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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 ㅣ 범우희곡선 6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4월
평점 :
피터 셰퍼는 1926년 5월, 영국 리버풀에서 앤소니의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다. 런던 세인트 폴스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3년간 광부 생활을 한 후에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다고 했으니 여유 있는 가정은 아니었겠다. 졸업 후에 쌍둥이 형제 안소니와 합작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단박에 저 소련의 스트루가츠키 형제를 떠올리는 대목이지만, 셰퍼 형제는 그들과 달리 합작 작업을 한 5년 만에 끝내고 각자 독립적으로 희곡과 소설을 쓰게 된다. 앤소니는 희곡 <탐정>을 써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도 하지만, 피터가 <5중주>와 공전의 히트상품 <에쿠우스>를 발표해 훨씬 유명세를 탄다.
<에쿠우스>는 1973년 여름에 영국 런던 올드빅에서 국립극단에 의하여 초연되고, 74년 10월에 뉴욕 폴리머드 극장에서 공연하기 시작해 77년 10월까지 1천2백 회 공연하는 기염을 토한다. 주인공인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역은 앤소니 홉킨스가 맡았고, 이어서 리처드 버튼, 레너드 리모이, 앤소니 퍼킨스가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에도 1975년 9월 실험극단 전용 소극장에서 초연한 이후 1991년 5월 현재 1천8십 회를 공연했다고 한다. 내가 연극 <에쿠우스>를 본 것은 1980년인지 81년인지 그랬는데, 역시 안국동 실험극장 공연이었으며 당시 열일곱 소년 알런 역은 이미 고인이 된 강태기가 열연했다. 다른 배우들은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무섭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다.
작품은 소아 정신과 의사가 말(horse)을 향해 병적이고 종교적인 매력에 빠진 열일곱 살 먹은 소년을 치료하는 내용이다.
피터 셰퍼는 1970년경 차를 타고 영국의 시골을 달리다가, 서포크Suffolk 근방의 작은 마을에서 열일곱 살 소년이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찌른 놀라운 사건에 대하여 친구에게 약 1분 동안 듣는다. 이게 전부다. 셰퍼는 이 사실만 가지고 두 해 반에 걸쳐 희곡 <에쿠우스> 작업을 한다. 따라서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찌른 사건 이외의 것은 전부 창작이다.
작품을 번역한 신정옥 선생은, 이미 셰익스피어 독후감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특히 드라마 번역에 권위가 있는 영문학자다. 내가 지금 어떻게 <에쿠우스>의 독후감을 써야 할지 고민하면서, 도무지 풀리지 않아 선생의 해설을 뒤적이다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단 한 문장으로 두 명의 주인공, 청소년 신경정신과 전문의 다이사트 씨와, 환자 알런 스트랑의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해놓았다.
“알런에게서 슬픈 반역과 이단과 원초에의 정열을 찾아볼 수 있다면, 다이사트에게서는 회의와 권태와 무력감과 자기 연민의 소리를 읽을 수 있다.”
인용하고 보니, 이것이 작품의 주제다. 한 젊은이의 반역과 이단, 원초적 정열과, 중년의 권태와 무력감과 자기 연민의 충돌.
권위적인 가정과 부모 슬하에서 평범하게 지내던 알런. 지금도 여전히 소년이지만 5년 전 썰물의 해변에서 말을 타고 알런 곁을 지나치던 선량한 청년이 말을 타보고 싶어하는 알런을 눈치채고 말 등에 태워준 적이 있었다. 말의 목줄기에서 흐른 땀이 알런의 허벅지를 적시면서 따스한 말의 체온과 근육의 움직임을 다리로 느끼는 동시에 말의 훈김에 따라 후각을 자극하는 말 냄새. 재갈을 물린 입. 크게 뜨고 응시하는 눈. 알런은 단박에 말, 에쿠우스의 매력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빠른 속도로 구보하는 말 위에 탄 외아들을 본 아버지 프랑크 스트랑 씨는 당장 기수 청년에게 항의하고, 알런을 내릴 수 있게 거칠게 잡아당겨 기어이 말에서 떨어뜨리고야 만다.
이후 알런은 특히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에 일부러 아들의 뜻을 꺾으려 드는 아비가 몇 명이나 될까. 인쇄업자 스트랑 씨는 나름대로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바보상자, TV 수상기를 없애고 책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인쇄업자의 아들이 책을 읽지 않는 점이 마땅하지 않은 것. 나도 아버지란 거 좀 해봤는데, 아쉽다. 애초에 자식한테 이기길 포기한 내가 똑똑한 거 같다. 아니나 달라, 알런은 옆집에 가서 TV를 계속 본다.
이런 식이다. 알런은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방과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곳에서 다섯 살 많은 질이란 아가씨와 친해진다. 원래 성실한 성격의 알런은 질이 마굿간에서 일하는 걸 알고는 주말에 자신도 그곳에서 일할 수 있게 말해달라고 부탁해, 비록 배설물 치우는 일에 불과하지만 마굿간 일을 얻는다. 오년 전 썰물의 바닷가에서 경험한 말의 매혹을 잊지 못했던 것. 알런은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마굿간 주인 해리 달턴 씨의 마음에도 들어, 한밤이 되면 몇 주에 한 번씩 알런이 몰래 말을 끌고 나가 실컷 달리다 온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할 정도가 된다. 그러나 항상 최고의 순간에 사건이 생기는 법.
질이 알런을 꼬드긴다. 시내에 나가 성인 영화를 보자고.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간 알런. 스웨덴에서 만든 성인 영화에서는 어린 여자아이가 토플리스 차림이 되고, 점점 기분이 묘해지는 찰나에 이르러 알런의 뒤편에 앉아 있던 아버지 프랑크 스트랑 씨와 눈이 마주친다. 당장 알런의 이름을 부르며 기어이 아들과 여자친구 질을 영화관 밖으로 끌어낸 스트랑 씨. 질이 먼저 자기가 졸라 저질 영화관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고, 스트랑 씨는 포스터 제작 등의 사업상 일로 영화관 주인을 만나러 갔다가 관객석에 없는지 찾아보러 들어간 것이라 변명한다. 알런은 처음엔 속으로 아버지가 더러운 놈, 늙은 사기꾼 일벌레라고 욕을 하다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아버지 역시 볼품없는 생식기를 달고 다니는 평범한 남자인 것을.
질은 바로 이날 밤, 알런과의 섹스를 위해 장소를 모색하다가 여섯 마리의 말밖에 없는 마굿간을 떠올리고, 알런과 함께 안으로 든다. 질은 전혀 상관하지 않지만, 알런은 말들이 자신과 질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초를 모은 창고 안으로 갔고, 그것도 모자라 질더러 문까지 꼭 닫으라 주문한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이제 본격적인 행위로 들어가는데,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 않는가. 알런이 말 여섯 마리의 눈을 모두 찔러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주제 가운데 하나가 젊은이의 슬픈 반역과 이단과 원초에의 정열이라고. 이 정도면 됐다. 명작 가운데 한 편이니 직접 읽어보시기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