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사회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3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철이 든 이래 문학과는 좀체 친해지지 않았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뉴에이지(문학 쪽에서는 뉴웨이브) 트렌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첫 번역이 나온 곳이 정신세계사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지만(나는 정신세계사 팬이다. 웬만한 정신세계사 책은 거의 다 사거나 읽어보려 하는 편이다.),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영향인지, 2000년대 들어 순수문학의 퇴조와 장르문학의 전면부상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2004년만으로 보았을 때는 판타지가 수그러드는 대신 추리-스릴러가 바톤터치를 한 듯하다) 고상하신 문학평론가 집단 일부에서는 문학의 타락이네 위기네 어쩌네 하셨던 것 같은데, 내가 볼 때 장르문학의 발전은 단순히 글쓰기 테크닉만이 아니라 신화적 상상력의 해방이란 점에서 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나같이 문학과 담 쌓은 인간까지 끌어들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실에 있던 <걷는 식물 트리피드>와 같은 SF문고들을 접해본 내게, 이 책은 SF의 개념정의에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적인 지식들이 찔끔찔끔 언급되긴 하지만 그 난이도는 고등학교 과학 수준을 넘지 않는다.  결국 <신들의 사회>에서 서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도 신화와 종교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SF로 규정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신개념 판타지소설의 일종으로 이해한다. 꼭 중세 유럽풍의 배경만을 판타지로 규정하는 것도 사실 하나의 편견 아닐까?

유감스럽게도 젤라즈니의 다른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앞 리뷰들이 스무 개나 달린 이 책을 논한다는 건 좀 부담스럽긴 하다. 그러나 그 리뷰들이 감상적인 찬사 비중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기에 나는 약간은 분석적 차원에서 몇 자 적어본다.

많은 리뷰어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높게 치는 것을 SF와 인도 신화를 믹싱해낸 풍부한 상상력이라고 언급하는데, 그 점 역시 공감하기 어렵다. 분명히 인도 신화의 코드를 차용하긴 했지만, 각 신들의 캐릭터를 좀더 극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해 본래 인도 신화 체계가 갖는 통일적인 판테온을 훼손하고 헝클어놓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파괴신으로서의 시바의 이미지를 정형화하기 위해 문예신으로서의 나타라지(춤추는 시바) 이미지 등을 아예 도입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 예이다.

내가 높게 보는 것은 소재의 기발함이나 상상력 등 외피가 아니라 오히려 문학적 글쓰기다. 지금 한국에서 판타지 붐이 꺾이는 것은 문학적 글쓰기 훈련이 되지 않은 인스턴트 작가들이 그저 신화적 요소들을 물량공세식으로 작품 않에 쓸어담으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 처음엔 고유명사들이 신기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문학적으로 탄탄한 기반이 없는 창작활동은 소재가 동양이든 서양이든 결국 대여점 무협지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이다.(실지로 요즘 서점가에서 판타지로 분류하는 책들은 대부분 대여점용 1회용품이다) 그러나 젤라즈니의 글은 약간은 냉소주의적이면서도 코믹한 위트와 재치가 톡톡 튄다. 브라흐만과 샘의 토론(105~111페이지)나 야마와 샘의 조우(181~193페이지) 등이 대표적인 예. 그러면서도 가끔 철학적 깊이가 담긴 문장을 던져주는데, 그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악업이란 우리 친구인 신들이 원치 않는 모든 것들을 뜻하네"(95페이지)

그렇기에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샘과 니리티 사이의 멋진 사상논쟁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 6장까지에서 그려진 샘 정도의 캐릭터라면 그럴 만하지 않는가? 하지만 결말은 다소 조잡한 전투 장면 묘사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 점이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이 책은 판타지라고 하면 반지의 제왕 아류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다른 차원의 재미를 보여준다. 장르문학 팬들에게만이 아니라 책읽기를 좋아하는 모든 이들에게 창조적 사고를 자극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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