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비 새는 집 ― 1979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못질을 했다
  장마철 앞 임시로 덮어씌운 비닐을 벗기고
  새 슬레이트에 탕 탕 못을 박았다
  못을 박는 동안은 아버지에게도 못이 박히고 있었겠지
  사람들과의 악수를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그 손아귀에도 못이 박혀들고 있었겠지
  비가 새면 누이들과 함께 나는
  세숫대야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아
  못물을 만들었다
  녹슨 빗방울 파고들던 방이
  맑은 못이 될 때까지
  망치질 소리를 견디고 있었다
  얘야, 지붕에 오를 땐 못자국을 밟거라
  못이 없는 자리는 십중팔구가 허방
  못 박힌 곳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지지대가 있던 자리,
  지지대 가슴을 파고든 못 끝을 아프게 물고 있던 자리
  어디를 디뎌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내게도 비가 새고 있었다
  새는 빗소리 뾰족한 끝이 탕 탕 박혀들고 있었다

 

  자전거의 연애학

  홀아비로 사는 내 늙은 선생님은 자전거 연애의 창안자다 그에 따르면 유별한 남녀 사이를 자전거만큼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일단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 줄 알아야 혀 탈 줄 안다는 것, 그건 낙법과 관계가 있지 나는 주로 하굣길에 여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점찍어 둔 가방을 낚아채는 방법을 썼어 그럼 제깐 것이 별수 있간디, 가방 달라고 죽어라 뛰어오겠지 그렇게만 되면 만사가 탄탄대로라 이 말이야 지쳐서 더 뛰어오지 못하는 여학생 은근슬쩍 뒤에 태우고 유유히 휘파람이나 불며 달려가면 되는 것이지 뒤에서 허리를 꼭 잡고 놓지 못하도록 약간의 과속은 필수항목이고, 그렇게 달려가다 갈대숲이나 보리밭이 나오면 어어어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네 이를 어째 가능한 으슥한 곳을 찾아 재깍 넘어지는 거야 그러고는 아주 드러누워버리는 것이지 어째 허리가 펴지질 않는다고, 발목이 삐끗했나보다고, 아무래도 여기서 쪼깐 쉬어가는 게 낫겠다고…… 아울러 이 모든 일엔 품위가 있어야 혀 서화담이 황진이 만나듯이 아니더래도 서규정*이 직녀를 만나듯은 격이 있어야 된단 이 말씀이지 이것이 요즘 너희 젊은것들 잘 나가는 오토바이나 스포츠카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자전거 연애라는 것이야 허허허 좋은 세상이란 그런 것이지 젊으나 젊은것들이 불알 두 쪽만 갖고도 연애를 걸 수 있는 세상이지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한 말 씀 더 남기신다 그런데 그 맛에 너무 깊이 빠지면 못써, 잘못하면 나처럼 이 나이껏 혼자서 살아야 할 테니께.

* 서규정 『직녀에게』, 빛남출판사 1999.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두엄자리에서 지렁이가 운다, 지렁이 울면 낭창한 대하나 꺾고 낚시를 가시던 할아버지.

  그날 붕어조림을 삼키면서 나는 붕어가 삼킨 지렁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는데

  지렁이가 할아버지를 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아버지가 삼킨 붕어와 붕어가 삼킨 지렁이 잘디잔 흙알갱이가 되어 지렁이 주둥이 속으로 빨려들 줄은 몰랐다.

  비 내린 뒤의 영산강변 할아버지 무덤가에 지렁이가 기어간다. 그래 지구상의 모든 흙은 한번쯤 지렁이의 몸을 통과했다.*

  머잖아 저 몸속에서 붕어를 삼킨 할아버지와 내가 머리 딱 부딪치며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 치는 시간 있겠구나.

  주물럭주물럭 시간대를 마구 뒤섞는 장운동, 저 몸속으로 산맥 하나가 통째로 빨려들어가고 말랑말랑한 반죽물 밭이랑 논이랑이 되어 꿈틀꿈틀 빠져나올 수도 있겠구나.

  강 주둥이에 아침부터 누가 철근을 박고 있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멘트를 퍼붓고 있다. 컥컥 헛구역질을 하며 강이 움찔거린다.

  * 다윈의 말.

