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심결에 지나치던 나무들이 실은 나도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는 나무였노라고, 제 존재를 드러내는 계절이다. 올해는 좀 많이 늦었다. 벚꽃지는 계절에 이제야 목련이 피어나고 있다. 벚꽃도 조금씩 피어나고 있다. 효창공원역으로 가는 그 허름한 길에 초라하게 서 있던 나무들은 '나도벚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 올해는 네 존재를 잊지 않으마.
봄은 벚꽃의 계절이라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목련을 좋아했다. 화려하게 와서 아름답게 지는 벚꽃보다는 나는 청아하고 기품있게 빛나다가 툭, 툭, 지저분하고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변해 생을 마감하는 목련에게 마음이 갔다. 햇살과 함께 빛나는 낮의 목련도 좋아하지만, 밤이 되면 홀로 오롯이 그 자리에서 스스로 제 존재를 빛내려 안간힘을 쓰는 목련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지지난 일요일 청파멘션에 갔다가 창가에 앉아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새 바깥의 나무에 꽃눈이 달려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 나무가 목련나무라는 걸 알아본다. 계산상 1~2주쯤 후면 꽃이 피겠구나 생각하고, 어제 투표를 마친 후 청파맨션으로 달려갔다. 오렌지 비앙코 한 잔을 시켜 잠시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목련을 바라보고,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목련을 바라보고, 하다가 온 것 같다. 갑자기 후두두둑 빗물이 떨어진다. 비가오나? 자리를 챙기려는데, 아, 어제 내린 봄비를 목련이 머금고 있다가 바람에 흔들린 거였다. 목련은 바람에 흔들리며, 머금었던 봄비를 뿌리며, 조금 더 제 몸을 열었다. 아. 목련이 피어나는 순간을 함께하고 있구나, 나는 좀 감동을 받았다. ㅠ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413/pimg_747707125752134.jp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413/pimg_747707125752136.jpg)
매년 목련이 필 때마다, 나는 책 한 권을 들고 청파맨션으로 가 오렌지 비앙코를 마셔야지.
2
하지만 이 기분을 오래 만끽하기엔, 4월 11일은 너무나 잔혹했다. 절대 예상 못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실은 누구나 힘든 싸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며, 어느 정도는 예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투표 전날이었나, 영호남 의석수를 보고 아, 기본으로 깔고 가는 좌석 수가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어지간히 이기지 않고서는 힘들겠다, 생각은 했지만, 예상을 했다고 해서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이 쓰라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출구조사 결과가 내게 너무 많은 꿈과 희망을 안겨줬었다. ㅠㅠ 분이 풀리지 않아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랑 새누리당은 시골당이라고 욕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은 시민이 아니라 백성인 것 같다고 욕하고, 욕하고 욱하고 욕하고 욱하고 ㅠㅠ 타임라인은 거의 '멘붕'이라는 단어가 장식했고, 나 역시 너무 속상했다. 게다가 새누리당을 지지한 그 시골들 땅덩이는 또 얼마나 넓은지 ㅠ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의, 우리 나라의 절반을 훨씬 넘는 그 면적을 뒤덮은 빨간 색을 보고 있자니 골이 띵했다. 예전에 빨갱이 빨갱이 하면서 빨간색만 봐도 민감하게 굴던 그 분들은 그 빨강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려나. 참, 파란만장한 빨강의 인생 같으니.
사실, 나는 통합진보당의 당원임에도 정당투표는 진보신당에 던졌다. 그들의 마지막 행보가 너무 멋졌기 때문. 그들은 마치 무너져가는 가운데서도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는 선비 같았다. 우스개로 '아, 진보신당의 저 미학적 완결성을 보라....' 라는 말도 했었다.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실은 당을 갈아탈까 생각도 했었으나, 그 때 한참 이정희 의원이 경선으로 힘들 때라, 힘들 때 탈당까지 하는 건 아무리 한달 몸담은 당이라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통합진보당이 13석을 얻은 것에도 박수를 보내지만, 진보신당, 녹색당의 고군분투가 멋진 선거였다. 진보신당 비례 1번 김순자 후보께서 오늘 아침, 다시 일터로 돌아와 동료들과 끌어안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오늘의 일을 시작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남긴 것을 보는데 어찌나 찡하던지. ㅠ 당신들은 마지막까지 그 존재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한표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사표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힘을 얻는, 밑거름으로 소중히 쓰이길 바랍니다.
이제 진보신당은 3%가 안되는 지지율 때문에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을 다음 선거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됐다. 1.2%를 얻은 기독당보다도 정당 득표율이 낮다는 건, 너무나 슬프고 화나는 일. (주여 ㅠ) 새누리당은 정당 지지율이 42.8%로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소선거구제, 1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이 제도 때문에, 과반이 넘는 의석 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민주 통합당과 통합 진보당의 지지율을 합하면 46.5%로 더 높은데, 의석 수는 훨씬 적다. 이게 현재 우리나라 소선거구제의 한계. 이걸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3
그런데 오늘 낮에 친구 y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어제 남긴 글을 보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고 작심한 y는 k 언니가 주축이 되어 진행하는 비례대표제 스터디 모임에 오라는 것이었다. 아. 어찌나 시의 적절한 낚시였는지. k언니는 오래전부터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을 준비하는 연구소에 선임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나는 대략의 내용은 알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선거를 마치고 나니 그래도 이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절실하게 도입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일단은 가보자며 퇴근 후 스터디 장소로 갔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나의 무식을 뽐냈다 -_-v 오랜 시간동안 고민해온 사람들에게, 평소에 궁금했던 이것 저것을 자유롭게 묻고 (하지만 너무 자유로웠지 ㅋㅋ) 몰랐던 것들을 좀 채워나가면서 (하지만 너무 몰랐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우리나라와 같은 1인 2표제로 한표는 지역구 의원을 뽑고, 한 표는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전체적인 의석 수는 정당의 득표율에 기반하는 제도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경우 어제처럼 정당 득표율이 나왔다면, 새누리당은 128석, 민주당은 109석, 통합진보당은 30석이 되는 것이다. 지역구에서 통합진보당이 3군데 승리를 했으면, 나머지 비례대표 자리를 27석을 줘서 총 의석 수가 10%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본인의 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한표 한표 모두 의석 수에 반영되기 때문에, 실제로 투표 참여 비율도 높다고 한다. (후진국일수록 투표율 높다고 한 변희재 사라져버려!!) 우리나라에서는 통합진보당에서 이 제도를 주장하고 있고, 전반적인 인식을 고려해볼 땐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런데 2004년 이후 3번의 정당 투표를 통한 비례대표제 선출을 경험한 것은, 이 제도 도입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이번처럼 그 차이가 눈에 띄게 보이는 경우는, 매우 설명하기도 설득하기도 좋을 것이다. 암튼, 당장은 내게 매우 매력적인 주제이고, 좀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당분간은 2주에 한번씩 이 모임에 참석해볼 예정이다. 워낙 쉽게 질리는 게 탈이긴 하지만.. ( '') 무지랭이는 탈피해야겠지. 아하하하. 요가 이후로 또 이런 무지랭이 분야로 뛰어들다니. (흠. 그래도 여전히 요가를 더 못한;;;;;다;;;;;)
암튼, 나는 고등학교 때도 정치가 싫어서 수능 선택과목으로도 우리학교 애들의 90%가 선택했던 정치를 선택 안하고, 경제 선택했었는데, 이런 나에게 이런 공부에 관심을 갖게 만들다니, 우리 사는 세상이 참 대단하긴 하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먼 길이라도 가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