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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우르줄라 포츠난스키 지음, 안상임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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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이브 - GPS 보물찾기가 연쇄 살인의 힌트로 이어진다면?

 어렸을 때 누구나 보물찾기를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혹은 교회에서 말이다. 어린이대공원 같은 유원지에 가서 미리 선생님들이 숨겨 놓은 쪽지를 찾는다. 보물이 대단할 필요는 없다. 연필이든, 공책이든, 그때는 보물이 적혀 있는 쪽지 한 개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이런 보물찾기를 어른들이 전세계적으로 하고 있다면? 민음사에서 최근 출간된 『파이브』는 이색 스포츠, 놀거리로 2000년부터 전세계적으로 퍼진 '지오캐싱'을 소재로한 스릴러 소설이다. 지오캐싱이란 보물찾기의 어른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데, GPS(위성항법장치) 좌표를 토대로 보물을 찾는 것이다. 누구나 락앤락 같은 통에다가 물건을 숨겨놓고 지오캐싱 사이트에 좌표를 올려둔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그 좌표를 GPS 기계로 찾아서 보물을 찾고 다시 다른 물건을 넣어둔다. 이런 식으로 보물찾기는 무한히 이어지고 수 천번의 보물을 찾은 사람들도 나타나게 된다. 이로써 GPS 좌표를 찾아 가면서 매번 색다른 장소도 가게 되고,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장소에도 도달하게 된다. 매일 비슷한 산에 오르는 것보다, 좀 더 게임 같은, 모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찾기 어렵게 숨겨놓은 경우도 있고,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주말마다 일상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찾은 상자 안에는 과연 어떤 물건이 있을지 기대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 '지오캐싱'은 전세계 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십 만원 상당의 GPS 기계를 사야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이 게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바뀌었다. 모든 스마트폰에는 GPS 모듈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GPS 좌표를 추적할 간편한 어플만 설치하면 된다. 평소 여행을 즐겨하지 않던 사람도 이 지오캐싱을 핑계로 다양한 곳을 여행할 수도 있고, 마침 지방에 가서 지오캐싱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추리/스릴러 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이 '지오캐싱'이 어떤 미스터리 소재로 적절하다는 것도 바로 깨닫을 것이다. 익명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게임을 즐긴다는 점이나, 미스터리를 풀어서 좌표를 찾아가기도 하고, 그 좌표 안에 어떤 물건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점 등에서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터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 맞춤으로 만든 게임 같이도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반대로 이 지오캐싱이 먼저 있었고, 소설이 나왔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서사를 끌어가는 힘은 지오캐싱이라는 게임에 있다. 게임의 룰을 하나씩 숙지하면서, 게임의 규칙 속에서 단서를 쫓아간다. 범인이 만들어낸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느 스릴러 소설처럼 이 소설에서도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한 여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었는데, 주인공인 베아트리체는 피해자의 발바닥에 이상한 숫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다.(그녀는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사건 현장을 볼 때 '잠수' 하듯이 몰입해서 세세히 살핀다.) 그 숫자는 GPS 좌표다.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 피해자의 발에 GPS 좌표가 새겨져 있단 말인가. 범인은 보통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게임에 초대하는 숫자인 셈이다. 그 좌표를 통해 간 곳에는 락앤락 통이 있다. 그 안에는 잘린 손과 쪽지가 있다. 이 손의 주인은 누구일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바야흐로 연쇄 살인의 시작이다. 어느덧 베아트리체는 범인의 게임에 말려든다. 이대로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건은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쪽지에 적힌 대로 스테이지2로 가기 위해, 다음 좌표를 받기 위해 쪽지에서 수수께끼처럼 단서에 나온 사람을 추적한다.
 이 소설은 범인을 좇는 노력과, 범인이 남긴 지오캐시를 찾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범인에 대한 힌트가 전무하기 때문에 베아트리체와 동료인 플로린은 상당히 애를 먹는다. 이는 베아트리체 시점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명탐정이 나와서 재빨리, 활극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훨씬 사실적이고, 섬세한 심리묘사와 함께 진행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그런 사실성과 심리 묘사에 있다. 스릴러 소설답게 연이은 살인 사건과 이어지는 단서 등이 게임처럼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며, 정교하게 짜인 플롯이 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전에 실제 있을 법한 배경과 심리 묘사가 독자를 이 소설 속 세계로 끌어들인다. 베아트리체는 이혼녀이고, 두 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일을 한다. 