. 지금도 여전히 소년이지만 5년 전 썰물의 해변에서 말을 타고 알런 곁을 지나치던 선량한 청년이 말을 타보고 싶어하는 알런을 눈치채고 말 등에 태워준 적이 있었다. 말의 목줄기에서 흐른 땀이 알런의 허벅지를 적시면서 따스한 말의 체온과 근육의 움직임을 다리로 느끼는 동시에 말의 훈김에 따라 후각을 자극하는 말 냄새. 재갈을 물린 입. 크게 뜨고 응시하는 눈. 알런은 단박에 말, 에쿠우스의 매력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빠른 속도로 구보하는 말 위에 탄 외아들을 본 아버지 프랑크 스트랑 씨는 당장 기수 청년에게 항의하고, 알런을 내릴 수 있게 거칠게 잡아당겨 기어이 말에서 떨어뜨리고야 만다.
  이후 알런은 특히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에 일부러 아들의 뜻을 꺾으려 드는 아비가 몇 명이나 될까. 인쇄업자 스트랑 씨는 나름대로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바보상자, TV 수상기를 없애고 책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인쇄업자의 아들이 책을 읽지 않는 점이 마땅하지 않은 것. 나도 아버지란 거 좀 해봤는데, 아쉽다. 애초에 자식한테 이기길 포기한 내가 똑똑한 거 같다. 아니나 달라, 알런은 옆집에 가서 TV를 계속 본다.
  이런 식이다. 알런은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방과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곳에서 다섯 살 많은 질이란 아가씨와 친해진다. 원래 성실한 성격의 알런은 질이 마굿간에서 일하는 걸 알고는 주말에 자신도 그곳에서 일할 수 있게 말해달라고 부탁해, 비록 배설물 치우는 일에 불과하지만 마굿간 일을 얻는다. 오년 전 썰물의 바닷가에서 경험한 말의 매혹을 잊지 못했던 것. 알런은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마굿간 주인 해리 달턴 씨의 마음에도 들어, 한밤이 되면 몇 주에 한 번씩 알런이 몰래 말을 끌고 나가 실컷 달리다 온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할 정도가 된다. 그러나 항상 최고의 순간에 사건이 생기는 법.
  질이 알런을 꼬드긴다. 시내에 나가 성인 영화를 보자고.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간 알런. 스웨덴에서 만든 성인 영화에서는 어린 여자아이가 토플리스 차림이 되고, 점점 기분이 묘해지는 찰나에 이르러 알런의 뒤편에 앉아 있던 아버지 프랑크 스트랑 씨와 눈이 마주친다. 당장 알런의 이름을 부르며 기어이 아들과 여자친구 질을 영화관 밖으로 끌어낸 스트랑 씨. 질이 먼저 자기가 졸라 저질 영화관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고, 스트랑 씨는 포스터 제작 등의 사업상 일로 영화관 주인을 만나러 갔다가 관객석에 없는지 찾아보러 들어간 것이라 변명한다. 알런은 처음엔 속으로 아버지가 더러운 놈, 늙은 사기꾼 일벌레라고 욕을 하다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아버지 역시 볼품없는 생식기를 달고 다니는 평범한 남자인 것을.
  질은 바로 이날 밤, 알런과의 섹스를 위해 장소를 모색하다가 여섯 마리의 말밖에 없는 마굿간을 떠올리고, 알런과 함께 안으로 든다. 질은 전혀 상관하지 않지만, 알런은 말들이 자신과 질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초를 모은 창고 안으로 갔고, 그것도 모자라 질더러 문까지 꼭 닫으라 주문한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이제 본격적인 행위로 들어가는데,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 않는가. 알런이 말 여섯 마리의 눈을 모두 찔러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주제 가운데 하나가 젊은이의 슬픈 반역과 이단과 원초에의 정열이라고. 이 정도면 됐다. 명작 가운데 한 편이니 직접 읽어보시기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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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15 10: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우, 에쿠우스! 전 아쉽게도 강태기가 하는 에쿠우스를 못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강태기 때문에 유명해진 연극은 아닐까 싶습니다. 전 그때 넘 어려서 실험극장이 어딨는지 몰랐다능ᆢㅋㅋ

