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 안의 열정이 어느 순간 식을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배우고 일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온종일 그 생각만 나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마저 아까울 때도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나 쭉 이어지진 않는다(이어져도 곤란하다). 영원히 절절 끓지 않는다. 위로 쭉쭉 치솟던 열정 그래프의 각도가 어느 순간부턴가 완만해져 수평에 가까워지다가, 때론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한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20대엔 열정이 버글버글 끓고, 30대엔 그 열정의 원석을 캐내고 잘 다듬어 값을 올린다. 그리고 40대로 접어들면... 슬슬 더는 예전 같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내 인생 끝이냐, 내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냐, 더 이상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냐, 전혀 아니죠. 슬슬 또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아가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니,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던 걸 그만두는 게 곧 패배와 실패를 뜻하진 않는다. 그동안 쏟아부은 열정, 노력, 시간 돈이 아깝고 억울해 '억지로 계속하는 게' 오히려 어리석다. 내가 내 발목을 잡는 셈이다. 고냐 스톱이냐,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 내가 나와 합의를 봐야 한다. 그동안 할 만큼 했고, 이제는 됐어, 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끝낸다. 끝을 내야 그다음을 시작할 수 있다. 혹은 하던 걸 계속하되, 내 자세가 달라진 것을 받아들인다. 20대, 30대에 거친 파도를 짜릿하게 타고 달렸다면 이젠 잔잔함을 즐길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잔잔하게 꾸준히 내 페이스로 가겠다는 것.
결국 우리는 길게 가야 한다. 굵냐, 가느냐 하는 건 그다음 문제다. 길게 가기 위해선 탄력과 복원력이 필요하다. 손으로 꾸욱 누른 자국이 다시 쑤욱 솟아올라야 한다. 푹 자고 일어나 어제의 기분에서 벗어나 새로운 날을 시작해야 한다.

완벽을 추구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 내 속도를 스스로 정하는 사람이 좋다. 그렇게 되기 위해 오늘도 마음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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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희,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p.132-134

2019.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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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예찬

내향적인 사람들이 모두 책벌레는 아니지만, 책벌레 치고 내향인이 아닌 사람은 많지 않다. 나 또한 활자 중독이 의심될 정도로 글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한다. 읽는 즐거움에 쓰는 즐거움까지 보태져 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한대로 발전했다.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한다. 서점, 도서관, 헌책방, 물성 있는 책, 물성 없는 책, 신문, 잡지, 오디오북, 문자, 북카페... 책과 글이 있는 수만 가지의 연결고리들에 빠짐없이 애착을 느낀다. 책이 있는 공간은 어디든 언제까지든 머물 수 있다.
방학을 한 학교 도서관은 늘 사람이 없어 한적하다.
고요하고 포근한 이 공간은 무더운 여름과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면 언제나 나만의 아지트가 된다. 나는 부지런히 그곳에 발도장을 남겼다.
왜 그렇게까지 책을 좋아하는지 나도 잘 모른다. 아마 종이의 질감, 책의 향기, 책이 주는 생각의 빈 공간, 마음의 안식이 되는 부드러운 말과 글 때문일 것이다. 적막 속 고요히 읽는 시간부터 종이 넘기는 소리까지 책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성을 오감으로 세세하게 기억하고 싶다.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방식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어치우지만, 역시 손에 잡히는 종이책을 가장 좋아한다. 누런 바탕을 빽빽하게 또는 드문드문 작가 입맛대로 채운 글자들이 빚어내는 조화는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도 책과 함께라면 무난하게 한 해의 절반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여가 시간을 가장 성실하게 보조하는 오락은 언제나 '독서'다.
형체 없이 저장되는 정보를 물성 있는 대상 속에 담았으니, 책이란 실로 오묘한 존재다. 책은 언제나 사람보다 먼저 나를 위로하고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마음 맞는 책 한 권과 보낸 시간은 소중한 벗과 보낸 시간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알차다. 그 어떤 스승보다 나를 강하게 흔들어 일깨우고 나의 무료함을 달래준다. 시 한 편을 읽다보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 그 속에 잔잔하게 보이기도 하고, 내 마음을 도둑맞은 듯 책에서 벌거벗은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슬픈 단어가 없어도 마음을 후벼파는 순간을 맞아 눈물 번진 시야로 책장을 넘긴 적도 많다. 책들은 하루에 몇 번씩 변변찮은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라고 수없이 권한다. 책이 없는 내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책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내가 완전하고 내 하루가 더 윤택하게 빛난다.
책은 교류의 도구이자 큐피트의 화살이 되기도 했다. 책 속 좋았던 구절을 옮겨 적어 슬그머니 책 사이에 마음을 담은 쪽지를 끼워넣기도 하고, 책을 선물하며 간접적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그와 나의 취향을 비교하며 서로간의 마음을 확인하는 매개체로도 사용하고, 돌려 읽은 책 한 권을 안주 삼아 몇 시간씩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책은 냉소적이고 무신경한 나에게 감성을 불어넣고 자기 중심적인 나에게 연민을 가르쳐주었다. 타인의 삶에 한 번 더 고개를 돌릴 호기심을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세월의 풍파에 취약한 만큼 읽은 자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책은 그만큼 사연 가득한 신비한 존재가 된다. 가끔 중고서점으로 책사냥을 떠나는데, 타인의 손때 가득한 헌 책들 가운데 구하고 싶어도 더는 구할 수 없었던 책들을 운 좋게 만날 때가 있다. 절판 도서, 몇 차례 중쇄를 한 베스트셀러의 초판, 이미 타계한 작가의 귀한 친필 사인본을 발견하노라면 그 기쁨과 행운에 형언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간된 고서이지만 출간 년도가 의심될 만큼 상태가 좋은 책을 발견하면, 왠지 모를 경외심이 드는 한편 책을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괜스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나는 집에서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책이 있으면 언제나 충만하다. 해마저 저버린 어둡고 쓸쓸한 오후도 책이 있으면 오후 2시의 맑은 기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불빛마저 희미해진 적막한 시간에도 오래된 수필 한 권, 너덜너덜한 공책과 연필 한 자루면 읽는 나와 쓰는 나로 시간은 완전해진다.
퀴퀴하고 타분한 종이 냄새와 책 넘기는 소리,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는 쓸쓸한 시간과 공간을 온기로 채우는 최고의 땔감이다.