새벽마다 전화하는 전남편이 주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두 아이에 대한 연민과 걱정, 남자 상사의 핀잔과 압박(그러면서도 남자 동료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내는 점이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동료에 대한 애정이 섞인 혼란스러운 마음, 문자까지 보내오는 정체불명의 범인에 대한 두려움. 이런 심리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런 약점 없는 히어로 같은 탐정이 아니라,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한 여성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헤어진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전남편의 괴롭힘과 애정을 쏟고 싶어도 직업상 쉽지 않아 복잡한 감정이 드는 두 아이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번민하고 방황하고 좌절하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때로는 답답하고, 갑갑하게 느껴지지만, 일반적인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준다. 그럼에도 베아트리체가 소설 내내 끌려다니기만 하고, 여러 상황들의 압박 속에 놓여 있기만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만약, 시리즈의 시작이라면, 점점 성장하는 베아트리체를 보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작품만으로는 베아트리체가 큰 사건을 통해 좌절하고 앞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난 느낌이었다. 정당한 두뇌 대결이라기보다는 베아트리체는 어쩔 수 없이 범인보다 한 발 느리게 가고, 마지막까지 큰 반전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 점이 주인공의 활약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은 소설이지만, 그만큼 작가가 주인공을 활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설계한 대로 이야기를 밀고 나갔다는 소리도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주인공의 활약에 포커싱을 맞춘 게 아니다. 죄의식, 죄책감. 살인의 동기와 범인이 소통하는 자로 베아트리체를 삼은 이유는 같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면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놀이. 만약 내가 뭘 했다면, 어쨌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것은 무한하고 한 번 벌어지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닌 이상 돌이킬 수 없으며, 시간을 역전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는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만약'을 되풀이한다. 자신을 자책한다. 이 소설은 결국 이 '만약'이 만든 또 다른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의 동기와 베아트리체가 형사가 된 동기는 유사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이 소설의 방점이 찍혀 있다.
 무려 526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만큼, 중간중간 늘어지거나, 지루한 듯한 느낌도 있다. 긴박하게 흘러가지만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많은 탓이기도 하다. 사건의 진상은 이미 수많은 소설에서 다룬 내용이지만, 그건 이미 이 장르의 축적된 역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지오캐싱'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인물을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플롯의 완성도가 높은 점은 이 작품을 잘 만든 스릴러 소설로 추천할 수 있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섬뜩한 살인이 얽혔음에도 불구하고 '지오캐싱'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해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게 만들고, 베아트리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다가와 베아트리체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소설들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찬찬히 쌓아올린 심리와 사건, 마침내 밝혀지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그 결말. 모든 사건이 끝나도 삶은 지속된다. 지오캐싱이 끊임없이 색다른 장소로, 색다른 물건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수많은 스릴러 소설들과 함께 독자를 유혹한다. 함께 사건의 진상이라는 보물을 찾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GPS 좌표를 찾아 떠나듯, 책장 속으로 떠난다. 그 속에는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읽고 나면 읽었다는 흔적을 리뷰로 남기고, 다른 보물을 찾는다. 지오캐싱에는 여러 약어를 사용하는데, 보물을 숨긴 자는 오너라고 부르고, 보물을 남긴 곳에는 TFTH. Thanks for the hunt(찾아 줘서 고마워)라는 약어를 쓴다. 보물을 책으로 바꾸자면, 쓴 사람은 작가, 남기는 글에는 TFTR. Thank for the read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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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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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에게 성교육 책으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임신 중절에 대한 어둡고 가슴 아프며 심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꼭 청소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한 번 읽어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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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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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까?" - 니체