 

  손택수 시인의 『목련 전차』를 읽고 있습니다. 좋은 시들이 많네요. 서정적이고 가슴에 남는 글귀도 많습니다. 차분하고 정겹고 읽는 맛이 있습니다. 읽으면서 인상 깊은 시들을 옮겨 적어봅니다. 첫 번째 시집도 언제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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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26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서는 시가 좋은 줄 몰랐는데 이렇게 좋아지는군요.
좋은 시간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twinpix 2007-07-26 22:37   좋아요 0 | URL
음, 아직 많이 시를 접한 게 아니라서 그런지, 저도 조금씩 알아가고만 있어요. 'ㅁ' 확실히 시가 무어다, 정말 좋다, 이런 건 아직 모르겠어요. ㅇ_ㅇ 조금씩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매력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최근 읽는 라이트노벨은?

라이트 노벨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장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대원에서 NT노벨이라는 브랜드로 일본 라이트 노벨을 소개한 결과, 상당한 독자층이 만들어졌다. 이후, 라이트 노벨을 창작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또 국내 작가가 쓴 라이트 노벨을 원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이런 와중에 국내 라이트 노벨 출간을 최초로 시도하는 출판사가 바로 디앤씨미디어다. 이미 파피루스라는 판타지 소설 브랜드를 가지고 대여점 시장에 출간중인데 이번에는 시드노벨(http://seednovel.com/ )이라는 브랜드로 국내 작가의 라이트 노벨을 준비 중에 있다. 그 첫 모습이 7월 25일에 나타날 예정이다. 총 세 명의 작가의 신작이 등장하는데, 내가 예약한 책은 바로 이 책, 『미얄의 추천』뿐이다. 판타지 소설 연재 사이트인 드림워커(http://drwk.com/ )에서 연재 중인 『갑각나비』는 온라인상에서 이미 유명한 작품이다. 독특한 분위기, 실험적인 구성 등으로 기존의 판타지 소설들과는 차별화된 매력을 선보였고 아직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않았는데 상당한 독자를 갖고 있다. 다른 두 작가의 책. 임달영의 『유령왕』과 반재원의 『초인동맹에 어서오세요』는 기대가 되지 않아서 구입을 미루었다. 오트슨은 『갑각나비』를 통해 기대감을 가져오던 작가고, 출간되면 무조건 사보려고 했다. 첫 출간작이 『갑각나비』가 아닌 신작이라는 점은 놀랐지만, 아무튼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임달영의 작품은 『안티테제』만 읽었지만 그걸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작가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케이스도 아니고, 가장 최고치의 작품 중 하나를 이미 읽었으므로 더 이상 다른 작품이 기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안티테제』는 90년대 후반에 PC통신 나우누리에서 연재된 작품이지만, 훌륭한 라이트 노벨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반재원 작가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래서 소재가 끌리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은 구입하지 않았다.
  앞으로 학산문화사에서도 국내 작가의 라이트 노벨이 나올 예정인 것 같고, 대원씨아이에서도 이번에 아키타입(Arche-Type)이라는 브랜드로 런칭을 시작했다. 『다크문』, 『하얀 늑대들』의 작가인 윤현승의 신작 『뫼신사냥꾼』(신작이라지만, 예전에 출판되었던 흑호의 리메이크작이다.)과 『비뢰도』의 작가 목정균의 신작인 『머메이드 사가』등의 작품이 대기중이다.(8월 7일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일본 라이트 노벨은 이미 그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은 작품만이 국내에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국내 라이트 노벨은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국내 라이트 노벨 독자들을 만족시켜줄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지, 아니면 현재 대여점 시장을 점령한 양산형 판타지처럼 외면을 받을지. 7월 25일 한국 라이트 노벨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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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2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 노벨이라는 단어를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저도 책 나오면 서점에 가서 한번 봐야겠네요.

twinpix 2007-07-20 16:14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 선별되어 온 라이트 노벨 중에는 좋은 작품도 많지만, 국내 라이트 노벨은 이제 첫걸음이라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07-07-20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라이트 노벨이란 단어를 처음 접해봤습니다. 굉장히 좋은 정보를 얻어 가네요.^^