Falstaff 2021-10-15 11:05   좋아요 3 | URL
그때 먼저 책을 읽고 극장엘 갔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ㅎㅎ 너무 먼 시절이네요. 그립지만 다시 가고 싶지는 않은. ㅋㅋㅋㅋ

청아 2021-10-15 1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서 끊으시다니ㅠㅠ 그러나 저에겐 <에쿠우스>가 있습니다ㅎㅎ🤭 반역과 연민의 만남이라..극과 극이네요!

Falstaff 2021-10-15 11:31   좋아요 1 | URL
ㅋㅋㅋ 독후감 올리려고 들어갔더니 미미 님 뒷모습이 보이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얼른 읽으셔요. 재미납니다. ^^

잠자냥 2021-10-15 1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같은 책인데, 지만지는 가격이.... 16,800원! 후덜덜.......

Falstaff 2021-10-15 12:14   좋아요 1 | URL
아이고... 지만지 거 참. 좀 너무해요. 하긴 지들 마음이니까 뭐라 할 얘기는 없지만서도. ㅋㅋ

coolcat329 2021-10-15 14: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 제가 태어나 처음 본 연극입니다. 공짜표가 있다고 누가 꼬셔서 갔죠 ㅋ
그때 기억나는건 말들이 일렬로 서 있고 정동환 배우가 의사 역을 했었어요. 정동환 배우의 고뇌에 찬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심각한 내용에 즐기지는 못했던거 같습니다. 책 꼭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1-10-15 15:05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정동환이면 다이사트 의사 역으로 대빵이었을 거 같습니다.
그 양반이 배우 가운데서도 발음 정확하기로 유명하잖아요. 냉정하게 대사 치는 거 하고요. 그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도 조시마 장로 역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셔요. 제가 희곡은 여간해서 추천하지 않잖아요. 근데 이건 예외입니다. 더구나 예전에 극을 보셨다면 꼭, 꼭 읽어보셔요. ㅎㅎㅎ

coolcat329 2021-10-15 15:25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그 분 발성과 발음이 굉장히 까랑까랑 정확해서 그거에 홀려서 본 기억이 지금도 나네요. 책 꼭! 보겠습니다.
 
소녀와 여자들의 삶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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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캐나다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앨리스 먼로, 사실 나는 이이와 합이 별로 좋지 않아 처음 《디어 라이프》를 읽고 나서 ‘그냥 그런, 흔한 작가’ 정도로 취급을 했고, 두 번째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정말 별로였는데, 세 번째 《거지 소녀》에 읽은 다음에야 그럴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읽은 <소녀와 여자들의 삶>이 그러니까 네 번째 먼로인데, 이 책이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또한 내게는 마지막 먼로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작품이 읽는 사람 나름대로 다 적절한 감상이 있을 것이다. 독자가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점은 모두 개별적이라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비겁하게 이렇게 실드를 쳐놓고 독후감을 시작하려 한다. 그만큼 앨리스 먼로의 애독자층이 두텁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출판사와, 평론가와, 책가게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여덟 부part로 나누어져 있고, 이 순서는 주인공 델 조던 양의 소년기부터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를 떠날 때까지다. 자연스럽게 성장소설로 구분할 수 있다. 잘 쓴 성장소설은 거의 모두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독자가 믿는다. 정말 자기 이야기인지 단순히 허구 이야기거나, 이웃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각색한 건지는 오직 작가만이 아는 영역이다. 여기까지는 동의하는데, 여덟 부part가 마치 개별적인 단편소설로 읽힌다. 그 정도로 독립적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연작 장편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옳겠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각 부가 너무 독립적이고 완성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거의 완벽한(솔직히 얘기하자면 단편소설의 ‘거의 완벽함’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사용하고 있지만) 단편의 형태를 지닌다는 것. 앞쪽의 파트(에피소드)를 읽고 불과 몇 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른 에피소드)를 주인공인 델 조던 양과 같은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 다르지 않은 배경을 지닌 같은 시각을 연이어 경험하는 것이 독자에게는 무지하게 지겨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조던 양이 더 성장해서 사춘기를 맞고, 연애 비슷한 이성교제를 하고, 가벼운 페팅도 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 지겨움이 많이 사라지지만 작품의 초, 중기까지는 읽다가, 내가 이러다가 미치고 말지? 하는 심정이었다. 오죽하면 내 독법이 비루하여 이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 읽어볼 생각까지 했을까.

