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고민을 하면서 내려왔다
택시를 타면 시간은 단축되지만, 아무것도 못하니까, 사실상 단축이 아닌 것도 같고
죽도록 피곤하면 택시를 타겠지만, 또 오늘은 그렇지도 않고

하여 지하철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내려왔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비가온다, 빗길에 택시를 기다릴 재간이 없으므로
나는 얼른 후두두둑 지하철 역으로 달려들어갔다


오늘 산 심보선의 시집을 가방에 넣어두고 오길 잘했다
예전 토지모임 때 니나가 읽어줬던 시가 좋아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딱 그런 느낌의 시를 읽고 싶은 날이었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
접힌 귀퉁이가 몇개인가
별 다섯개를 주고 싶은 시집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 심보선

1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느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

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
풍경의 남루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쌓이고 녹는다
그뿐이다
그리고 간혹 얕은 여울에서
윤나는 흰 깃털을 과시하며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오래전에 나는 죽은 새를 땅에 묻어준 것이 있다
그 이후로 다친 새들이 툭하면 내 발치로 다가와 쓰러지곤 하였다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유언들이란 얼마나 귀엽던지

한쪽 눈이 먼 이름 모를 산새 한마리
이쪽으로 뒤뚱대며 다가온다
지저귐, 새의 발랄한 언어가 없었다면
끄것은 단지 그늘 속에서 맴도는 검은 얼룩이었겠지만

3

나는 엄마와 가을의 햇빛 속을 거닌다
손바닥을 뒤집으니 손등이 환해지고
따사롭다는 말은 따사롭다는 뜻이고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

가을의 햇빛 속에서
다친 새들과 나와의 기이한 인연에 대해 숙고할 때
세상은 말도 안 되게 고요해진다
외로워도 슬퍼도 엄마의 심장은 디덤디덤 뛰겠지만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 자살자는
몸을 던지는 순간에 점프!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심장은 멈추기 직전까지
디디덤 디디덤 엇박자로 명랑하게 뛰었겠지만

그늘 속에 버려진 타인의 물건들
끄 흔해빠진 손바닥과 손등들
냉기가 뚜렷이 번지는 여생을 어색하게 견디고 있다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에

4

내게 인간의 언어 이외에 의미 있는 처소를 알려다오
거기 머물며 남아 있는 모든 계절이란 게절을 보낼테다
그러나 애절하고 애통하고 애틋하여라,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구나

아아, 발밑에 검은 얼룩이 오고야 말았다

햇빛 속에서든 그늘 속에서든
나는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기에
지금으로서는




슬픔이 없는 십오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 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시들이 대체로 긴 편이라 다 옮기지 못한 시들도 있지만,
이보다 더 마음에 쏙 들어와 박히는 싯구를 가지고 있는 시들도 많았다
잘 모르던 시인이었는데,
요즘의 답답한 마음에 꼭 들어맞는 시가 많아
나는 마치 횡재한 기분이 돼버린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나는 여전히 우산이 없어 걸어가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머리칼을 타고 이마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공단 원피스가 흠뻑 젖어버리자

나는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 순간은 오늘의 나에게
슬픔이 없는 십오초가 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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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7-24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교보문고에서 사셨다더니, 이 시집 좋지요?
저도 찜 해놓은 시인, 시집이랍니다.
소개해주신 시도 심상치 않네요 ^^

웽스북스 2008-07-24 17:26   좋아요 0 | URL
네 좋더라고요 ^_^
흐흐흣 hnine님도 사셔서 읽어보셔요

니나 2008-07-2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지요... 흐흐. 근데 나도 집에서 역이 5분거리인데 어젠 왜 비맞을 자신이 없었을까.(이건 내 블로그에 달아야하는 답글같기도ㅎ) 심보선은 동동주에 영혼을 팔은 다음날 상태마냥 어지럽고 휑휑하고 속쓰린 구절이 너무 많아. 가끔 읽을 자신이 안생기는 날이 있을만큼.



웽스북스 2008-07-24 17:27   좋아요 0 | URL
응 그렇더라
시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한두구절 콕콕 찍히는 것들 윽!

비로그인 2008-07-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잘 읽어내질 못했는데, 참 좋아요.


으이고..이런 시에 좋다는 말밖에 못한다니 전 역시 말초적이며 취향이 변질되어버렸나 봅니다.

다락방 2008-07-24 12:58   좋아요 0 | URL
Jude님.
저도 좋다는 말밖에 할수가 없는걸요.

웽스북스 2008-07-24 17:27   좋아요 0 | URL
저도 잘 읽어내질 못해서
참, 좋아요 라는 말 밖에는

전 역시 단순해요 ㅜ_ㅜ

그래도 쥬드님, 다락방님이 좋아요, 하시니....좋아요 ^^

람혼 2008-07-25 0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의 구매를 살짝 망설이고 있었는데, 웬디양님의 이 글을 보고 바로 제 몸 안으로 '지름신'이 강림하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웽스북스 2008-07-25 10:14   좋아요 0 | URL
어쩐지 아침에 지름신님이 람혼님께 잠깐 기거하다 오시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ㅎㅎ 그 시집 사실 때까지 저는 검약 모드 웬디가 잠깐 돼있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

L.SHIN 2008-07-2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좋은 시들인거 같은데, 글자색이 너무 눈부셔서..결국 중간에 중단..=_=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봐야겠어요.

웽스북스 2008-07-26 00:46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나중에 다시 볼 에쓰님을 위해
글자색 바꿉니다 흐흣

L.SHIN 2008-07-26 23:28   좋아요 0 | URL
"태양이 가슴을 쥐어 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 사람의 글 표현, 마음에 드는데요.(웃음)
(결국 다시 읽고 간 LS ^^)

웽스북스 2008-07-27 16:50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렇죠,
괜히 뿌듯한 W ㅎㅎㅎ

네꼬 2008-07-2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시집, 좋구나. 고마워요, 웬디님. 놓칠 뻔했네. (장바구니 직행-)

웽스북스 2008-07-26 00:46   좋아요 0 | URL
으흐흣~ ^_^ 괜히 쫌 기뻐요 네꼬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