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와같다면 2015-05-19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아.. 이제 괜찮아

제가 받아봤던 제일 큰 위로는...
꼬옥 안아주며 `나는 너야` 속삭여줬을때ㅠㅠ

해밀 2015-05-22 16:47   좋아요 0 | URL
정말 큰 위로네요. 댓글을 읽는 제게도 그 위로가 전해지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네가 내 슬픔이라 기뻐.˝라는 구절이 기억나는 위로였어요^^
 

 

 

 

 

파란 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은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같다면 2015-05-1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림님의 `길` 이 떠오르네요
....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시는 마음 깊은곳에 있나봐요.. 잊고 있던 시인데.. 생각이 나네요

해밀 2015-05-22 16:50   좋아요 0 | URL
저도 나와같다면님 덕분에 좋은 시 한 편 알게되었습니다 :)

정말 시는 마음에 남나봐요. 시 한 편이 온전히 남지 않더라도,
어렴풋하게 기억나더라도 어디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남들이 단체로 어울려 다니며 신나게 놀 때 나는 주로 1 대 1의 인간관계가 주는 조용한 친밀감에 편안함을 느끼며 성장해왔다. 원래 달변도 아니었지만 같이 있는 사람들이 3명을 넘어가면 말수가 그냥 줄어들었다. 그렇다 보니 나 역시도 살면서 이래저래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쓸데없이 예민하다 보니 누가 나와 맞고 맞지 않고 누가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너무 빨리 직관으로 알아채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또 견디지 못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나의 모습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지난날의 슬픈 초상이다. (p.96)

 

*

책을 읽다보면, 이건 정말 내가 쓴 것 같다 싶은 구절을 만나곤 하는데 오늘 읽은 이 구절이 그렇다.

특히 '3명을 넘어가면 말수가 그냥 줄어들었다'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돋았더랬다.

 

이젠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파울로 코엘료가 그의 SNS에 올렸고, 나는 <마법의 순간>에서 읽었던 그 글처럼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다 좋아한다고 하면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모두를 기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혼자서 잘 서 있을 수 있어야 타인과 함께 있을 때도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마음이 통하지도 않는 누군가로 공허함을 가짜로 채우기보단 차라리 그 비어 있는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만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있어야 진정으로 나답고 편안할 수 있을지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p.94)

 

'갈 사람은 가고 돌아올 사람은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할 용기가 있다면 어느덧 관계는 재생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의 자연스러운 생로병사를 나는 긍정한다.' (p.102)

 

 


조금 읽다가 일어서려고 했는데, 이 구절들 덕분에 계속 머물고 있다.

집 뒤에 카페가 생겼다는 게, 조금 더 반가운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러치백이 생기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클러치백에 시집 넣기.

늘 짐이 많아서 백팩을 메야 성이 차는 나에겐 어디까지나 로망이었는데,

날씨가 풀리고 미세먼지가 적은 날에 시집 한 권 넣고 외출해야지.



사진 속 시집은 함민복 시인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이다.

나는 특이하게, 시집의 제목으로 걸린 시보다는 다른 시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집은 제목으로 걸린 시가 참 좋다.



 *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



그리고, <봄비>라는 시에서 인상 깊었던 첫 줄. '양철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 시집을 다 읽고나니,

빨책 내가 산 책 코너에서 동진님이 구매하셨다는 산문집이 읽고 싶어졌다.

함민복 시인의 첫 산문집이자 그의 산문집들 속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라는 『눈물은 왜 짠가』.

75회, 그러니까 작년 5월에 소개한 책인데,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나날들에 대한 함민복 시인의 시와 수필들을 읽을 때마다

저로서는 마음이 좀 묘하게 가라앉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해지기도 하는데요.

소설가 김훈씨는 "함민복의 가난은 나는 왜 가난한가를 묻지 않고 있고,

이 가난이란 대체 무엇이며 어떤 내용으로 존재하는가를 묻는 가난이다."라고 쓴 적이 있죠.'

(빨책 75회 내가 산 책 중)


이렇게, 읽고 싶은 책이 또 한 권 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