2019.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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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유는 없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감을 포기하지 않는 것. 숨가쁘게 달리면서도 문득 뭔가를 놓친 것처럼 뒤돌아보는 것. 깨진 돌의 모서리에서도 인간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이 숙고와 침묵, 거기 숨겨진 빛을 가진 캄캄한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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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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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서

 

 

   나는 저 발자국이 몸으로부터 아주 끊어져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몸은 없는데 무게만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그러나 저 발자국마다 당신이 서 있다면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날 수 없겠지요그래서 어떤 비는 지워진 밤을 위해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둥둥 떠내려가는 어둠이 상갓집 신발처럼 우리를 흩어놓는다고 느끼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취한 건 아닙니다.

 

   아아 정말,

 

   뭔가 밀실을 엿보는 기분이랄까마지막으로 관을 열었을 때반듯이 누운 아버지가 꼭 열쇠처럼 보였어요.

사람을 묻고,

   별들이 한바퀴를 돌면 세계의 단단한 지평선이 모두 열릴 것 같았어요.

 

   잘 들어갔다고,

   답했다.

 

   전철을 반대로 타고 여섯 정거장을 달렸지만 우리는 늘 전파의 거리를 줄이거나 늘이면서 잘못 든 길을 달리는 중이고,

   어디에 내려도

   거기가 도착지는 아니니까잘 들어갔다고 믿으며

   돌아간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우리라서,

 

   아침이면 차창을 스쳐가는 나무들이 단 한번 죽음을 주인으로 모시고

   밤처럼 꼭 감은 눈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방울씩 받아주는 때가 온다.



- 신용목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중에서 시 <우리라서>전문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우리라서,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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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것을 빨리 썼든 천천히 썼든, 무릎 위에 놓고 썼든 탁자 위에서 썼든지 간에, 넌 네 속에 있는 것만을 쓸 수 있었을 뿐이야. 그뿐이야. 네가 좀 더 생각을 했더라면 그런 말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넌 가면을 쓰지 않은 채 그 말을 쓴 거야. 그렇게 해서 적어도 우리는 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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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 『농담』 3부 루드비크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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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쓴 말들을 읽을 때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하고 넘길 때도 있지만 더러는 상처받기도 한다.


반대로 내가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어떤 말을 쓰게 될까봐 마음졸일 때가 있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대해 격한 불호의 평을 눈앞에서 듣게 된 적이 있는데, 표현은 못했지만 굉장히 마음이 상했다. 물론 내가 그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었겠지 하고 위안했다. 표현했어도 그 애는 그렇게 말했을까. 오랜 일이지만 어제 경험한 일처럼 선명한 탓에, 불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백이면 백 망설이게 되었다.


망설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 말에 상처받을 사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쓰지 않은 나를 들키기 싫어서다. 그런 말을 쓰지 않을 수 있는 건 좀 더 생각을 했다는 것일테니 말이다. 생각이 짧은 나를 들키지 않으려고, 부족하고 얄팍한 내공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해서 적어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나의 농담으로 시작되어진 한 남자의 모진 인생을 읽는데, 나를 돌아보게 되니 얼떨떨하다. 1948년 2월 혁명 후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의 체코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다는 것 역시 놀랍다. 세계문학의 재미에 이제야 발을 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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