 

  앨리스 먼로가 1931년생이다. 13학년, 우리식대로 하면 고3 졸업시험을 앞두고서야 개신교 연합 부흥회에서 처음으로 흑인을 보았을 정도로 격리된 시골의 작은 마을과 도시. 그러니까 1940년대의 캐나다 시골을 무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있었던 것들을 별다른 의식 없이 그대로 묘사하기만 해도, 전쟁 중 도는 전후의 남성, 권위적 사회상이 그대로 노출될 수 있다. 전쟁이란 빠짐없이 여성의 수탈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당시에 10대를 지낸 먼로 역시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여성이 어떻게 차별과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먼로가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건 아니지만 일단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는 있다.
  재미있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나처럼 한 번 책을 잡으면, 책을 끝날 때까지 오직 읽고 있는 작품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의 독자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한 파트를 읽고 며칠 있다가 다음 한 파트, 한 주일쯤 있다가 또 한 파트, 이렇게 읽을 수 있는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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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14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건 저를 위한 책이군요.
전 책 읽다 딴짓 많이하거든요.ㅎ
노벨문학상 저와는 별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관심 없었는데
작년인가? 티저북 읽은 적이 있는데 의외로 괜찮아서 뭐래~했습니다.
폴스타프님은 참 성실한 독자십니다.^^

Falstaff 2021-10-14 12:35   좋아요 2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어찌 됐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죠, 노벨상보다 부커나 공쿠르 받은 책들이 더 좋아요. 물론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요.
흠... 만일 제가 성실하다면 좀 일찌감치 성실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럼 이모양으로 살 거 같지 않은데요. ㅋㅋㅋㅋ 물론 지금 후회하며 사는 건 아닙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것입지요.
 
오스카와 루신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7
피터 케리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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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살던 박물학자 고조 할아버지의 이교도 아들이자 성공회 신부 오스카의 좌충우돌. 무대는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남태평양 호주의 시드니와 저 벽촌지역까지 펼쳐진다. 곳곳에 도사린 흥미유발의 뇌관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읽는 재미가 별로 없다. 원작은 안 그럴 거 같은데, 이게 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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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0-13 14: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놀라워라, 재밌을 거 같아서 기대 중인데, 별 셋에 재미없다니... 이게 웬일!

Falstaff 2021-10-13 15:10   좋아요 4 | URL
지금 720쪽까지 읽고 바야흐로 클라이맥스를 향하려는 중입니다. 뭐 아직도 밍밍하지만요. 이게 부커상 수상작이고, 비록 <한밤의 아이들>에게 양보했지만 역대 최고의 부커상 후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하네요.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 워낙 쉬지 않고 읽어서 눈이 피로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클라이막스, 깔딱고개 남았으니 깔딱고개 넘어봐야지요.

유부만두 2021-10-13 15:13   좋아요 6 | URL
애써주십시요, 독서의 선발대, 알라딘의 기미상궁, 아니 기미대감 팔스타프님!

Falstaff 2021-10-13 15:15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천만 다행입니다. 기미내관, 기미내시.... 아니어서요.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0-13 16:21   좋아요 4 | URL
네 이놈, 폴스타프! 기미내시 녀석이 어느 안전이라고 시방 기미대감 노릇을 하려 드느냐? 어서 썩 물러가서 읽지 못할까?

