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김용만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은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고 나서 처음으로 별 다섯 개를 주는 책이다.  애초 서재를 꾸미면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좋은 책'은 별 넷으로 평가한다는 원칙을 두었었다. 그러나 이런 책에도 별 다섯을 주지 않는다면 결국 추천할 만한 책이 몇 권이나 되겠냐는 생각에 최고점을 주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김용만의 저서를 읽는 것은 이것이 세번째다. <고구려의 발견>에 이어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를 읽고 나서 가장 신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 관심이 생겼던 것이다. 저자의 다른 저술들을 찾아보니 박사학위 논문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을(대표작이며 따라서 가장 자신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책으로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가 있지만,  신간을 포함하여 세 권 정도 읽었다면 대충의 스타일은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해 리뷰를 써 보기로 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균형 잡힌 시각이다. 기존의 7세기, 특히 중화제국과의 대결국면에 접어든 삼국시대 인물들은 극단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나라를 말아먹은 의자왕, 불굴의 의지 김유신 등등...  따라서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으니 아마 단재의 민족사관류 저술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실증사학이 문제가 많다고 보면서도 한단고기와 민족사관도 헛점이 많은 까닭에 그 계열 상고사 책들을 볼 때마다 아쉬움을 삼켜왔었다.

그러나, 김용만의 추론은 절묘한 선을 지킨다. 기본적으로 철저히 문헌에 의거하면서도(각주에 인용된 한문 원문 문장의 꼼꼼한 처리를 보라!) 자신의 상상력으로 대충 스토리를 그리는 게 아니라 개연성이 몹시 높은 다른 가능성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그리고 그 원전 문헌들이 어떠한 시대적 사상적 배경에서 윤색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한 소리 한다. 마치 잘 다듬어진 추리소설을 보는 기분이다.

칭찬하고 싶은 또다른 장점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본다는 것이다.  후대 유학자에 의해 씌워진 유가 도덕주의적 비판을 벗겨내고, 뛰어난 전략가로서의 능력을 발굴해내면서도, 고구려의 운명을 연개소문과 무의식중에 동일시해왔던 틀에 박힌 사고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나 있다. 연개소문은 그냥 연개소문일 뿐, 고구려가 무너지고 당이 흥성한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예정된 코스에 가까왔다는 인식이다. 중원의 풍부한 자원공급과 체제정비, 다양한 북방 유목민족을 감싸안는 열린 시스템... 그에 비해 고구려는 고인 물이 되어버린 귀족 지배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대부분의 국지전에서 우세를 보였음에도 결국 총력전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그의 논거를 따라가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그밖에 아래 려휘님 리뷰의 지적처럼 천리장성을 장벽 라인이 아닌 거점 중심 네트워크로 이해한 것도 신선하며, 고구려 수군의 위상에 대한 재조명도 가치 있는 논증이다. 또 거란 통제를 둘러싼 줄다리기, 설연타의 움직임에 주목한 부분 등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나름대로 고구려사에 관한 책을 상당히 많이 읽었다고 생각해왔던 편인데, 그만큼 저자가 새로 발굴해낸 컨텐츠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제 리뷰어로서도 균형을 잡기 위해 아쉬운 점을 꼽아보자면, 비교적 점잕게 표현했지만 당태종 이세민의 개인적 야욕에 대한 비판이 조금 감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 있고,  백제와의 동맹이 성립된 배경이라든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밝혀볼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일본 관련 서술의 경우 <일본서기>에 그려진 고구려상이 매우 다른 시각으로 풍부한 내용을 전하는 만큼(저자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활용했지만) 중국 사료와  6:4 정도의 비중은 되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지금은 8:2 정도)

선비는 사흘을 만나지 않았으면 눈을 비비고 봐야 한다던가... 1998년에 나온 <고구려의 발견>, 2001년에 나온 <인물로 읽는 고구려사>에 비해 이 책은 학술적 수준이나 재미 면에서 크게 진보했다.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지만, 계속 노력해 가며 자신의 가치를 높여가는 열정적 연구자의 저서를 기다리는 것도 기분좋은 일이다. 김용만은 아직 젊은 학자인 만큼, 앞으로 내놓을 책들에 큰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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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8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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