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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속 역사 여행
신병주. 노대환 지음 / 돌베개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 들어 끝없이 세분화되고 정밀한 분야를 파고들던, 그것이 곧 학문의 발전이라 믿어 왔던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그러한 경향을 반성하게 된다. 분할이 아니라 종합을 지향하며, 전혀 다른 연구 방법론으로 발전해 갔던 타 분야의 성과를 수용하려는 새로운 경향, 이른바 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ery approach)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경향, 인문학의 양대 산맥이라는 문학과 역사학의 퓨전 컨셉에 대중을 위한 글쓰기가 잘 어우러진 책이다.
역사학의 뒷길에는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무수히 숨어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단순히 재미있는 가십거리들일 뿐,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 채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기록학의 무덤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필력이 있는 글꾼이 그런 소재를 시대정신과 연결시켜 풀어냈을 때, 그 스토리는 겨레의 정서에 길이 남는 전통문학 명저가 된다.
이 책은 16편의 조선시대 소설들을 수록했다. 홍길동전,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작품도 있거니와 임진록이나 은애전과 같이 좀 생소한, 그러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이 점도 매력이다. 대중적 코드를 이용해 독자를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읽으면서 자신의 교양 수준을 약간 더 높일 수 있다는 유혹을 던지는 것이다.
300쪽이 약간 못 되는 분량에 16편이니 편당 평균 20쪽으로 잡으면, 지하철 서너 정거장이나 차 한 잔 하며 쉬는 틈에 한 편을 읽기에 딱 좋은 구성이다. 참고문헌 목록은 뒤에 실어놓았지만 각주는 없다. 각 편의 첫머리에는 한 페이지 분량으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문학), 본문은 그 작품을 쓴 역사적 배경과 주요 사건의 진행 추이, 갖가지 학설들을 소개하고(문학+역사학) 맨 뒤에는 그 무렵의 역사적 사회 현상 가운데 흥미로운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칼럼(역사학, 예를 들어 홍길동전이라면, '역사 속의 서얼들')의 구조로 되어 있다. 효율적인 구성으로 읽기 편하면서도 자잘한 정보거리들이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저자의 묘라든가 유물, 소설의 판본 사진 등 시각자료의 배합비율도 적절하다.
아쉬운 점은 우선 역사학자 둘이 쓰다 보니 국문학 쪽의 연구성과가 반영된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동안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꽤 될 텐데, 참고문헌 목록에는 고전소설연구에 관한 단행본이 몇 권 보일 뿐이고, 내용 면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시각을 볼 수 없으며 발견된 판본 이야기와 그를 통해 본 당시 사회상 설명에만 치우쳐 있다. 물론 이건 역사학 쪽에서 본 문학, 즉 중심점이 역사학에 있기 때문에, 서술 구조도 기본적으로는 역사학 저술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 꼭 문학 연구의 성과들을 나몰라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공저가 역사학자와 문학자였다면(어쩌면 그럴 경우 둘이 각자의 입장 때문에 싸웠을지도 모르지만) 이 점은 보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음으로는 고전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금오신화>가 빠져 있는 것이 눈에 띤다. 물론 <금오신화>는 중국 전기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우리네 조선시대 사회상과 연관지어 이야기할 부분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편당 할 이야기도 그리 많지 않고 16편이나 되는 고전소설을 실었으면서 금오신화를 빼놓은 것은 좀 아쉽다.
또 <계축일기>와 <한중록>은 사실상 소설이 아니므로, 범주 설정에서 약간의 혼란이 보인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겠다. 가치가 높은 궁중문학이긴 하지만 에세이지 소설은 아니니까...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역사서로서 손색 없는 훌륭한 작품이라 본다. 이런 책을 보다 보면, 인문학의 위기니 어쩌니 하는 말들은 자기변신의 시도 없이 시대 탓만 하는 나약한 넋두리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