Falstaff 2021-10-13 16:30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 세월이 변해서 말입죠, 기미내시나 잠자냥 님이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그거 없는 건 마찬가진데 이리 차별하시면 곤란합지요. 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10-13 15: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 문장은 너무 점잖은 건가요?

Falstaff 2021-10-13 15:11   좋아요 3 | URL
ㅎㅎㅎ 아무래도 그런 것도 있겠지요. 영어가 짧아 원서는 읽지 못하겠고 참...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요.
 
수상한 자 - 연인번역희곡총서 1
브라니슬라브 누쉬치 지음, 김상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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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4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브라니슬라브 누쉬치는 극작가, 풍자작가, 소설가, 수필가, 그리고 현대 세르비아어의 수사학자 등, 하여튼 펜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트를 향해 펜을 던지는 일 빼놓고 뭐든지 잘 해서, 세르비아의 고골로 불린다고 한다. 누쉬치는 1887년에 이 작품 <수상한 자>를 완성했지만 세르비아 왕조의 부패와 무능한 공무원들을 사정없이 풍자하는 내용이라 실제로 공연을 하기까지는 35년이란 세월이 더 필요했다.
  웃기는 건, 이 사이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전쟁의 화마가 1915년 드디어 세르비아에까지 튀어, 누쉬치는 자신의 원고 가운데 아끼는 작품들을 친한 이에게 맡겨두고, <수상한 자>는 월세 살던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그냥 ‘버리고’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맡겨둔 작품들은 가택수색의 와중에 몽땅 불태워지고, 팽개쳐버린 <수상한 자>만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는 것.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출판사 ‘연극과인간’에서 나온 시리즈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 안에는 그래도 다행히 읽어본 작품도 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루이 14세 시절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빗대 소비에트 정부를 풍자했다는 <위선자들의 밀교>. 이 작품을 비롯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흔쾌하게 선택할 예정인 게오르크 카이저가 쓴 <메두사의 뗏목>, 류보미르 씨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이 들어있어 기대를 품게 만든다.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나온 <수상한 자>는 전형적인 희극이다. 연출에 따라 얼마든지 슬랩스틱 코미디로도 만들 수 있고, 스탠딩 코미디로도 가능할 것 같다. 읽어보면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는데, 우리나라 방송 희극 대본가나 연출가 가운데 이 작품을 슬쩍 차용한 적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야 우리나라가 콘텐츠 선진국이지 20세기 후반만 해도 소위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그까짓 지적재산권 따위는 개나 줘라, 하고 노골적으로 일본의 유사 방송을 베껴오기 일쑤였으니, 당시만 해도 거의 금단의 영역이었던 공산주의 동유럽 극작가가 쓴 작품의 일부를 가져와 변주를 거쳐 선보이는 정도는 양심의 가책 따위조차 느끼지 않았을 듯하다.
  * 말이 나와 하는 얘긴데, 예능 프로그램은 무슨 “예능”이냐. 그냥 오락 방송,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오락’이란 말을 쓰기 어째 어감이 좋지 않은 듯하니 예능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언어 인플레이션이 보통 아니다. 난 이런 게 별로 좋지 않다.

 