twinpix 2007-07-20 22:40   좋아요 0 | URL
하핫^^;; '굉장히' 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아무튼 유명작을 꼽자면 s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리나"의 원작인 "슬레이어즈"나. 슬레이어즈와 양대산맥이었던 "마술사 오펜". 그리고 라이트 노벨 중 가장 인정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인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등이 있죠. "은하영웅전설"도 라이트노벨로 취급되기도 하고요.(판매량은 독보적......) 그 외에도 nhk에 어서오세요! 라든지, 잘린머리 사이클 등. 아무튼 sf, 미스터리, 판타지, 학원물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캐릭터성이 많고 다른 미디어로의 변환이 활발한(주로 애니메이션) 가벼운 소설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라이트 노벨 시장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작년에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란 작품이 쿄토 애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면서 2006년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고 동시에 일본에서도 백삼십만부가 더 급격하게 팔려나가고 한국에서도 알라딘이나 yes24등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5위까지 올라가고 교보문고 매장에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진열되기도 하는 등 높은 판매고와 화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홍보가 되는 일본과 달리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지 않는 국내에서 국내 작가의 라이트 노벨이 얼마 정도의 성공을 거둘지는 아직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죠. 'ㅁ'

mira95 2007-07-2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알고는 있었지만 국내에서 창작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은 처음이네요.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작품 많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twinpix 2007-07-20 22:35   좋아요 0 | URL
저도 국내 작가들의 멋진 작품들이 나와서 역으로 일본에도 수출되어 좋은 성과를 올리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고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저 작품으로 평가를 해보려고요.

비로그인 2007-09-05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노블 추천작 리스트 만들어주세용~~~
 

끝으로, 문예창작과의 제도 교육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면서 가다듬어야 할 게 있다. 문예창작과의 모든 구성원들을 작가로 성장시킬 수 없기에, 다른 일에 종사할 문예창작과 학생들을 아우르는 문예창작과의 독특한 문학 교육이, '훌륭한 시민 만드는 것'* 이라는 점을 가볍게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스스로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직접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이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는 문인이 된다. 그런데 '문인'이 직업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졸업생이 많이 갖는 직업은 학원 논술 강사,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만화와 게임의 스토리 작가, 잡지사 기자, 기업체 홍보실 직원, 출판편집회사 직원, 방송국 스크립터 등이다. 글을 잘 쓰면 어디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아예 다른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기도 한다. 젊은 날의 문학 공부가 올바른 사람을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날의 문학공부가 올바른 사람을 만든다는 것' 이야말로 문예창작과의 문학교육이 토대를 두고 있는 교육철학이자 미적 교육의 실천이기도 한 셈이다.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소설가 이승우는 최근 창작 기법을 나름 대로 기술한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마음산책, 2006)를 발간하였는데, 문예창작과를 비롯한 창작 실기를 위주로 하는 제도 교육이 한결같이 '기교'만을 중시하는 데 비판을 가한다. '기교'와 '기예'보다 '작가적 태도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문예창작과가 '기교'만 승한 작가가 아니라 '작가적 태도나 정신'이 깃들인 훌륭한 작가를 배출하는 데에는 문학교육을 통해 '훌륭한 시민'을 배출해내는 것과 맥락을 함께 하는 셈이다.



――――――――――――――――――――――――――――――
* 문학의 아웃사이더인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장정일은 2006년 1학기부터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희곡을 가르치는 문학 교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문학 교수로서의 새로운 삶을 출발하면서 2006년 3월 11일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문창과가 작가 만드는 교육을 한다는데, 나는 문창과든 철학과든 모든 인문학을 가르치는 곳은 최종 목표가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내 수업목표는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것이다. 가령 극렬 '황빠'가 돼서 한 서울대 여교수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아줌마 속에 동덕여대 문창과 학생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고 이런 것들이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이라고 본다."
** 이승하, 「글쟁이를 만들기 위한 실기 수업」, <교수신문>, 2006. 2. 22

―― 2006 『문학수첩』 여름호, <특집|대학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 「문예창작과의 쇄신:미적 모험과 인문학적 지성」, 고명철, 53~54쪽


