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9 근데 엄마, 지식이랑 지혜가 뭐가 달라?
이번 달은 '느린 학습자의 엄마' 페이퍼를 쉬고 딸과 함께 상반기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의 딸은 북한군도 무서워 차마 남하하길 꺼리게 만든다는 중 2다. 그러나 사춘기 특유의 틱틱거리는 말투와 온 방을 어지럽히는 난잡함을 제외하곤 이 친구는 엄마아빠 앞에서 아직도 쫑알거리기 좋아하는 수다 소녀다.
작년에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자 딸이 내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싶다고 말했다. 중딩 녀석이 고전을 읽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책을 건넸는데, 놀랍게도 줄거리 요약을 나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재밌다며 두 번을 읽었고 다음에 또 읽겠다고 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읽고 좋았거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 생기면 딸에게 던져주고 선택권을 주었다. 앞부분을 읽고 흥미가 당기거든 계속 읽으라고.
1. 배삼식 <<1945>> (6월)
얼마 전의 일이다. 딸이 몸을 둥글게 말고서 침대에 딱 달라붙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래도 몇 마디 해줘야겠다 싶어 딸을 식탁으로 불러앉혀 대화를 시작했다.
ㅡ 딸아, 엄마가 저번에 한 말 있지?
ㅡ 또 잔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뭔 말 말이야?
ㅡ 네 나이가 지혜가 발달하는 시기라고. 14살부터 25살까지 형성된 지혜의 힘으로 이후를 살게 된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핸드폰만 자꾸 하고 있으면 지혜가 만들어질까?
ㅡ 근데 엄마?
ㅡ 응?
ㅡ 지식이랑 지혜가 뭐가 달라?
ㅡ 오호. 굿 퀘스천. 완전 좋은 질문인 걸. 우리가 얼마 전에 <1945>라는 작품을 읽었잖아.
ㅡ 응. 그랬지.
ㅡ 1945년에 무슨 일이 있었어?
ㅡ 우리나라가 해방됐지.
ㅡ 맞아. 그건 지식이야. 그런데 해방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디?
ㅡ 아니.
ㅡ 그지. 해방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지 않았지. 여전히 할 일이 있고, 극복해야 할 애로가 있고, 사람들 간의 갈등도 심했어. 그렇게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거, 해방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만은 아니었구나를 깨닫는 것, 그런 게 지혜야. 알겠니?
ㅡ 으흠. 쪼옴.
이 대화를 나눈 후 딸은 줄거리 요약만 한 독서기록장에 느낀 점을 추가로 써넣었다.
"해방 이후 모두가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 이 책은 나에게 새로운 눈과 귀를 붙여 주었다."
2.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월)
딸도 나도 재미있게 읽은 소설집이다. 이야기와 과학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표본 같았다. 딸은 각 작품마다 한줄평을 썼다. 나는 리뷰를 쓰지 않았다.
"소피는 아마 슬렌포니아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한다면 그녀가 슬렌포니아로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가한다. 나는 언젠가는 나만의 슬렌포니아를 찾고 싶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재경은 어쩌면 그 무수히 많은 기대와 시선들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목숨 걸고 볼 만한 풍경은 아니네"라는 문구에서 솔직히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치만 나도 재경처럼 바다에서 인어처럼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김초엽은 어린 나이인데도 사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것 같아 대단하다.(<나의 우주 영웅에 대하여>)
3. 서현숙 <<소년을 읽다>>
이 책은 내가 읽고 너무 감동하여 딸에게 배경 설명을 해준 뒤 꼭 읽어볼 것을 권했다. 너와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사는 소년들도 있다는 사실을 딸도 알았으면 했다.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읽고 감동했다고 해서(딸도 감동했다), 딸의 행동이 달라지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이 친구의 마음에 큰 파도는 아니더라도 잔잔한 출렁임은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딸은 소년원 친구들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그 글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앞으로는 사회에 나가서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이랑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물론 범죄는 빼고) 그리고 나가서도 책은 꼭 가까이 해줬으면 해. 솔직히 나도 인정하긴 싫지만 책은 의외로(?) 배울 점이 정말 많거든."
4. 박완서 <<엄마의 말뚝>> (2월, 5월)
나는 박완서 소설을 몇 권 읽었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올해 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책은 알라딘에 10주년 기념판이 뜨자마자 딸과 같이 읽어야겠다 생각했고 그림이 곁들여진 맑은소리 판본을 구입했다. 딸에게 소설 속 엄마와 너거 엄마가 누가 더 억세냐고 물었을 때 딸이 한 대답은 "오십보백보"였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어미의 말뚝에 대해 생각했다. 내 어미를 억척스럽게라도 살게 했고 나를 키우게 했던 것을. 또한 내 딸이 엄마를 회상할 때 떠올리게 될 말뚝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것은 필시 책일 것이다.
5. 메리 W. 셸리 <<프랑켄슈타인>>(3월)
나는 이 책을 2016년 여름에 읽었다. 이 책을 한 달 내내 끼고 살 때 당시 초딩 3학년인 딸이 내게 재밌냐고 물어 줄거리를 말해주고 몇 대목을 읽어주기까지 했다. 마지막 장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죽고 괴물이 북극 탐험가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대목을 읽다 울컥했더랬다.
ㅡ"나는 사랑과 우정을 갈망했고 여전히 배척당했고. 그건 부당하지 않은 거요? . . . 나, 흉측하고 버림 받은 이 기형아는 멸시당하고 따돌림 받고 짓밟힐 운명이고, 그 부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끓어오르오."(289) . . . . . .
ㅡ 엄마? 엄마? 울어? 목소리가 이상해.
ㅡ 으으응. 괴물이 너무 불쌍해서 . . .