  19세기 말의 세르비아에 ‘예로띠예 빤띠치’라는 이름의 우체국장이 살았다. 이이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취미를 가졌으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심심하기만 하면 우체국에 쇄도하는 편지를 개봉해 읽어보는 것. 원래 다른 사람들 훔쳐보는 게 재미나는 일이라 한 번 맛을 들인 예로띠예는 점점 간이 커져 편지의 발신, 수신인을 가리지 않게 되고, 그게 사달이 나 드디어 징계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라. 명색이 주인공, 아직 연극은 막도 올라가지 않았다. 이후 옛 말로 ‘사바사바’에 관해 훌륭한 재질을 타고 나서, 이번엔 엉뚱하게도 경찰서장의 자리에 오른다. 덩치만 무지하게 크지 겁이 엄청나게 많아 자신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놓고 제일 먼저 자신의 안위부터 따진 다음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며, 병력의 배치나 작전 수행, 범인 취조 등 하여튼 뇌 세포의 활발한 운동을 전제로 하는 어떤 일도 자신의 전문적인 부하들의 입을 빌리려는 경향이 있다. 나이 들어 낙하산 타고 떨어진 인간들의 공통점이기도 해서, 우리나라 공기업에도 이런 인간들 숱하게 깔려있으니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터이다.
  예로띠예는 아내 안자와의 사이에 외동딸 마리짜를 두었는데, 도무지 딸에 대한 애정이 없는지 마리짜가 열아홉 살 때까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가, 열아홉부터 스물하나 까지는 부모더러 결혼 상대를 찾아달라고 요구했지만 어떻게 된 엄마, 아빠인지 상대를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 부모에게 자신이 직접 남편감을 찾아내겠다고 머리 조아리며 말씀드리고, 약국의 약사 보조를 하고 있는, 참, 민망해서 이거, 유럽 사람들 이름이 이상하긴 한 걸 감안해 들으시면, ‘조까’라는 이름의 청년을 찾아낸 거였다.
  그런데 예로띠예 씨도 참. 이 경찰서장이, 그동안 뭐했는지 여태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경찰서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비차’한테 꽂혀서 딸을 주기로 결심을 한 거였다. 왜냐하면, 비차가 인물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교양까지 없지만 특별하고도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으니 이 군郡 지역의 상인, 농민, 시민들의 뒤통수를 후려쳐 현금을 알겨내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나이 서른 조금 넘어 벌써 직장은 취미생활로 다니고 있는 중일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뭐. 요즘 같으면 뭐라 그러더라, 파이어 족? 근데 문제는, 마리짜가 비차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하는 터, 이게 희극에서 제대로 되겠느냐는 말이지.
  마리짜가 뇌를 짜 일단 조까를 자기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유럽 호텔에 방을 잡게 했다. 때는 19세기 말이라 마리짜가 호텔에서 조까를 한 번 만나기만 해도 이는 빼도 박도 못 하고 동네 전체에 소문이 나 결혼하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
  그러나 생각한대로 다 되면 연극이 아니지. 때를 맞춰 중앙정부에서 일급비밀의 암호 전보가 와, 이 지역에 혁명적이고 반정부적인 수상한 자가 침투했으니 즉각 잡아 대령하라는 지령이 떨어진다. 정부도 이 수상한 자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젊은이라는 것만 확실하단다. 그럼 독자들은 순식간에 눈치 챌 수 있는 것. 마침 유럽 호텔에 묵고 있으면서 마리짜의 지시대로 방 밖으로 전혀 나오지 않는 조까가 수상한 자로 오인되어 체포당할 것임을. 그리고 진짜로 독자의 짐작대로 일이 벌어진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수상한 자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있는 터. 원래 혁명분자들은 몸 안에 자폭 장치를 달고 다니는 법이라서 초동 취조는 서기관들에게 맡기고 잠시 출타를 한 겁쟁이 예로띠예 서장이 시간이 지나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자 드디어 경찰서 내부로 들어와 시민 가운데 뽑힌 증인 두 명과 모든 서기관, 서기 보조 들이 보고 있는 가장 큰 사무실에서 앞으로 자기 사위가 될 청년에게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이름이 뭔가?
  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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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0-12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름 탈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0-12 09: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너무 재미있겠는데요. 조까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12 10:12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거 20세기 초 희극이잖아요. 악당들은 다 물 먹고 사랑은 언제나 맺어지지 않겠습니까.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10-12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뭔가?
조까.
탈락!!!