  『문학수첩』은 『창작과 비평』, 『문예중앙』 같은 계간지로 내 흥미를 끄는 문예지는 아니었다. 다만 우연찮게 알라딘을 둘러보다가 이 작년 여름에 나온 『문학수첩』의 목차를 보게 되었고, 아직도 품절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구입을 하게 되었다.(대부분의 문예지들이 계절이 바뀌자마자 각종 서점에서 품절로 뜨던데 문학수첩만큼은 품절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무려 작년에 나온 잡지인데도 구입할 수 있었다.) 내가 흥미를 가졌던 것은 특집 기사였다. 대학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 라는 주제로 5명의 필자들이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 중 「신세대 보고서」라고 하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의 의식 비교를 통해 본 우리 문학의 현주소라는 설문조사 내용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탓인지 막상 설문조사 결과를 보자 별로 특이할 사항은 없었다. 반영된 인원도 한 수업을 들었던 40명 내지 60명의 인원이었을 뿐이고, 국어국문학과는 문학이 좋아서, 문예창작학과는 창작이 좋아서 들어왔다는 점만 크게 대비되었다. 그외에 몇 명이 문예지를 보는지(어차피 소수다.) 어떤 문예지가 인기 있는지, (가장 큰 인지도를 가진 건 역시 창작과 비평) 좋아하는 소설가, 시인들(몇몇 유명한 작가들을 그냥 댈뿐) 구입하는 인문학 도서 수(어차피 적게 구입한다.) 등 별로 유익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그저 그랬다. 그래도 이왕 산김에 전체적으로 쭉 읽고 인상에 남았던 부분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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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그러니까 외출을 하면 이 미로의 고통을 내가 육체적으로도 극복하는 셈인데 더러 내 자신이 만들어낸 구조물 가운데서 내 스스로가 잠깐 동안씩 길을 잃을라치면, 말하자면 이 작품이 이미 오래전부터 판단을 굳히고 있는 나에게 아직도 그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 듯이 보일 때면, 그것이 내게는 노여우면서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는 자주 내쳐 그대로 두는 이끼 덮게 아래에서 ― 그렇게 오래 나는 집 안에 틀어박혀 꼼짝을 않는다 ― 나는 나머지 숲 지면과 한 살이 되어 이제는 몸을 한번만 꿈틀하면 단박에 다른 곳에 가 있다. 이 작은 움직임조차도 나는 오래 엄두를 내지 못한다. 오늘 내가 그걸 버려두고 떠나도 분명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그러면 다시는 입구 미로를 극복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싶어서이다. 다시는 입구 미로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오늘 거길 떠났다가 꼭 다시 되돌아오겠는가. 어떻게? 너의 집은 보호되어, 차단되어 있다. 너는 평화롭게, 따뜻하게, 잘 먹으며 살고 있다. 주인으로, 많은 통로와 광장의 둘도 없는 주인으로, 그러나 아마도 이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싶지야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내주려는가, 다시 딴다는 보장이야 있다지만 많은 돈을 건, 너무도 많은 돈을 건 도박을 시작하려는가? 그럴 만한 합당한 근거라도 있는가? 아니다, 그런 일에는 합당한 근거라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나는 조심스럽게 벼락닫이문을 올려 열고 밖으로 나와서 그 문을 조심스럽게 내려닫고는 내달린다, 한껏 빨리, 배반적인 장소를 떠나.

―― 프란츠 카프카, 『변신·시골의사』, 「굴」, 민음사, 전영애 옮김, 130쪽


  세계문학전집 4번 째인 『변신·시골의사』를 읽는데, 굉장히 어려움을 느꼈다. 번역 평이 그리 좋지 않은 듯하던데, 실제로 읽기에 버거운 글이었다. 딱 봐도 번역이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선호하는 편이긴 하다. 의미를 왜곡하거나 혹은 삭제된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너무 곧이 곧대로 번역하면 한글로는 도무지 읽기 힘든 글이 나오는 게 아닐까? 어느 정도의 의역은 필수가 아닐까? 우리 말 표기법에 기본적으로 맞추고, 내용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문장 구조의 수정 등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번역은 아무리 원문에 충실했다고 해도 더 많은 독자의 편의를 위한 부드러운 번역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난해한 문체에 적응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작품해설에서 "그런데 이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장이 때로 쉼표로, 세미콜론으로 길게 이어지고,2) 「시골의사」, 「굴」등의 우리 말 표기법에 어긋나는 쉼표는 예시로 그냥 둔 것이다."(p245) 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을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 같이 아예 읽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도 있고, 그만큼 어려운 것이겠지만 아무튼 개인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번역판이었다. 그래서 「굴」을 끝으로 읽기를 중단하고 말았다. 원래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는 것을 거의 신념처럼 갖고 있었지만, 이런 번역의 문제에서는 나한테 맞는 다른 번역본을 찾아봐야겠다. 솔 출판사에서 나온 카프카 전집을 염두에 두고 있다. 괜찮을는지.

p.s 번역 때문에 검색을 해본 결과,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범우사가 평이 좋은 듯하다. 집에 있는 건 홍신문화사 것인데, 전문 번역자가 아니라고 하니 범우사 판을 구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서 번역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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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신은 제가 참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렵지만 저에게 변신은 이거야말로 소설! 이라는 느낌을 준 명작이죠.

