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
지배선 지음 / 청아출판사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바로 아래 쓰신 '기랑'님의 리뷰가 맥을 잘 짚었다고 생각해서 사실 굳이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해서 고구려사가 사람들의 이목을 점점 끌기 시작하는 추세라, 충실한 리뷰가 많은 것도 다음에 좋은 책이 나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에 몇 마디 적으려 한다.

우선 좋게 평가할 만한 것은 디지털 복원 전문가를 동원해서 그래픽 시뮬레이션을 도입했다는 점. 그러나 시각적 이미지 고증에서 당대 유물 발굴 보고서나 복식학 연구 성과를 반영한 부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갑옷이 사슬갑옷인지, 금속판 갑옷인지, 보병 및 기병의 병장기는 길이가 얼마 정도이고 어떤 모양을 갖추었는지 안서도호부 당군 군기는 무슨 색에 무슨 무늬를 수놓았는지, 성벽의 구조는 어땠는지 등등... 

  그렇다면 결국 상상으로 그럴 듯하게 그려냈다는 소린데... 이 책은 역사 연구서이지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이 아닌데 그런 식이라면 아니 함만 못하지 않은가? 그래도 시각적 이미지를 강화하여 역사 컨텐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별 두 개를 줄 수는 있다.

두번째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책 뒤에 붙은 참고문헌 목록. 한국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한문, 일본어, 심지어 아랍어 사료들까지 수록해놓았다. 물론 이 책의 집필을 위해 다 찾아본 것은 아니라 본다. 본문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책들도 상당수 있어, 과시 효과를 노린 냄새가 많이 난다. 하지만 이렇게 충실히 정리해 주니 더 공부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듯하다.

단점으로 우선 눈에 띠는 것은 중언부언하는 문체가 너무 많다. 원사료도 아니고 연구서 내용을 뭉텅뭉텅 인용해놓고,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둘째, 세째" 하는 식으로 나열하는데 가만히 읽어보면 첫째와 둘째가 격이 맞지 않는 경우도 많고, 인용부 문장을 그대로 읽어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을 굳이 어지럽게 늘어놓아 내용을 부풀리는 측면이 강하다.

예를 들어 185~186쪽의 석국 정벌 기사를 보면, 아마도 최초에는 아랍, 티벳사료를 비교해서 상황을 묘사했을 크리스토프 베크위쓰 교수의 저서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 다음 지 교수의 설명은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라고 쓴 뒤 "첫째, 고선지를 중국 왕으로 표시했다...(중략) 둘째, 고선지가 10만의 병사를 동원했다...(중략) 셋째, 고선지가 무자비하게 석국을 약탈했다..."로 이어진다.  이건 전혀 '분석'이 아니다. 그냥 다른 학자의 책 내용을 되새김질한 것이지. 특히 첫째 부분은 베크위쓰 교수의 실수(고선지를 중국 왕으로 표시)를 물고 늘어지는 데 한 페이지를 소비한다. 굳이 그러고 싶었으면 각주 하나로 "아랍 사료는 고선지를 '중국 왕'으로 잘못 기록했다' 정도면 충분할 것을 쓸데없는 데 지면을 낭비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화려한 각주와 참고문헌 목록으로 무장한 정통 연구서답지 않게 "~일 것이다" "~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했던 모양이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등의 정황증거성 추정 내지 본인의 주관적 추측을 남발한다는 점. 특히 고선지를 혹평한 사료를 공격하고 고선지를 추켜세운 사료를 찬양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눈에 거슬릴 정도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269쪽을 보면... 확실한 근거 없이 원사료를 멋대로 재단하는 면이 보인다.  아니, 사관은 한 인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씹던가 찬양해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단 말인가? 한 인물에 대해 부정적인 기술과 긍정적인 기술이 섞여 있는 것이 '뜻밖' 이라니...???

<구당서>의 찬자가 반란군의 제1차 동관 공격을 좌절시킨 것이 고선지의 공로였다고 기술한 것은 뜻밖이다. 왜냐하면 <구당서>의 찬자는 고선지의 공을 시종일관 깎아내리려 애썼던 중국 측 사가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가 <고선지전>의 끝 대목에 와서야 고선지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일까? 또 왜 이 대목에서 끝을 맺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구당서>의 찬자가 고선지를 의도적으로 폄하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그 때문에 그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볼 생각으로, 비록 한 번이지만 마지막 대목에서 장군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또 고선지의 긍정적 캐릭터를 너무 강조하려다 보니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인들을 학대한) 당조에 일관되게 충성을 지킨 무장'으로 묘사하는 결과가 되어버려 우스운 결론이 나온다.

그외에도 제지술의 전파를 가지고 유럽문명의 아버지니 어쩌니 비약하는 것은 서양사학계에서 발끈할 문제지만 대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논박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이 책은 강력 비추 도서이다.  이 분야 전문서는 아예 없었던 만큼 정보 확대란 면에서 약간의 가치는 인정할 수 있으나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요점을 메모하는 정도이면 족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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