Falstaff 2021-10-12 10:13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그죠. 어감이
경찰서장 예로띠예 씨가 유대인이 아니어서 더 확실하게 탈락이었을 겁니다. ㅋㅋ

공쟝쟝 2021-10-12 16:03   좋아요 2 | URL
요즘 퐐스타프님 중간에서 끊기 실력이 아주 물이 오르셨어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12 16:09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걸 제가 좋아해서 나날이 연구 발전시키는 중입니다!!!

stella.K 2021-10-12 1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바사바. 친근합니다. ㅎ 글 제목도 좋고.이거 사바사바아닙니다.ㅋㅋ

Falstaff 2021-10-12 11:10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알라딘에서 사바사바 할 일이 있나요 뭐. ㅋㅋㅋㅋ

scott 2021-10-12 1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반전 ㅋ zocca 인것 같습니다 세르비아 에서 흔한 이름인뎅 ㅎ ㅎ

Falstaff 2021-10-12 13:12   좋아요 4 | URL
아, 세르비아엔 조 서방이 많군요! 오호~ ㅋㅋ
 
호모 파버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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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막스 프리쉬의 소위 3대 소설 <슈틸러>, <호모 파버>, <내 이름은 간텐바인>을 완독했다. 아시다시피 프리쉬의 관심은 자아의 정체성, 개별성, 책임감, 도덕성, 정치적 책무 등에 있으며, 다양한 아이러니의 사용을 작품의 특징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이것들을 찾아내 즐기는 건 다 독자들의 몫이겠다.


  호모 파버. Homo Faber. 도구적 인간. 건조한 성격의 주인공 발터 파버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한때 그의 애인이었던 한나 란츠베르크가 지어준 별명이기도 하다. 1인칭 화자인 발터 파버는 작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전형적인, 거의 인간계를 벗어난 수준으로 성격이 고착되어버린 엔지니어다. 유네스코에서 근무하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세계의 수도인 뉴욕. 자기 수준으로는 비싼 아파트에서 살면서 스물여섯 살 먹은 유부녀 아이비로부터 결혼하자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발터는 비혼주의자.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33년부터 35년까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의 조교로 재직할 당시, 3백 프랑켄의 월급을 받았는데, 문학을 공부하던 한나 란츠베르크라는 반half 유대인과 연애를 했었다. 1930년대의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만 창궐했던 지역적 질환이 아니어서, 스위스도 유대인 여권을 무효화시키려 하자(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참조), 발터는 한나에게 스위스 국적을 유지시키려는 목적도 겸해 아직 가정을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지만, 결혼을 제의한다. 여기에 더해 나름 조심한다고 했건만 한나가 그만 덜컥 임신을 해버렸던 것. 그러면 한나가 잘 됐다 싶어 얼른 결혼할 줄 알았지? 천만의 말씀. 한나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상당한 동정을 수반한 청혼이라고 이해해서 결혼 직전에 취소해버린다. 발터는 한나가 의사 친구인 요하임 헹케를 찾아가 중절수술을 받겠다는 말을 듣고 국외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발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극적인 기계인간으로 성격이 굳어져버렸으며, 한나는 딸 엘리자베트를 낳고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서 살다가 동베를린을 거쳐 지금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박물관 일을 하고 있다. 한나는 참전하자마자 포로수용소에서 전쟁기간을 보내고 돌아온 의사 요하임 헹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공산주의자인 파이퍼 씨와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파이퍼 씨가, 어제 무효라고 한 것을 오늘 유효하다고 공표하는 인간, 즉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일 뿐임을 알고는 1953년 6월에 다시 이혼해 딸 엘리자베트 파이퍼와 단둘이서 산다.  

  발터와 한나가 결혼하려다가 한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스위스 안에서의 에피소드는 막스 프리쉬가 젊어서 겪은 경험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후 주로 개발도상국의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터빈 조립 공사를 담당하느라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모든 사물을 벡터 계산의 가능 범위로 해석하게 된 발터 파버에게, 1957년의 어느 날, 지금은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불리는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DC-4, 슈퍼 컨스텔레이션 기종에 탑승해 남아메리카로 향하던 중, 멕시코만 상층에서 왼쪽 날개의 엔진이 정지 (한 개 정도야 그럴 수 있지), 탑승객 전원이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가벼운 불안에 떨다가, 곧이어 또 하나의 엔진까지 멈춰버려(지극히 낮은 가능성), 모두 네 개의 엔진 가운데 절반만 가지고 더 이상의 비행은 불가능하다는 실력 좋고 경험 많은 기장의 판단으로, 멕시코 고원 타마울리파스 황무지에 성공적으로 불시착하는 일이(거의 불가능한 확률로!) 벌어진다. 황무지에 빠져 죽을 물도 없으면서 여전히 구명조끼를 입은 채.

