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복숭아 - 꺼내놓는 비밀들
김신회 외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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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클럽문학동네 멤버십 대상으로 소량 제작된 가제본 도서 『나의 복숭아』를 완독했다.

김신회, 남궁인, 임진아, 이두루, 최지은, 서한나, 이소영, 김사월, 금정연. 9인의 나의 부족한 면, 나의 단점, 나의 비밀을 담아낸 에세이다. 왜 ‘복숭아’인가 하면, 알맞은 빛깔을 내며 여름을 상징하는 탐스러운 과일인 복숭아지만 한편으로 쉽게 무르는 성질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고.


책 뒤표지에 실린 짤막한 소개 글을 읽으며 나는 이 중 어떤 비밀에 가장 공감하게 될까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나는 이 복숭아, 저 복숭아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영해영역 7등급’이라며 제목부터 자신의 영해력에 대해 고백한 이두루의 산문에서는 쉽지 않은 글을 읽는 것을 재밌어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또, 움직이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를 단순하게 밝히자면 살기 위해서라는 김사월의 산문에서는 운동에 앞서 장비를 갖춘 뒤 유능한 모습으로 러닝에 집중하는 나에 취해서 운동을 한 번이라도 더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의 복숭아에 공감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고 보니 나는 복숭아를 고백한 이들의 모습 일부를 닮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진솔한 이야기 앞에서의 공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2. 책을 읽는데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준영이가 자주 떠올랐다. 왜 어떤 관계의 한계를 넘어야 할 땐 반드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아픔을 공유해야만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 하던 준영. 이 책을 읽고 나니 준영의 물음에 미미하지만 답을 건네 줄 용기가 생겼다.

비밀은 복숭아와 같다. 오늘의 내가 알맞은 빛깔을 내며 탐스러워 보일 수 있게 된 데에는, 쉽게 무르는 부족한 면과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조금씩 알아가 볼 것이고(김신회, 사랑을 모르는 사람) 노래 실력은 조금 아쉽지만 관대하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고(남궁인, 도-레-미-미-미) 긴장의 땀을 흘리던 자신에게 아주 좋은 것들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로 했으며(임진아, 좋지만 싫다) 영상이 편치 않지만 우선은 낙관적으로 생존해보기로 하고(이두루, 영해영역 7등급) 언제든 먹을 수 있지만 지금 먹지 않아도 아무 일 없다는 걸 알기에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며(최지은, 과자 이야기) 두려움과 술기운 말고도 내가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최대한 여러 가지이기를 희망하고(서한나, 나는 잠시 사랑하기로 한다) 식물세밀화가의 이미지 같은 건 없다고 외치고 싶지만 사람들이 상상하는 식물세밀화가로 변모해가며(이소영, 식물을 닮아가는 중) 대쪽 같은 믿음이 있어서 버티는 게 아니고 어쩔 줄 몰라서 이리저리 번민하다가 살아남고 강해지고(김사월, 창백한 푸른 점) 어떻게든 글을 쓰는 것도 결국엔 기억 때문이니 글을 끝낼 수 있다(금정연, 기억에 눈이 부셔서).

관계의 한계를 넘기 위해 공유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자리에서건 나의 복숭아를 꺼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린 서로의 복숭아를 손에 들고 친밀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밑줄 친 구절들


말이라는 추상은 기술과 자본 없이도 무한하기 짝이 없다. 무형의 무한을 존재 가능하도록 만드는 언어라는 도구는 단말기도 충전기도 필요 없는 필승의 오락이다. 이러한 심취가 가장 깊어진 이십대 초중반에는 신학과, 철학과, 사학과 강의를 들으며 사상사와 각종 경전을 팠다. 소위 '돈이 되지 않는' 탐구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것이야말로 취미의 정의일 테고 나는 그걸 대학에서 한 셈이다. 계시를 대하는 종교학자들의 관점을 찾아 읽거나 신정론 같은 주제로 갑론을박하는 것만큼 유용하지 못한 짓도 없을 것이다. 필생의 지식으로 극단의 추상을 논증하는 연구는 학자들에게는 생업이지만 그걸 읽는 내게는 완전히 유흥이다. 그런 책은 얼마를 읽어도 친구와 노는 자리에서 화제 삼을 일도 없고 그 지식으로 벌어먹고 살 것도 아니다. 그 감각이 좋았다. 그냥 혼자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정신현상학』 따위를 읽고 이해한 대로 정리해보고 까닭 없이 끌리는 부분을 베껴 쓰면서 놀았다. 30분 동안 겨우 두세 페이지를 읽는 그런 독서가 재밌었던 것은 터무니없이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문자와 문장이라는 형태를 얻어 책이라는 물건에 쓰이고, 그것이 읽혀 내 머릿속에서 다시 이런저런 추상이 되는 것이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다른 게 마술이겠는가?