twinpix 2007-07-15 12:44   좋아요 0 | URL
저도 「변신」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다른 글들도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어요. 'ㅁ'/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김연수 : 인터넷만 아니었어도 훨씬 더 많은 작품을 썼을 거예요(인터뷰이와 인터뷰어 사이에 희미한 동질감이 형성되는 분위기다). 저도 한때 글쓰기 전에 두 시간 정도 서핑을 하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면 원래 고민하던 장면의 방향타를 놓치고 엉뚱한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죠. 실제로 저는 글을 쓰기 전의 구상 과정이 훨씬 오래 걸려요. 구상하기 전까지 너무 힘이 드니까 결국 마감일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두 사람 사이에 더더욱 확실한 동질감이 형성되는 분위기다).

정여울 :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으로 말꼬리를 잡아채며) 역시 마감이 없다면 글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아니라 마감이라는 친구(혹은 협박)가 글을 써주는 느낌이 들어요. 글쓰는 사람들에게 마감이 주는 긴장의 필요성과 마감 없는 글쓰기의 유토피아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 같아요.

김연수 : 단편 같은 경우는 아마 마감이 없으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안 쓸 것 같아요. 하지만 장편은 마감 없이 쓰는 것이 좋죠, 아니 마감 없는 글쓰기를 꿈꾸죠. 마감 있는 단편보다는 마감 없는 장편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 제 바람이예요.

―― 2007『작가세계』 여름호, 작가 인터뷰, 정여울, 89~90쪽

   공감가는 대목 중 한 부분이라서 옮겨봅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은 사실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주위에 좋아하는 분이 많아서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번에 김연수 특집인 『작가세계』 여름호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읽은 김연수 작가 글은 작년 창비 가을호에 실린「내겐 휴가가 필요해」였죠. 아직 2007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읽지 않았는데 거기에도 실렸군요. 저는 괜찮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인터넷에서 보면 아쉬웠다는 분들도 많네요. 아무튼 김연수 작가의 글들은 더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아직은 너무나 읽을 게 많아요.

머뭇머뭇 일어서는 그를 보며 살갑고 상큼한 가장의 냄새가 느껴졌다. 딸이 『모두가 동시에 하나인』이라는 책 제목이 어렵다며 <모기인 동시에 하마인>이 어떻겠냐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는 나를 하루종일 키득거리게 했다. 여덟 살 나이에 아빠의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열심히 읽는다는 그 총명한 독자가 있는 한, 그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못다한 이야기는 그의 신작소설 속에서 복화술로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 그 그리운 낯선 이들의 눈물을 이해하는 순간, 그의 새로운 소설은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 2007『작가세계』 여름호, 작가 인터뷰, 정여울, 100쪽

딸 아이의 순수한 말에 인상적이고 재미있었던 부분. <모기인 동시에 하마인>이라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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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7-12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라니 선영아, 굳빠이 이상 읽었는데 분위기가 전혀 다른 두 작품을 접해서인지
앞으로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작가예요 :)

twinpix 2007-07-13 22:26   좋아요 0 | URL
저도 많이 알아보려고요.^ㅇ^/

얼음장수 2007-07-1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거기에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까지 하나 더 읽었고, '내겐 휴가가 필요해'도 읽었습니다. 더 읽어봐야지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네요. "모기인 동시에 하마인" 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계간지를 꽤나 두루보시나 봐요^^

twinpix 2007-07-13 22:27   좋아요 0 | URL
문예지를 최근 들어 보기 시작했는데, 욕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들쳐보게 되네요. 'ㅁ';;; 뭐든 다 모으려는 심리가 있나 봐요. 'ㅁ'

거친아이 2007-07-1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작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딱 한 권만 읽어봤는데요. ^^
조금씩 관심을 둔 작가는 많지만, 작품을 섭렵해서 읽기에는 제가 너무 게을러요.

twinpix 2007-07-13 23:39   좋아요 0 | URL
제 친구가 군대에서 엄청 감동깊게 읽었다며 강력 추천하던 책! 『청춘의 문장들』이군요. 전 그 책도 꼭 읽어야 하는데 말이죠.^^ 저도 워낙 게흘러서. 요즘 들어 게흐름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쉽지는 않네요. 하루 아침에 고쳐지진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