 다카노 가즈아키의 KN의 비극은 필연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었다.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를 다룬 작품인 것이다. 법으로 규정한 특별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계획적이지 않은 임신은 경제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중절을 고민하게 만든다. 소설이 단지 법적인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를 토론식으로 지루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오컬트적인 요소와 추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혼합되어서 독특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며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흡인력을 보여준다.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이미 [13계단], [제노사이드] 등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사회적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긴장과 흥미를 유지하며 소설로 형상화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KN의 비극]은 상대적으로 얇으면서도 이와 같은 장점은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쾌적하게 사는 법]으로 갑작스럽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슈헤이는 맨션을 구입하고 아내 가나미와 행복한 신혼 생활을 꿈꾼다. 그런데 단 한 번 콘돔을 쓰지 않고 잠자리를 한 날 임신을 하게 된 가나미. 가나미는 기뻐하면서 소식을 전하지만, 슈헤이는 냉정하게 맨션 구입으로 탕진하게 된 재산을 따져본다. 대출금 상환도 빠듯한 실정에서 뚜렷한 수입원이 없는 현실. 아기를 낳는다면 맨션을 도로 팔아야 되는 상황. 결국 슈헤이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중절을 제안한다. 우리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이 중절 제안이 논리적이면서도 가슴 아프다. 있을 법한 현실을 제시하고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런 삶을, 이런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순종적이고 착한 가나미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이때부터 이야기는 서스펜스를 가져온다. 그리고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가나미는 귀신이 씌인 것일까. 중절을 거부하는 마음이 다른 인격을 만들어낸 것일까. 이 두 가지 가설에 대한 줄타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소설의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중반까지 이끌어가는 바로 이 오컬트와 과학의 대립적 요소이다. 아내가 빙의 현상을 일으키고, 남편은 이것이 영적인 사건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끊임없이 과학적인 가설을 제시하며 반박한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의 재미가 생겨난다. 오컬트적인 재미와 이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재미. 또한, 과학적으로 제시된 가설들은 후반부에 갈 수록 다시 오컬트 영역으로 넘어가는 듯한 현상을 보여주는데, 이와 같이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점이 특히 재미있고 인상깊은 작품이다.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흥미롭게 구성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오컬트를 넣으면서도 그저 공포소설처럼 처리하지도 않았다. 공포소설의 요소를 가져오면서도 다카노 가즈아키의 장점인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해 현실감을 부여한다. 다양한 정신의학 지식을 늘어놓아 소설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막연히 오컬트 소설로 읽히는 것을 경계하며 중반까지 두 가지 해석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방대한 자료조사가 소설에서 백과사전식으로 그냥 주입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서 거부감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관련 전공자가 쓴 것처럼 신뢰감을 가지고 읽게 만든다. 여기서 오컬트적인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어떻게 정신 의학에서 진단하고 분석할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런 점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장점이자 재미이다. 지식형 소설들 중 상당수가 그냥 지식을 늘어놓는데 반해, 이 소설은 이야기 속에 잘 녹여놓았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내용들만 적절히 제시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즉, 작가가 자료를 체화하고 잘 가공해서 독자에게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해주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여러 지식들이 이야기 전개에 걸림돌이나 군더더기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원동력으로 여겨진다. 오컬트적인 요소를 제하면 정말로 정신 이상이 발생한 여자를 치유하는 정신의학 소설로 갈 수도 있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단순한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소설로 규정할 수 없게 중후반까지 오컬트와 과학이 쉴새없이 뒤바뀌는데, 이 전환이 독자에게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수차례의 전환 자체가 또다른 소설의 매력이자 재미로 작용하는 것이다.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는 어떻게 보면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다. 