  이 장면을 읽으면서 마치 그리스 고전이 생각날 거 같았는데, 그게 어떤 작품일지, 뭐와 비슷한지 책을 읽고 열여덟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궁리중이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가끔 거의 불가능한 확률로 한 인생을 좌우하게 될 ‘우연’이 생기기도 한다. 발터 파버가 전혀 믿지 않는 낮은 확률임에도. 발터는 멕시코의 황무지 타마울리파스에서 여든다섯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옆 좌석에 앉았던 뒤셀도르프 출신의 못마땅한 청년 헤르베르트와 팬티만 입고 웃통을 벌겋게 벗은 상태로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비행기 뒷날개 그늘을 쫓아다니며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극도로 즐기면서 시간은 효과적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체스 게임에 몰두하면서, 헤르베르트의 이름이 헹케이며, 과테말라 플랜테이션에서 두 달 전에 연락이 두절되어버린 유일한 백인인 친형 요하임 헹케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4일 만에, 요하임이 한나와 이혼했다는 얘기도 얻어듣고, 즉각 계획을 변경해 자신도 과테말라의 조그만 간이역, 세상의 끝이며 최소한 문명의 끝인 팔렝케로 함께 가기로 결정을 해버린다. 이미 철사줄로 목을 매 죽어버려 피가 통하지 않은 얼굴이 퍼렇게 변색된 채 퉁퉁 부어버린 요하임 헹케를 찾아, 먼저 사진 촬영을 하고, 매장을 해주기 위해. 물론 그땐 몰랐지만.

  그렇지? 이 정도니 저 세상의 오지, 황무지 타마울리파스에서의 불시착을 그리스 고전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거 아냐?


  다른 우연 하나 더.

  과테말라에서 친구를 장사지내고 뉴욕으로 돌아와 아파트에 오르니 기다리고 있는 워싱턴 공무원의 아내 아이비. 스물여섯 살 아이비는 쉰 살 넘은 발터하고 일주일을 지낼 수 있다는 꿈에 푹 젖어 행복해 미칠 지경인 반면, 타마울리파스에서 아이비한테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낸 바 있는 발터는 일주일이 끔찍하기만 해, 새롭게 비행공포증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크루즈 선을 예약하고 다음날 배에 올라버린다. 아이비는 이걸로 책에서 삭제된다. 인생이 다 그렇다. 사는 공부했다고 치자, 아이비야.


  배에 젊은 아가씨, 검은색 카우보이 바지에 붉은색 말총머리를 한 자베트. 장학금으로 예일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이제 유럽으로 가는 중. 장래 희망은 비행기 승무원이며 원래는 엄마한테 곧바로 가려 했으나, 파리에서 로마까지,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북쪽 지역의 온갖 명승지와 문화재를 구경하면서 히치하이킹으로 갈 예정이란다. 엄마의 승낙을 받아놓았다고. 발터가 자베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두 가지. 하나는 절대로 비행기 승무원은 되지 말라는 것. 두 번째는 제발 로마까지 히치하이킹을 하지 말라는 것.

  파리에 도착한 발터. 배에서 자베트가 박물관 이야기를 많이 했고, 자신은 절대 박물관 따위엔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생각나, 루브르를 연이어 관람한다. 혹시 자베트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결국 만난다. 자베트는 이틀 연속 발터를 보았던 터. 이들은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발터는 자베트에게 터무니없는 수작도 전혀 부리지 않으면서, 오페라도 같이 보러가고, 이젠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는데, 때마침 회사에선 발터에게 휴가를 부여하는 동시에 미국 출장 가는 부장이 시트로앵을 쓰라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자베트의 로마까지 히치하이킹을 걱정하던 터라, 어이쿠나 잘 됐다 싶어, 자기 차로 히치하이킹을 하라고 제의해서 둘은 함께 온갖 곳을 다 구경하게 된다.

