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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여자들의 삶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캐나다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앨리스 먼로, 사실 나는 이이와 합이 별로 좋지 않아 처음 《디어 라이프》를 읽고 나서 ‘그냥 그런, 흔한 작가’ 정도로 취급을 했고, 두 번째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정말 별로였는데, 세 번째 《거지 소녀》에 읽은 다음에야 그럴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읽은 <소녀와 여자들의 삶>이 그러니까 네 번째 먼로인데, 이 책이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또한 내게는 마지막 먼로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작품이 읽는 사람 나름대로 다 적절한 감상이 있을 것이다. 독자가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점은 모두 개별적이라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비겁하게 이렇게 실드를 쳐놓고 독후감을 시작하려 한다. 그만큼 앨리스 먼로의 애독자층이 두텁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출판사와, 평론가와, 책가게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여덟 부part로 나누어져 있고, 이 순서는 주인공 델 조던 양의 소년기부터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를 떠날 때까지다. 자연스럽게 성장소설로 구분할 수 있다. 잘 쓴 성장소설은 거의 모두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독자가 믿는다. 정말 자기 이야기인지 단순히 허구 이야기거나, 이웃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각색한 건지는 오직 작가만이 아는 영역이다. 여기까지는 동의하는데, 여덟 부part가 마치 개별적인 단편소설로 읽힌다. 그 정도로 독립적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연작 장편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옳겠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각 부가 너무 독립적이고 완성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거의 완벽한(솔직히 얘기하자면 단편소설의 ‘거의 완벽함’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사용하고 있지만) 단편의 형태를 지닌다는 것. 앞쪽의 파트(에피소드)를 읽고 불과 몇 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른 에피소드)를 주인공인 델 조던 양과 같은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 다르지 않은 배경을 지닌 같은 시각을 연이어 경험하는 것이 독자에게는 무지하게 지겨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조던 양이 더 성장해서 사춘기를 맞고, 연애 비슷한 이성교제를 하고, 가벼운 페팅도 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 지겨움이 많이 사라지지만 작품의 초, 중기까지는 읽다가, 내가 이러다가 미치고 말지? 하는 심정이었다. 오죽하면 내 독법이 비루하여 이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 읽어볼 생각까지 했을까.
앨리스 먼로가 1931년생이다. 13학년, 우리식대로 하면 고3 졸업시험을 앞두고서야 개신교 연합 부흥회에서 처음으로 흑인을 보았을 정도로 격리된 시골의 작은 마을과 도시. 그러니까 1940년대의 캐나다 시골을 무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있었던 것들을 별다른 의식 없이 그대로 묘사하기만 해도, 전쟁 중 도는 전후의 남성, 권위적 사회상이 그대로 노출될 수 있다. 전쟁이란 빠짐없이 여성의 수탈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당시에 10대를 지낸 먼로 역시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여성이 어떻게 차별과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먼로가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건 아니지만 일단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는 있다.
재미있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나처럼 한 번 책을 잡으면, 책을 끝날 때까지 오직 읽고 있는 작품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의 독자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한 파트를 읽고 며칠 있다가 다음 한 파트, 한 주일쯤 있다가 또 한 파트, 이렇게 읽을 수 있는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