단순히 임신 중절을 나쁘다는 윤리적 문제만으로 소설을 교훈적으로 이끌기 쉽기 때문이다. 소설이 교훈적이 된다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긴장감이 형성되지 않으며 직설적이고 단조로우며 지루함을 유발할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는 논설문을 읽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미는 물론 교훈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주제를 가지더라도 작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설의 긴장과 재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작가는 오컬트라는 요소와 추리 스릴러적인 면모를 섞어서 임신 중절을 놀라운 스토리텔링으로 풀었다. 이것은 이야기를 제대로 가지고 놀줄 아는 작가만이 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음울한 주제이지만 계속 스토리텔링의 힘에 이끌려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소설에 긴장과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소설을 여러층으로 쌓아올리면 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복잡성을 통해서 완성도 높은 이야기 구조를 만들었다. 아내가 빙의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정신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정신 이상이 일어난 배경을 좇아야 한다. 이것은 그럼 의학소설인가? 또한, 빙의된 영혼의 정체를 찾는 추리 스릴러적인 면모를 띈다. 이것은 그럼 추리소설인가? 임신 중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룬 사회 소설이기도 하고, 영혼이 등장하는 공포 소설이기도 하면서, 사건을 파헤치는 스릴러 소설이기도 하면서, 정신 이상이 발생한 아내를 치료하는 정신 의학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겹의 이야기들 때문에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싶어서 페이지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결국 밤을 새서 읽게되는 책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렇다. 한 번 읽기 시작하자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고 결국 새벽까지 다 읽게 된 책이었다.
 사건의 진상을 따라가면 제목에 나오는 대로 KN의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은 가슴 아픈 사연이다. 임신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소설을 아우르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처연하고도 일그러진 진상.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다. 직시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허구이면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라면, 그 정의에 가장 걸맞는 근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심인성 정신병이니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그건 단순한 해석일 뿐이지 증거가 없는 게 아닌가요? 사령에 빙의됐다는 얘기와 똑같은 차원의 얘기이지 않습니까?”
 “뭐, 그렇군요.”
 이소가이는 당장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부드럽게 말했다.
 “정신 의학은 과학성을 유지하려는 탓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억지로 설명을 붙이려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현대 정신과 의사를 타임머신에 태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면 눈앞의 청년이 망상 장애라고 진단하겠지요. 예수의 기적을 목도했다고 증언하는 사도들은 망상을 공유한 감응 정신병자가 되겠고요.”
 “그럼 그 의사가 직접 기적을 목격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때엔 자기 자신이 감응 정신병에 걸렸다고 주장하겠지요.”
 ――― 다카노 가즈아키, 김아영 옮김, 『KN의 비극』, 황금가지, 2013년 6월, 289~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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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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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추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신간이 북스피어에서 출간되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미미 여사’라고 불리며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작가다. 일본에서 나오키 상을 포함해서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꾸준히 안정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최근 『화차』 가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되면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신작인 『눈의 아이』는 표제작 「눈의 아이」를 비롯해 「장난감」, 「지요코」, 「돌베개」, 「성흔」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된 단편만을 모았는데, 분량상 소품들만 있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인상에 깊게 남았다. 공감 가는 구절도 제법 있어서 절로 감상을 남기고 싶어진 책이었다. 책이 얇은 만큼 몇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흡인력 있는 간결한 문체와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물린 이야기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분은 주의하길.