  크루즈 항해에 이어 파리-로마 여행. 이것도 어디서 본 것 같지? 오뒷세이아? 아이네이스?

  이 여행을 통해 벡터 해석 범위의 발터는 자신의 독자적인 호모 파버 적인 형질을 비록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자베트에게 양보하고 있는 것을, 독자는 발견할 수 있다. 괜찮게 늙은 발터, 스포츠로 몸을 다진 건장한 중년의 욕망을 제거한 부드러움과 친절. 딱 이 수준이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자베트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남성으로서가 아닌 편한 상대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다가 하루, 발터는 엄마의 이름을 묻고, 발터가 자베트라고 부르는 이 아가씨의 정식 이름이 엘리자베트인 건 벌써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한나 파이퍼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도 놀란 시늉을 하지 않은 채, 엄마의 처녀 때 이름이 란츠베르크 아니었느냐고 물으면서, 속으로 재빨리 자베트의 나이 계산을 해보고, 적어도 자기 아이가 아니란 걸 확신한다. 그리하여 이 그리스식 로드무비이기도 한 <호모 파버>는 그리스식 결말을 위해 드디어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에 이른다. 이들 앞에는 또 어떤 그리스식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는 미안하지만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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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10-11 19: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을거 같아요. 주인공이 엔지니어라 호모 파버이군요. 소설에서 계속 우연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Falstaff 2021-10-11 19:07   좋아요 4 | URL
호응이 별로 없어서 저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꽤 좋은 작품인데 말입니다.
아마 프리쉬 자체가 대중성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읽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요. 뭐 인생이고 그 양반 팔자지요.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10-11 2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식이라면 당연히 엘리자베트는 파버의 친딸이고, 아니라고 생각한 파버는 당연히 그녀와 섹스를 하고 아닌가요? ㅎㅎ

Falstaff 2021-10-12 08:5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절대 안 알려드립니다!

그레이스 2021-11-05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샀습니다^6^
축하드려요 당선 아니고 선정?

Falstaff 2021-11-05 17:11   좋아요 1 | URL
사셨어요! 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ㅎㅎㅎ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괭 2021-11-05 16: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님 당선.. 아니 선정 축하드립니다 ㅎㅎ

Falstaff 2021-11-05 17:12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책 정말 재미나요. 더 많이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아쉬운 작품입니다. ^^

새파랑 2021-11-05 17: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선정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을유 출판사 마니아 이신듯 합니다~!!

Falstaff 2021-11-05 19:32   좋아요 3 | URL
냅. 제가 을유를 좋아했었는데요, 지금은 별롭니다.
예전만큼 책 만드는 데 정성을 쏟는 거 같지 않아서요.
교정교열도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고 뭐 그렇습니다. ㅎㅎㅎ

이하라 2021-11-05 17: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축하드립니다.
11월도 기쁜 일 가득한 달 되세요.^^

Falstaff 2021-11-05 19:3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언제나 조용히 지켜봐주시는 것에 늘 감사드립니다. ^^

초란공 2021-11-05 22: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매달 Falstaff님의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글이 기다려집니다~

Falstaff 2021-11-06 09:47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잘 읽어주시는 분들 덕택입니다. ^^

mini74 2021-11-05 2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의 박력넘치는 글 재미있게 보고있어요. 선정 축하드랴요 *^^*

Falstaff 2021-11-06 09:49   좋아요 2 | URL
미니님도 축하해요!
아이고, 저야 뭐 그저.... ㅋㅋㅋ

초딩 2021-11-0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아늑한 가을 일요일 되세요~

Falstaff 2021-11-07 20: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