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 허수경의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굉장히 가난한 집으로 촬영을 갔었는데, 방송이 끝나고 나니 시청자 게시판에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 집 할머니의 손가락에 왕방울만한 알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머니가 제작진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 반지는 할머니가, 그래도 방송에 나온다며,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낀 유리알 반지였다고 한다. (플라스틱이었나. 암튼 그건 중요치 않다)

가난하다고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던 신경림의 시가 떠오른다. 가난하다고 예쁘고 보이고 싶지 않겠는가. 자신의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찍으러 온 촬영진 앞에서도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공중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자신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 예쁘게 꾸미고 싶었을 그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야속하고, 그제서야 그럴 수 있겠음을 깨닫고 공감한 당시의 내가 야속해 나는 그 부분을 꽤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2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나는 구걸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사회적으로 그 분들에 대한 신뢰는 굉장히 낮은 편이고, 나 역시 그 분들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해야할지 잘 판단이 안서긴 하겠지만 누군가는 또, 자신이 무심코 지나칠, 정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사람 때문에 꼭 500원짜리를 준비해서 다닌다고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가 그런 부분에 쓸 수 있는 돈이 한정적이라면, 가급적 믿을 수 있는 기관을 거치게 하자, 라는 원칙을 정해놓고 있는 편이어서, 그 분들에게 선뜻 손길을 내밀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 분들을 볼 때마다, 저 분들은,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초라한 옷을 입어야겠구나. 해어진 옷, 빨지 않은 옷 같은 것을 입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는 조금 안타까웠다. 사실 저 분들 집에 멀쩡한 옷 한벌 없겠는가, 를 생각해보면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정서상, 멀쩡한 옷을 입었을 때는 동정의 정서가 생겨나기 어려울 것이므로, 그들은 일부러 혹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더러운 옷을 꺼내 입는다. 누군가는 작업복이 따로 마련돼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때 읽었던 그 글을 떠올리며, 그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많은 사람들 앞에 초라한 행색으로 나설 수 밖에 없는 그 마음은 어떨까. 특별히, 나와 연령대가 그리 차이나지 않는 여자분들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러하다.


3

토요일 오후, 모임을 위해 종로로 가는 길이었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 상황이었고, 내가 내릴 역에 거의 다 와갈 때쯤이었다.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리고, 할머니 한 분이 바구니를 들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이 할머니............
 
분홍색 쉬폰 원피스를 입었다. 하늘하늘하면서 걸어온다. 아무 무늬도 없는, 밝고 화사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어떤 사연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할머니의 마음이야말로 진짜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구걸을 나왔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좀 더 당당하게 예쁜 옷을 입고 싶었을 마음, 그게 오히려 나는 더 진심같이 느껴졌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런 작은 것, 낯설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들.

나는 얼른 지갑을 꺼냈다. 매우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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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09-08-2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들 앞에서 나는 매일 생색내고 짜증내고 심지어 욕도 해. 아...이를 어째.

웽스북스 2009-08-25 20:50   좋아요 0 | URL
언니 우리 아무래도 공정무역 스터디 끝나면
공정인격수양 뭐 이런걸로 넘어가야하지않을까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

라주미힌 2009-08-25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글 잘 쓰시네용. 정반합? ㅋ

웽스북스 2009-08-25 20:51   좋아요 0 | URL
우리 안지 2년 넘은 것 같은데 (생뚱맞잖아요 이런 반응!! --> 원래 잘썼다는 게 아니라)

바람돌이 2009-08-25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글 잘 쓰신다에 한표!!
저도 전에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이런 분들한테 지갑 잘 안열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그게 저의 자기 합리화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나의 하잘것없는 돈 몇푼이 저 사람에게는 한 끼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 싶어지는.... 그래서 요즘은 고민하기 싫어서 그냥 보이면 지갑열고 맙니다. 그게 제가 맘이 편해요.

웽스북스 2009-08-25 20:52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것 같긴한데,
저는 또 괜히 잘 안주게 되긴 하더라고요
판단이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긴 해요-

다락방 2009-08-25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번까지 다 읽고나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런 작은 것, 낯설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들.

제목만 보고는 웬디양님이 분홍색쉬폰원피스를 입었다는 글인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에요.

웽스북스 2009-08-25 20:53   좋아요 0 | URL
분홍색 쉬폰원피스 입고 만날까요 다락방님?
완전 단색 분홍은 아니지만요 ㅎㅎ

네꼬 2009-08-2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웬디양님 너무 좋아.

웽스북스 2009-08-25 20:53   좋아요 0 | URL
우리 누가 더 좋아하는지 배틀할까요?
(네꼬님이 나를, 또 내가 웬디를, 이렇게? ㅎㅎㅎ 농담)

또치 2009-08-2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웬디양님 너무 좋아 222222

그리고 이건 딴 얘긴데,
루시드 폴이 31일부터 EBS 라디오 <세계음악기행> 진행한대요!
지금은 이상은씨가 하고 있는데... 아아아 3시부터 4시까지 꼭 듣고 있을 테야!
웬디양님도 들을 거죠?

웽스북스 2009-08-25 20:54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아아아 또치님 또치님 ♡
이거 어떻게 들으면 되나요? 설마 새벽이 아닌거죠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는거죠 그러니까? (아아 폴님)

또치 2009-08-25 23:13   좋아요 0 | URL
응응! 매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랍니다~
오랜만에 가슴 두근거리게 신나는 일이 하나 생겼다능~~

웽스북스 2009-08-29 02:53   좋아요 0 | URL
흙. 하지만 전 일개대리 ㅋㅋㅋㅋㅋㅋ 또치부장님과는 급이 달..라요...흑

ji0158 2009-08-2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오랜만에 넘 이쁜 글을 읽었습니다.

웽스북스 2009-08-25 20: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종 뵈어요
0158 보니 015B가 생각날뿐이고~헤헷

Jade 2009-08-2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저 허수경으로 추측되는 글 읽은기억 나요. 아마도, 에메랄드 왕반지 운운했었지요. 호화 가구 어쩌고 하는 소리와 함께 ^^ 참 어릴적 읽은 것 같은데 당시 저도 참 묘한 기분을 느꼈었어요.

웬디양님 글 보니 좋아요! >.<

웽스북스 2009-08-29 02:53   좋아요 0 | URL
아아 제이드님도 읽었구나. ㅎㅎ 제이드님 근데 우리 올해 한번도 못만난거 알아요? 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