 눈의 아이

 오랜만에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자연스레 어렸을 때 살해된 친구가 화제에 오른다. 목이 졸려 살해된 지 이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살해당한 아이의 이름은 유키코. 피부가 무척 희어서 눈을 연상케 하기도 했지만, 이십 년 전 그날 유키코의 시체가 전날 내린 폭설로 쌓인 눈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랜만에 한 친구의 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빨간 장화를 신은 꼬마 손님이 찾아온다. 꼬마 손님은 사라지고 발자국만이 남아 있다. 친구들은 죽은 유키코가 왔다고 생각한다. 초현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동시에 살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다. 이런 종류의 글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플롯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짚을 줄 아는 작가가 쓴 단편에서는 끝까지 씁쓸한 여운을 전한다.

 장난감

 이 작품은 소문을 다루고 있다. ‘상가 모퉁이의 완구점 이층 창가에는 밤마다 교수형에 쓰는 올가미 밧줄이 걸린다.’는 소문이 떠돌고 그 소문은 점점 확장되면서 파국으로 이끈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이 소문은 사람들의 잔인함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헛소문이었고, 결국 비극을 초래한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처럼 또다른 초자연적인 현상을 드러내면서 끝맺는다. 이런 굴곡이 애잔한 정서를 전달하고 묘한 울림을 이끌어낸다. 할머니가 죽자 할아버지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들이 만들어지고, 할머니의 자식들과의 유산 싸움, 상가 사람들이 상가를 떠나고 싶어서 희생물을 찾는 심리가 얽혀서 소문은 증식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기심이 어떻게 비극을 만드는지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지요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인형탈을 쓰면 사람들이 추억하는 인형을 쓴 모습으로 보인다는 설정 자체가 환상적이면서도 귀엽기 때문이다. 미미 여사가 “이번 낭독회에서는 인형탈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인형탈이 나오는 소설을 쓰면 되겠네, 그뿐입니다.”라고 밝혀서 썼다는 작품인데, 발상처럼 인형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의 환상적인 하루를 다룬 소품이다. 발상 자체가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 없지만, 귀여운 발상 안에서 주인공이 인형을 쓰지 않은 소년을 보면서 이 현상의 의미가 정의되면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앞의 단편들이 서늘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이 작품은 따스하다. 과연 나는 이 소설 속 아르바이트 생의 눈에는 어떤 인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돌베개

 분량이 대폭 늘어난 작품으로 그만큼 앞의 작품들이 소품에 가까웠다면, 「돌베개」는 호흡이 길고 본격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여고생이 마을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연못에 빠졌고, 연못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은 상태로 한 겨울 차가운 물 속에서 동사한 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은 경찰 수사로 일주일 만에 범인이 밝혀진다. 여고생이 헤어지자고 해서 홧김에 저지른 범행. 그런데 단순해 보이는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이 여고생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을 해대면서 살이 불어난다. 여고생을 둘러싸고 원조를 했다느니, 약을 했다느니, 나이를 속여 술집에서 일했다느니 하는 소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런 이야기를 자기 딸 아사코에게 듣는다. 여기서 여중생인 아사코가 말하는 소문의 심리가 예리하다. 이 소설집에서, 아니 미미 여사의 글에서 가끔씩 번뜩이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렇듯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화차』에서도 전화 통화에서 남의 불행을 확인하여 자신의 행복을 검증하려는 심리를 읽어낸 것처럼, 여기서도 아사코가 읽어낸 사람들의 심리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런 여자애라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해야지만 자기들이 안심할 수 있어서야. 불량 소녀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남자에게 살해 당한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그 언니가 우등생에 주위 평판도 좋았다면 그런 아이가 집착이 강한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무서운 일이 됐을 거야. 왜냐하면 자기나, 자기 딸도 남자를 잘못 사귀면 언제든 같은 꼴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러면 모두들 두려워지겠지. 그래서 그 언니를 깔아뭉개고 싶어 해. 그런 짓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로 만들고 싶어 해.”(89)

