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한 세대 뒤에 영화가 예술로 불릴 수 있다면, 그건 타르코프스키 덕분일 것이다."

<제7의 봉인>으로 유명한 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평가다. 순수하게 영화학적인 관점에서는  작가주의에 충실한 감독으로 평가받는 듯하지만, 내가 보는 관점은 좀 다르다. 그는 단순히 예술성이 높은 영화를 만들려 했던 게 아니라,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이 써놓은 리뷰들을 보면 온갖 전문용어와 카메라 기법들이 어쩌구 하면서 현학적 분석에 매달리는 가운데 머리가 아파온다. 사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려 했던 것은 지극히 간단한데...

위 장면은 그가 이탈리아로 망명한 뒤 만든 <향수 Nostalghia>(1983)의 한 장면이다.  외면적 줄거리는 18세기 이탈리아로 망명한 러시아 작곡가 소스토프스키의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향수를 표현한 것일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적 고향, 근원적 순수성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것이라 느낀다. 이 작품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을 함께 감상하다 보면 그 점이 이해가 될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영적 성장을 담고 있다. 자서전인 <봉인된 시간>(1991)이 카톨릭 출판사인 분도출판사에서 처음 나온 것도 그런 이유이고,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가 소련 당국에 의해 혹독하게 비판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소스토프스키의 자취를 찾아가던 고르차코프가 온천에서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들고가려는 장면...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의 지루함에 짜증을 냈다.(롱 테이크 기법으로 촬영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홍콩영화와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현란한 앵글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이 장면은 예술영화가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느낌, 나쁜 인상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지루함이 다람쥐 쳇바퀴돌듯 하는 우리의 삶에서 뭔가 더 성장하려는 가냘픈 노력(그러니까,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지루한 짓거리)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목적이라는 느낌에, 보고 있는 동안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도를)아는 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고르차코프가 에우제니아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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