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이제 오늘 발표를 끝으로 당분간은 오전에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일은 없을듯 하다. 이것도 여러 번 연속이 되니 좀 적응이 되서 그런지, 이번에는 별 긴장도 안되고 연습도 소홀히 하고, 스크립트도 안썼는데 끝나고 나니 스트레스가 쌓였었는지 가슴이 답답하고 오장육부가 뻐근하고 심장이 따끔거리는 기분이 든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심지어 엘레베이터 안에서까지 멀미가 나는 것 같은 날이다. 저녁에 민예총 강의를 들으러 가기 위해 (땡땡이치고픈 마음을 극복하고 ;; 오직 자체개근상을 바라보며 -_-) 화장실도 못가고 일을 마무리했는데, 아마 그 일이 하기 싫은 일이어서 스트레스가 더 심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가야겠다며 일을 겨우겨우 마무리해놓고는 금방 가기는 싫다며 과장님과 컵라면을 후루룩 먹고 가는 심리는 또 뭔지 ;;;

겨우 몸을 지탱해 강의를 듣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 개찰구를 막 통과하는데 길을 가는 나를 누군가 잡아 세운다. 저, 죄송한데, 제가 휴대폰을 잃어버려서요, 한 통화 빌릴 수 있을까요?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터라, 예, 잠시만요, 하면서 얼른 분주하게 음악을 끄고 휴대폰을 빌려줬다. 황급하게 전화를 거는 그 아가씨가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며칠 전 일이 생각났다.

제이드님과 대학로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던 날이었다. 워낙 휴대폰과 안 친해 본의 아니게 잘 놓고 다니곤 하는 나는 (4월에만 벌써 3번) 그날도 휴대폰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영화와 시간만 정해놓고, 정작 어디서 만나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제이드님을 만나려면 꼭 전화를 걸어야 했던 상황. 다행히 제이드님 전화번호는 지갑 속에 있는데, 휴대폰이 없다. 어떻게 만난담...

고민 끝에 옆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통화료를 드릴테니 휴대폰을 좀 쓸 수 없겠냐고 물었다. 흔쾌히 휴대폰을 빌려주신 아주머니는 물론 통화료는 받지 않았다. 사실 통화료를 받는 것도 좀 우습긴 하다. 나는 이 아주머니를 다시 볼 일은 없을테니, 이 아주머니에게 아마 평생 휴대폰 통화요금을 갚을 수는 없겠만 이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오늘의 빚을 갚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이 아주머니도 누군가에게 본의 아니게 휴대폰을 가져오지 못한 날, 누군가에게 휴대폰을 빌리며 오늘의 나를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사람은 그렇게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빚을 지고, 꼭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시 누군가에게 그 빚을 갚기도 하고 하며 살아간다는 것. 서로가 연결된 존재이기에, 내가 진 빚을 꼭 내가 갚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갚기도 하고, 당신이 내게 진 빚을 당신이 갚지 않더라도 누군가 갚아주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거니까, 나는 분명 이 빚을 누군가에게 갚게 될 것이고, 그것을 돌고 돌고 돌아, 아주머니에게까지 닿게 될 것이라고. 그래도 당장 오늘의 그 마음은 참 고맙다고. 이 모든 것은 누구나 순간의 작은 손해를 감내하는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니까.

예, 예, 휴대폰을 제가 찾아갈 수 있도록 어디에 좀 맡겨 주시겠어요? 제가 저녁에 급한 전화가 올 데가 있어서요, 꼭좀 부탁드릴게요. 예, 정말 감사합니다.

나에게 전화를 빌렸던 그 아가씨는 다행히 휴대폰을 찾았고, 저녁에 오는 급한 전화도 받을 수 있게 됐다. 나도 그날, 그 아주머니 덕분에 무사히 제이드님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 내게, 당신을 통해 그날의 빚을 갚을 기회가 주어졌듯, 당신도 언젠가 처음보는 누군가 당신에게 되돌려받을 수 없는 도움을 요청할 때 웃으며 손내밀 수 있는 기회가 오길. 그날엔 웃으며 잠시 나를 떠올려주길. 우리는 그렇게 연결돼 있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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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휴대폰은 택시를 타고 내 품에-
    from 오늘도 지구에서 일기를 쓰다 2008-04-17 15:50 
            【 기억 재생기 】 - 다시 보고 싶은 21세기         2007년 4월, 봄, 지금으로부터 딱 1년전       나는 핸드폰을 4번 잃어버렸다. 10년 안에. 4번. 많은건가? 적은건가? 상대적인 것이겠지만.(웃음)     처음에는 공중전화 박스의 전화기
 
 
2008-04-1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7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4-1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은혜 갚기의 사슬... 좋아요!