 이런 인식은 비단 이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상에 깊이 남은 부분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여중생인 아사코가 지적한 심리가 엿보일 때가 있다. ‘왕따’ 같은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왕따를 당한 아이가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것이 있겠지, 왕따를 당할 여지를 준 쪽도 잘못이다, 내가 보니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 식으로 피해자에게 문제점을 만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도 왕따 피해자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단점인 것처럼 과장하며 아무런 이유 없이 왕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건 역시 위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자기나, 자기 자식도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자기가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해자였기 때문에 이유를 만들어낸다. 합리화를 시도한다. 그런 짓을 당할 수 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다. 중학생도 할 수 있는 이런 인식을 사람들은 외면한다. 도입부에 나온 이런 아사코의 인식에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그 뒤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단순하게 여고생의 소문을 해소하는 것으로 흐르지 않고, 다른 사건과 연결된다. 따라서 플롯이 약간 산만하다고 느껴지는 단점이 있지만, ‘돌베개’라는 설화를 삽입해서 아사코의 사유를 진전시켜 나가고 중심을 잃지 않는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서,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서와 돌베개에서 나타는 인과응보의 벡터 문제, 현대 범죄의 죄악감 등 여러 방향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모아진다.

 성흔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소설이며, 그만큼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소설이었다. 구조가 잘 짜여져 완성도가 높게 느껴졌고,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은 센카와 조사사무소를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이자 유일한 조사원인 여자다. 이 사무소에 한 남자가 자기 아들에 관련된 조사를 의뢰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연성이 많이 겹쳐진 소설이긴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테마로 한 소설집의 이야기에도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이 중심축이기 때문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남자가 어떤 조사를 부탁하기에 앞서 배경 설명을 하는데 전부 사용된다. 그만큼 사건이 복잡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또한 후반부 이야기 전개에 앞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빠질 수 없는 설명이다. 과거에 의뢰인의 아들 시바노 가즈미는 ‘소년A’로 불렸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존속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인터넷에서 소년A가 감별소에서 자살했다는 글이 올라온다. 또한, 소년A를 추종하는 인터넷 세력이 생겨난다.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부모에게 학대받는 사람들이 소년A와 동질감을 느끼고, 자살한 소년A가 구세주가 되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게 다 증거는 없지만 ‘데루무’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과거 오보로 밝혀진 기사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개진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충고하거나 야유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의 자살은 그를 감별소에 처넣은 국가 권력의 패배이므로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진실은 항상 이렇게 감춰진다”(163)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떠도는 잘못된 정보, 혹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유사하다. 항상 국가가 숨긴다, 더 큰 세력이 정보를 조작하고, 진실은 항상 감춰지며 자기가 하는 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인터넷 루머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예언자의 역할을 한 ‘유다스 마카베우스’가 등장하여 ‘희생되는 어린양’들 앞에 등장하면서 인터넷에서 사이트의 세력은 공고해진다. 이건 마치 인터넷에서 소문의 증식을 보는 것과 같으며,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연상시킨다. 연예인들에 대한 가십들, 안티들의 생성과도 같고, 몇몇 사이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201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최근의 인터넷 사이트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너희 중 누구라도 좋아. 시바노 가즈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본 녀석 있어?」”(167)라는 핵심을 찌르는 방문자의 공세에도 사이트를 이용하고 추종하는 ‘어린양’들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묘사나 “지금은 어린양들이 자신들의 공상을 ‘교의’로서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소년A가 자살한 것과 사후에 다시 태어나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은 그들에겐 확고한 사실이었다.”(168)는 문장에서 현실에서의 사건들과 사이트가 겹쳐보였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루머들을 누구도 직접 확인해 본 사람이 없으면서 그것들을 퍼트리고 누가 공격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연예인들이 자살을 해도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할 뿐 반성하지 않는다. 너무나 현실적으로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그리고 있어서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자기들만이 진실을 안다고, 정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린다구요.”(181)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악플러, 안티, 루머를 생산하는 자들, 자기들 말만이 사실이고 진리며 진실이고 팩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남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자기들만이 정의를 실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잘못’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설화와 달리 인과응보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초자연적인 형상을 배합해서 독특한 정서와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인터넷 현상의 한 단면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기묘한 이야기로 묶어내어서 홀린 것처럼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되고,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생각에 잠겨야 했다.

