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0 #시라는별 43 

영속永續- 백은선 

아니다 그렇다 괜찮다 괜찮지 않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빛이다 어둠이다 포옹이다 밀침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한낮의 나무 한낮의 섬
한낮의 그림자

ㅡ돌아본 사람은 영영 잃어버리게 된대
ㅡ어째서 사랑은 손보다 더 손이 될까 

돌아본다 한밤의 어둠 속 웅크린 심장을 
한밤의 두근거림 
펄럭이는 커튼 아래 놓인 심장을 

ㅡ한번 잃을 것을 다시 잃는 게 뭐 
ㅡ한 번도 가진 적 없는 것을 소유한다는 게 좋지 

늘어난 소매를 물어뜯으며 기린은 어떻게 울지 생각하다가 세상에는 침묵의 동물도 있다고 결론지었다 
모든 게 너무 빨라서 기린의 리듬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나무가 있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물속에서 숨 쉬는 법 얼음이 녹는 동안 불어나는 것들을 헤아리며 기도 위에 기도를 놓고 다시 허무는 방식으로 허물어진 자리에 다시 다시

놓고 허물고 놓고 허물고 놓고 허물고 

손을 대봤어 뜨거웠다 그것을 마음의 열도라 한다면 

ㅡ계속할 수 있겠니
ㅡ두 개의 손은 열 개의 뿔이었대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부러지는 것들 숨을 참으며 매일 침묵을 연습하며 어떤 백색증은 몸의 가죽이 아니라 내부에서 생겨난다

죽은 몸을 가르면 모든 것이 하얗다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세포는 하나씩 어둠을 잃는다고 


백은선 시인의 <<도움받는 기분>>은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집은 내가 정의한 대로 ‘시로 쓴 고발극‘이 맞다. 시인은 이 세상의 부정하고, 부당하고, 어이 없고, 그래서 슬프고 아픈 일들을 직접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까발린다. 시인의 마음을 가장 뒤흔든 사건은 세월호 참사였던 듯하다. 곳곳에서 그 참혹함과 싸늘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이 발견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시인은 이런 말로 자위를 한다.

신이 아픔을 몰라서 
아픔을 줄 수 있다고 

그렇게 믿자고 시에 썼습니다. (<해피엔드> 중) 

신이라고 썼지만, 실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아픔을 모르는 인간은 아픔을 주는 줄도 모르고 아픔을 줄 수 있다. 

‘괜찮다‘라는 말도 그렇다. ‘괜찮다‘는 나쁜 뜻의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혹은 타인에게는 사소해 보이지만 내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괜찮아?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좋은 의도의 말인데, 이 질문은 이상하게도 ‘응, 괜찮아.‘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중압감을 준다. 내 마음이 절대로 괜찮지 않은 순간에도 말이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히거나 했을 때 예전에는 ˝괜찮아?˝라고 먼저 물었다. 지금은 몸부터 달려가 ˝아이쿠, 어떡해, 아프겠다˝라고 먼저 말해준다. 그러니까 아이의 고통이 가라앉아 아이 스스로 ‘괜찮다‘고 느끼게 될 때까지 그 말을 유보하는 것이다. 아픔에 반응해주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파서 뜨거워진 ˝마음의 열도˝가 식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숨을 참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됐을 때 우리의 속은 백색증에 걸려 어둠을 잃고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할 수 있다. White lie. 선의의 거짓말도 켜켜이 쌓이면 독이 된다.

백은선 시인이 알고 싶어 올해 3월 채널예스와 가진 인터뷰를 찾아 읽었는데, 산문집도 읽고 싶어졌다. 남편의 카드 빚을 갚기 위해 계약한 책이었다니. 백은선은 현재 남편과 이혼했다.

“파편이 내 삶의 숙명 같아요. 엄마로 시인으로 작가로 가사노동자로 선생으로 살면서 매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숙명이라면 파편의 대마왕이 되고 말 거야.”​


별처럼 생긴 식물은 돌나물과에 속하는 섬기린초.
흰색 꽃은 개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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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0 07: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시 너무 좋네요. 뭔가 힘이 나는거 같아요. 나에게 하는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위로가 되는거 같아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5:24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맘에 드신다니 뿌듯뿌듯.^^ 백은선 시인은 파고들고 싶네요. 자기 위로, 맞습니다. 넘 필요합니다.^^

미미 2021-06-10 11: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남편 카드빚ㅠㅇㅠ
위로 라는거 배려 라는거
이게 진짜인지, 제대로 마음이 전달 되는지 갈수록 신경 쓰이더라구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5:27   좋아요 5 | URL
근데 이혼 후에도 남편이랑 의절하지 않고 산대요. 이혼하면 인생 끝장나는 줄 알았더니 해보니 살 만하다네요. 생계형 저자의 삶이 만만찮을 텐데, 시보다 산문이 돈이 더 되는데도 시를 더 쓰고 싶다고 합니다. 천상 시인^^

mini74 2021-06-10 12:2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픔에 반응하는 것이 먼저 란 말 참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5:28   좋아요 5 | URL
와우. 미니님 찰떡같이 캐치하심요. 이런 공감이 저는 참 좋습니다.^^

scott 2021-06-10 16: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카드빚을 아내가 왜? 갚아야 하는지 ㅜ.ㅜ
개망초 꽃말은
화해 ,,,,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6:22   좋아요 3 | URL
그래서 서류상으로만 이혼하는 부부도 꽤 있어요. 월급을 차압당하거든요. 우씨.
scott님 개망초 꽃말, 감솨!!!^^

붕붕툐툐 2021-06-10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괜찮아?라고 물을 때 괜찮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이 넘 와 닿네요. 저도 괜찮아?를 버려야겠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6-11 00:45   좋아요 1 | URL
하하. 버리지는 말고 봐가면서 쓰는 것이. . . .^^;; 저런 생각은 부모 집단 상담 때 배웠어요. 많은 부모가 넘어진 아이에게 괜찮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당황한대요. 아픈데 괜찮아야 하는 건가? 울고 싶은데 못 울게 된다고요. 자기 감정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고. 진짜 그런가 지금도 계속 확인해 본답니다^^

희선 2021-06-11 0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살아온 게 달라서 누구는 아픈 말인데 누구는 아무렇지 않은 말도 있더군요 그렇다 해도 자신이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프다는 걸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니...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