웽스북스 2008-04-17 01:1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죠 순오기님
저도 쓰면서 좀 기분 좋았어요
(이제 스스로 감탄하는 경지? ㅋㅋㅋㅋ)

승주나무 2008-04-17 16:41   좋아요 0 | URL
저는 순오기 님의 글을 '은혜 갚기의 사슴'으로 보았어요..
"사슴?" 하코 킄킄 웃었댔지요~
그러고 보니 웬디양 님은 꽃사슴을 닮은 것 같아^^
근데 꽃사슴이 어떻게 생겼죠? 꽃 모양인가~

아~ 그리고 웬디양 님 대문이미지 보고 아차 했는데,
김 양, 박 양 할 때 양이 아니라 '음메~' 할 때 양(웬디羊) 맞죠? ㅎㅎㅎ

웽스북스 2008-04-17 20:25   좋아요 0 | URL
역시역시 우리 승주나무님은 작업멘트의 귀재에요 ㅎㅎ
어찌나 이렇게 우러나는지 말이죠

그래도 눈 딱 감고, 고마워할게요~

라주미힌 2008-04-1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날 맨날 발표네요? ㅎㅎㅎ
월요일부터 한솥밥 먹겠네요..

2008-04-17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8-04-17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기교육반이에요? ㅋㅋㅋ 뭘 거쳐요..

웽스북스 2008-04-17 01:24   좋아요 0 | URL
하하 뭐 별건 아니고요 ㅋㅋㅋ
뭐 일종의 성격테스트같은거? ㅋㅋ

2008-04-17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7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7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7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7 0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04-17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의 보은인건가요???

웽스북스 2008-04-17 10:03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쫌 한보은 합니다
막이러고 ㅋㅋㅋ

Jade 2008-04-1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과 라주미힌님의 한솥밥이라니 ㅋㅋㅋ

웽스북스 2008-04-17 10:04   좋아요 0 | URL
한솥밥은 거의 못먹을듯 하고
한정수기 물정도? ㅋㅋ

개인주의 2008-04-17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웬디양님

웽스북스 2008-04-17 13:35   좋아요 0 | URL
앗, 그런 과찬의 말씀을 ㅋ

무스탕 2008-04-1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일이에요 :)

웽스북스 2008-04-17 13:36   좋아요 0 | URL
흐흐 ^_^
그런데 지성이 너무 멋있어요 ㅜㅜ

세실 2008-04-17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착한 웬디양님^*^
울 아들 수시로 휴대폰 빌려 쓰는데 제가 갚아야 겠어요. 저두 부지런히 빌려줘야지~~

웽스북스 2008-04-17 13:36   좋아요 0 | URL
오오 세실님 바로 적용 들어가시는 사건~ ㅋㅋ

가시장미 2008-04-1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그런 일이 있었군요. ^^ 남을 믿는게 참 힘든 세상인데..
그래도 믿어주고 선행을 베풀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살만한 거겠죠.

아니, 그런데 왜 라지미힌형이랑 웬디님이 한정수기 물정도를 마셔요? 잉~
둘이 어떤 사이예효?! (왠 관심? 왠 질투? ㅋㅋ)

웽스북스 2008-04-17 13:38   좋아요 0 | URL
주민이형이랑 저랑 한솥밥은 못먹고 한정수기 물정도 마시는 사이가 됐어요
그런 사이는 뭘까뭘까 ㅋㅋ

별거 아니면서 꼭 신비주의 놀이 하고마는 이 심뽀는 또 뭘까뭘까 ㅋㅋ

개인주의 2008-04-1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험 땜에 마찰 생기고 무심한 설계사라고 가입보험회사 싸이트에 민원을 넣었더니 소장이 연락오고 뭐 그러는군요. 그러고 생각해보면 저도 주는걸 좋아하는 경향도 있지만 남한테 당한 빚(?)은 꼭 갚아주는 갈데없는 쪼잔한 성격이구나 싶습니다.; 이린 빚은 안갚고 쟁여둬야 통이 큰 사람인거죠?;;

웽스북스 2008-04-17 23:55   좋아요 0 | URL
음 그건 당연한 것 같은데요
조금 다른 문제에요

저도 그런 면에서는 얼마나 까칠한데요 ;;;

Koni 2008-04-18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뜻~ 휴대폰 빌리기 어렵더라고요. 정말 다행이에요.^^

웽스북스 2008-04-18 14:20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그걸 거절하는 것도 참 쉽지 않을텐데 말이죠..

암튼 따뜻했다니다행이에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