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8 #시라는별 44

어떤 품앗이 
- 박성우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구년 뒤, 한천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 

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 
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구복리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수열이 어매고
한천댁은 울어매다 


박성우 시인은 내게 <아홉 살 마음사전>을 비롯 ‘아홉 살 사전‘ 시리즈로 먼저 알게 된 작가이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국어 교과서에는 마음 알기 단원이 등장하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상황과 감정의 폭이 넓어진다. ‘아홉 살 사전‘은 그런 이유로 기획된 시리즈 같다. 내 경우에는 어휘 습득이 더없이 더딘 아들 때문에 이 시리즈를 몇 권 구매했다. 나는 출판사의 상술이 대놓고 보이는 책이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다행히
아들은 5학년인 지금도 이 사전 시리즈를 이따금 들춰 보며 진지하게 읽는다. 무엇보다 그림이 정말 귀엽다.

내 마음을 알고 남의 마음을 알아주는 일을 책으로 배워야 한다는 데서 나는 씁쓸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장르만 다를 뿐 많은 책(특히 소설)을 통해 인간이 가진 숱한 갈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았던가.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은 마음을 따뜻하게 적시는 푸근한 시집이다. 첫 시 <바닥>부터 마지막 시 <종점>까지 휘리릭 읽고 든 첫 느낌은, 뭐 이리 착한 시집을 보았나, 시인의 눈이 사슴 눈을 닮았더니 시인이 착한가 보네였다. 글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니.

<어떤 품앗이>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세 여자의 ˝별스런 품앗이˝를 노래한 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자고 약속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이 세상에 남은 한 사람이 ‘난자리‘의 공허함과 쓸쓸함에 잠못 이룰 것을 염려한 다른 두 여인이 그 자리의 공백을 채워주러 밤이면 ˝두말없이˝ 그 집에 찾아와 같이 드러누웠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돌아가며 세상을 등졌고, 그때마다 세 여인은 ˝몇날 며칠˝을 같이 잤다.

위로의 말보다 더 큰 위로는 ‘같이 있어주기‘가 아닐까.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지만, 그 함께하기가 ‘내, 그 마음 안다‘를 별말없이 드러내는 정겨운 위로가 아니겠는가. ‘너는 혼자가 아니야‘를 온몸으로 전하는 뭉클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세 여인의 호들갑 떨지 않는 우정이 참으로 부러웠다. 너에게 그런 사람이 있니 라고 묻기 전에 너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 보자라고 생각했다.


덧붙여. 폴스타프님께 감사. 덕분에 미소를 잔뜩 짓게 하는 시집을 만났네요. ^^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6-28 0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홉살 사전 꾸준히 읽는 착한아들 박성우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시선으로 시어를 짓는것 같습니다 혼자가 아니야 함께 가기 ! 행복한 책읽기님 한주 시작 건강하게 ^♡^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43   좋아요 3 | URL
하하. 꾸준히는 아니고 어쩌다 봅니다. 박성우 시인은 scott님 말씀에 완전 공감이요. 알라딘 서재서 플친들과 함께 가기, 좋아요. scott님도 건강히 한 주 보내요~~~~^^

희선 2021-06-28 01: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박성우 시인 시집 오래전에 나온 《거미》라는 시집 한권 보고 그 뒤로 하나도 못 봤네요 그것도 대충 봤겠지만... 《아홉살 마음 사전》은 있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어떤 품앗이>는 시 좋네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보고 시를 썼네요 슬플 때는 함께 있어주기만 해도 좋을 듯합니다

유월 며칠 남지 않았네요 행복한책읽기 님 새로운 주 즐겁게 시작하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45   좋아요 3 | URL
《거미》도 읽어보려구요.^^ 저 시 좋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 있어주는 일이 맘처럼 쉽지 않지만. 애써 볼 밖에요. 희선님도 새로운 한 주 알차게~~^^

새파랑 2021-06-28 06: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님의 시 소개는 언제나 좋네요. 글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 맞는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47   좋아요 2 | URL
늘 좋다해주는 새파랑님 덕에 늘 어깨 으쓱. 기분 우쭐해짐요. 새파랑님 마음 그릇은 늘 따뜻합니다요^^

얄라알라 2021-06-28 0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홉살 사전 작가님께서 시인이시군요^^ 행복한책읽기님.말씀듣고 보니. 인성, 배려..책으로 배워가는 아이들. 코로나로 운동장에 모여놀기 어려우니 더욱 그렇게 되나봐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50   좋아요 1 | URL
ㅋ 초딩 교과서 보고 있음 우리 때도 이런걸 책으로 배웠던가 하는 도덕들이 꽤 있어요. 근데, 뭣보다 교과서 내용이 의외로 어렵답니다. 제 아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Falstaff 2021-06-28 0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저까지 거론해주시니 황망하네요. ^^;; 그래도 기분 좋습니다. 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52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님은 재기와 유머 넘치는 글 올려주셔 참 좋아요. 기분 좋아지셨다니 제가 오늘 한 건했네요.^^

붕붕툐툐 2021-06-28 2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행복한 책읽기님 페이퍼 오랜만이에용~!^^
시 너무 좋아요~ 저런 친구 없다고 서운해 말고, 저런 친구가 되어줘야겠죵?^^

행복한책읽기 2021-06-28 23:51   좋아요 2 | URL
우왕~~~ 이리 반갑게 맞아주니 정말 기분 좋네요. 이게 알라딘 서재 마력인가봐요. 은근 그립더라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