책을 덮은 뒤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괴물이 사람을 죽이는 진짜 괴물이 된 건 프랑켄슈타인 박사 때문이었다고. 낳기만 하면 안 된다고. 낳았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그게 어른이라고. 그 날로부터 5년이 흐른 지난 3월, 딸은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책의 구성을 이야기 형태가 아닌 편지 형태로 구사한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피조물'이라는 단어가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빅터도 불쌍하고 괴물도 불쌍한 베드, 세드 엔딩이 안타까웠다. ㅠㅠ"
6. 조지 맥도널드 <<공주와 고블린>> (3월)
어슐러 K. 르 귄의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서 리뷰를 읽고 너무 좋아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냉큼 대출해 읽은 책이다. 딸이 먼저 읽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공주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각성',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의 선택의 이야기로 읽었는데, 딸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보통 공주 이야기하면 공주와 왕자가 대부분인데, 공주와 고블린이라는 주제가 신선하였다. 그리고 . . . 커디의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을 응원한다. 크흠 . . . 그리고 공주의 할머니가 부러웠다. 나도 공주의 고조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계셨으면 좋겠다."
7. 김흥모 <<홀>> (4월)
내가 먼저 읽고 딸에게 건넸다. 딸은 이 책의 줄거리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에 썼다. 딸과 내가 우리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 똑같아서 신기했다. '나라면 과연 김씨 아저씨처럼 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를 돕는 길이 그와 그 가족의 삶을 망치는 길이 되지 않게 하려면 국가와 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8.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5월)
내가 이 책에 등장하는 부모에 대해 분개한 것과 달리 딸의 태도는 덤덤했다. 다섯째 아이 벤이 정말로 무섭고, 진짜 악마 같았다면서 이렇게 덧붙여 썼다.
"벤은 한편으로는 악마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랑받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를 표현하고 있다. 벤의 이러한 행동들은 마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케 한다. 그로 인해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더욱 깊은 공감과 공포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9. 태 켈러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5월)
자기 또래가 등장하는 데다 우리의 전래 동화 <해님달님>을 소재로 쓴 소설이어서 그런지 딸은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10점 만점 9점을 주었다. 내 경우에는 어릴 적 동네 친구들, 언니오빠들과 밤에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며 소리 질렀던 추억을 소환시켜준 책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특히 딸과 엄마의 관계가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릴리, 나랑 할머니 관계는 끝난 게 아냐. 변했을 뿐이지."
"나는 뭐든 안 변했으면 좋겠어."
엄마가 내게 꼭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듯 나를 골똘히 쳐다본다.
"릴리, 모든 게 변해. 그건 정상이지. 우리 사이가 변했다고 해도 내가 네 할머니를 그만 사랑한 적은 없어. 그래서 우리가 여기 살러 온 거야. 내가 우리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우리 모두가 할머니를 사랑하고. 그리고 할머니가 병 때문에 잠깐 보이시는 행동들이 무서울 수 있다는 거 알지만, 할머니도 너희 사랑하셔. 그 잠깐씩의 낯선 모습들, 할머니가 아니고 할머니 병이야."(255쪽)
10.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
잠자냥님 리뷰를 보고 냉큼 구매했으나 바쁜 일로 딸에게 먼저 던져주었다. 좀 무리한 독서가 아닐까 염려했는데, 역시나 웬걸 이번에도 줄거리 요약을 쌈박하게 해놓았다. 그런데 제목이 왜 '황금 물고기'냐고 물었더니 너무나 쿨하게 "나도 몰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으이그. 하여 역자 해설을 읽어보라 권했더니, 기억에 남는 글귀를 해설에서 그대로 베껴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또 으이그. 딸은 내게 스포일 수 있으니 줄거리를 읽지 말라 했으나 나는 스포를 이겨낼 줄 아는 독자인지라 결말을 알고서도 재미나게 읽고 있다. 르 클레지오는 처음 접하는 저자인데, 강렬한 첫문장을 시작으로 이야기 전개가 박진감이 넘친다. 다 읽고 나서 꼭 리뷰를 쓰고 싶은 책이다.
중2 딸은 피아노 학원 외에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하여 다른 아이들에 비해 책 읽을 여유가 있는 편이다. 엄마의 강압으로 하루 15분은 만화책 이외의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한 편은 독후감을 쓴다. 이 페이퍼를 쓸 생각으로 딸이 올 상반기에 읽은 책을 정리해 보았다. 글을 후다닥 대충 읽는 편인데, 그렇다 해도 어쨌든 기특한 중2다.
1월
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 햇살과 나무꾼 / 비룡소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 한기욱 / 창비
용과 시인 / 미야자와 겐지 / 이선희 / 바다출판사
핑크트헨과 안톤 / 에리히 캐스트너 / 이희재 / 시공주니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1~2) / 조앤 K. 롤링 / 김혜원 / 문학수첩
2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 조앤 K. 롤링 / 김혜원 / 문학수첩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허블
소년을 읽다 / 서현숙 / 사계절
엄마의 말뚝 1 / 박완서 / 맑은 소리
3월
프랑켄슈타인 / 메리 W. 셸리 / 오은숙 / 열린책들
회색 인간 / 김동식 / 요다
공주와 고블린 / 조지 맥도널드 / 최순희 / 네버랜드 클래식
4월
1984 / 조지 오웰 / 박경세 / 오픈북스
홀 / 김흥모 / 창비
그리운 메이 아줌마 / 신시아 라일런트 / 햇살과 나무꾼 / 사계절
5월
엄마의 말뚝 2,3 / 박완서 / 맑은소리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 정덕애 / 민음사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 태 켈러 / 강나은 / 돌베개
6월
1945 / 배삼식 / 민음사
황금물고기 / 르 클레지오 / 최수철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