(p.86-88)

요즘 또 즐겨 하는 운동은 러닝이다. 목표 시간과 장소 이외에는 정해둔 것 없이 집 주변 공원을 자유롭게 달린다. 모자를 눌러쓰고 바른 자세로 헉헉 달리다 보면 몸과 마음이 청소되는 느낌이 든다. 러닝이야말로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이지만 그럴수록 장비를 갖추는 재미가 있다. 예쁘고 편한 스포츠 브라, 마음에 드는 레깅스를 입고 애플 워치와 블루투스 이어폰을 챙긴다. 이렇게 운동하면 꼭 전문적이고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능한 모습으로 러닝에 집중하는 나'에 취해서 운동을 한 번이라도 더 한다면 그게 낫다. 어쩌면 좋은 기분이 드는 것 이상으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별로 없는지도 모른다.

(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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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픔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에선가 한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당신 몸에 난 흉터를 만지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이 부분이 진짜 좋아요."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견뎌냈다는 것」*

"진짜 좋다. 시는 참 좋은 거구나. 전엔 몰랐네."



*류시화 <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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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그런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뭐든 물어봐.
-넌…인간과 뭐가 다른 거야?
-난…너처럼 따뜻한 피나 부드러운 살갗 같은 것이 없어.
너처럼 깊은 파란 눈동자 같은 것도 없고. 헝겊 원숭이처럼…
네가 느끼는 것만 인간 같을 뿐 사실 속이 텅 빈 인형이야.
-그런 거라면…가장 별 것 아닌 것이 다른 거구나. 따뜻한 피. 부드러운 살갗…
…같은 것들이 한 번도 나를 안아준 적은 없었어.
하지만… 너의 말, 너의 사고. 모든 것 속에서 나는…
에녹……날 사랑하니?
-……B, 사랑이라는 건 일종의 호르몬 작용이야. 옥시토신, 세로토닌, 코리트솔 같은 호르몬들이… 

애착을 만들고, 행복을 주고… 때론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를 느끼게 해…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애착.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어렵겠지.
하지만 사랑을 생물학적 관점이 아니라 학습이나 감각과 사고 확장의 관점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확실한 게 있다면…나는 너로 인해…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고, 기다림과 그리움을 학습해. 

그렇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거겠지.
-…나도 …에녹 너를 사랑해.

(p.284-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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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있으면… 좀 더 나은 내가 돼.
그와 함께 있으면, 좀 더 용기가 생기고
현실을 똑바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좀 더 나은 내가 돼.

누군가는 나에게 이 사랑이 의미 없다고, 혹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저 집착일 뿐이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사실 아무도 내게 그런 말 할 수 없다는 건 내가 잘 알아요.
무의미하지 않아요.
그와의 연애는 현실을 마주 보게 해줘요. 모든 걸 극복하게 하는 것.
과거를 끊고 미래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
나를 똑바로 쳐다볼 힘을 주는 것.
세상 어느 것이 그것보다 유의미하고 위대할 수 있나요?

그건 예쁘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며 키워주는 자존감과는
비교할 수 없게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예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요.
사랑보다 위대한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라고 생각하겠어요.

(p.21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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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간판, 빛 바랜 광고…
빛 바랜 자판기, 빛 바랜 현수막…
회색으로 바랜 도시.

가끔씩 궁금하다. 해는 그렇게 모든 색을 다 가져가서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그러다가도…
해가 피워낸 형형색색의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p.93)



칼이란, 날이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무딜 때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거야.
부지런히 갈아둬야 다치지 않는다.
(p.139)



참고로 우리 집은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게 되면서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가족 회의가 있었고…

"흐음."
"뭐 어쩔 수 없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할 만큼 했으니 우리도 이제 그만해도 될 거야."

남자들의 차례가 되면 세상은 바뀐다.
(p.180)



누군간 레코드를 녹음하고, 누군간 글을 게시하고,
누군간 기록을 재고, 누군간 출마를 하고…
또 누군간 자식을 낳기로 결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각자의 방식으로 크레딧을
남기고 싶어하는 게 틀림없다고.
누구든 사는 동안엔 목격자를 필요로 한다고.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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