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예찬

내향적인 사람들이 모두 책벌레는 아니지만, 책벌레 치고 내향인이 아닌 사람은 많지 않다. 나 또한 활자 중독이 의심될 정도로 글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한다. 읽는 즐거움에 쓰는 즐거움까지 보태져 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한대로 발전했다.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한다. 서점, 도서관, 헌책방, 물성 있는 책, 물성 없는 책, 신문, 잡지, 오디오북, 문자, 북카페... 책과 글이 있는 수만 가지의 연결고리들에 빠짐없이 애착을 느낀다. 책이 있는 공간은 어디든 언제까지든 머물 수 있다.
방학을 한 학교 도서관은 늘 사람이 없어 한적하다.
고요하고 포근한 이 공간은 무더운 여름과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면 언제나 나만의 아지트가 된다. 나는 부지런히 그곳에 발도장을 남겼다.
왜 그렇게까지 책을 좋아하는지 나도 잘 모른다. 아마 종이의 질감, 책의 향기, 책이 주는 생각의 빈 공간, 마음의 안식이 되는 부드러운 말과 글 때문일 것이다. 적막 속 고요히 읽는 시간부터 종이 넘기는 소리까지 책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성을 오감으로 세세하게 기억하고 싶다.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방식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어치우지만, 역시 손에 잡히는 종이책을 가장 좋아한다. 누런 바탕을 빽빽하게 또는 드문드문 작가 입맛대로 채운 글자들이 빚어내는 조화는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도 책과 함께라면 무난하게 한 해의 절반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여가 시간을 가장 성실하게 보조하는 오락은 언제나 '독서'다.
형체 없이 저장되는 정보를 물성 있는 대상 속에 담았으니, 책이란 실로 오묘한 존재다. 책은 언제나 사람보다 먼저 나를 위로하고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마음 맞는 책 한 권과 보낸 시간은 소중한 벗과 보낸 시간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알차다. 그 어떤 스승보다 나를 강하게 흔들어 일깨우고 나의 무료함을 달래준다. 시 한 편을 읽다보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 그 속에 잔잔하게 보이기도 하고, 내 마음을 도둑맞은 듯 책에서 벌거벗은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슬픈 단어가 없어도 마음을 후벼파는 순간을 맞아 눈물 번진 시야로 책장을 넘긴 적도 많다. 책들은 하루에 몇 번씩 변변찮은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라고 수없이 권한다. 책이 없는 내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책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내가 완전하고 내 하루가 더 윤택하게 빛난다.
책은 교류의 도구이자 큐피트의 화살이 되기도 했다. 책 속 좋았던 구절을 옮겨 적어 슬그머니 책 사이에 마음을 담은 쪽지를 끼워넣기도 하고, 책을 선물하며 간접적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그와 나의 취향을 비교하며 서로간의 마음을 확인하는 매개체로도 사용하고, 돌려 읽은 책 한 권을 안주 삼아 몇 시간씩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책은 냉소적이고 무신경한 나에게 감성을 불어넣고 자기 중심적인 나에게 연민을 가르쳐주었다. 타인의 삶에 한 번 더 고개를 돌릴 호기심을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세월의 풍파에 취약한 만큼 읽은 자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책은 그만큼 사연 가득한 신비한 존재가 된다. 가끔 중고서점으로 책사냥을 떠나는데, 타인의 손때 가득한 헌 책들 가운데 구하고 싶어도 더는 구할 수 없었던 책들을 운 좋게 만날 때가 있다. 절판 도서, 몇 차례 중쇄를 한 베스트셀러의 초판, 이미 타계한 작가의 귀한 친필 사인본을 발견하노라면 그 기쁨과 행운에 형언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간된 고서이지만 출간 년도가 의심될 만큼 상태가 좋은 책을 발견하면, 왠지 모를 경외심이 드는 한편 책을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괜스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나는 집에서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책이 있으면 언제나 충만하다. 해마저 저버린 어둡고 쓸쓸한 오후도 책이 있으면 오후 2시의 맑은 기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불빛마저 희미해진 적막한 시간에도 오래된 수필 한 권, 너덜너덜한 공책과 연필 한 자루면 읽는 나와 쓰는 나로 시간은 완전해진다.
퀴퀴하고 타분한 종이 냄새와 책 넘기는 소리,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는 쓸쓸한 시간과 공간을 온기로 채우는 최고의 땔감이다.

2019.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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