 전체적으로 다섯 편의 단편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책도 얇은 편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흡인력이 있고, 이야기들도 마치 연작소설처럼 공통적인 요소들도 존재했다. 초자연적인 현상 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다. 살인, 죄악감, 이기심 같은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들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따스한 시선도 있다. 「지요코」에서 어릴 때 잊어버렸던 인형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나, 「돌베개」에서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장난감」에서 완구점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구미코의 마음에서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섯 편의 단편만으로도 한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예리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공감을 느끼고 다양한 사유를 하게 만드는 메시지와 완성도 높은 플롯, 개성 있는 인물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이야기가 결합된 근사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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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묘점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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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명의 편집자가 푸는 미스터리 그리고 로맨스

 총 1억부를 넘게 판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푸른 묘점]이 북스피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전집은 아시는 분은 다들 아시다시피 두 출판사가 연합으로 함께하는 기획입니다. ‘세이초 월드’라 하여 모비딕과 북스피어가 하나의 통일된 장정으로 내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연대를 통해 독자들이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연이어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북스피어에서는 [짐승의 길](상, 하), [미스터리의 계보]를 냈고, 모비딕에서는 [D의 복합], [잠복], [점과 선], [일본의 검은 안개](상, 하), 등이 나왔습니다. 앞으로도 북스피어에서는 [10만분의 1의 우연]이, 모비딕에서는 [시간의 습속](점과 선 2탄) 등이 나올 예정입니다.
 [푸른 묘점]은 일단 독특한 추리소설입니다. 탐정이나 형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 남녀가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매번 형사나 탐정이 주로 나오는 추리소설이 아닌 조금 신선한 추리소설을 찾는다면 [푸른 묘점]은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문예지 편집자인 남녀가 사건을 추리해나가고 해결해나간다는 점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신선한 재미로 느껴졌습니다. 출판사나 편집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꼭 편집자가 아니라도 직장에 다니는 분들이 읽어도 공감을 하면서 읽어나갈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말을 반납하고 계속 휴가를 쓰면서 사건 추리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노리코’는 작년에 여대를 졸업하고 요코샤에 입사한 신입 사원입니다. 요코샤는 문예 작품을 출판하는 곳이면서 《신생 문학》이라는 잡지도 간행하고 있습니다. 노리코는 바로 이 잡지의 편집부에 배치되었습니다. 반년 간 교정과 레이아웃을 배우고 나서 외부 활동인 작가를 찾아가 원고 청탁을 하고 독촉을 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이메일이 있어서 보통 직접 찾아가서 원고를 달라고 매달리고 작가가 여관에 숙박하면 바로 옆 여관에 숙박해서 기다렸다가 친필 원고를 받아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예전에 발표된 작품은 그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문학 잡지의 신입 편집자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도, 그 디테일들도 이 소설의 장점이었습니다.

 편집장은 욕설을 퍼부었지만 하코네의 스기노야 호텔 프런트를 통해 무라타니 아사코와 연결되자, “무라타니 선생님이십니까? 이거 큰일 났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이달은 벌서 여름을 타서 다른 괜찮은 원고가 없어요. 선생님 작품이 메인이라고요. 정말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오늘 밤 그쪽으로 시이하라를 보낼 테니 내일 저녁까지 어떻게든 꼭 좀 써 주세요. 네? 무리라고요? 무리라면 모레 오후까지 최대한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원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이달엔 잡지를 내도 의미가 없어요”하고 비위를 맞추며 애원했다.(10쪽)


 이야기의 시작도 이러한 편집자의 설정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노리코가 담당하는 작가 ‘무라타니 아사코’의 원고가 기한보다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자택에 갔지만 문이 잠겨 있고 하코네의 미야노시타, 스기노야 호텔로 갔다고 편지를 남겨놓았습니다. 편집장은 호텔로 전화를 걸어 노리코를 보낼 테니 어떻게든 원고를 달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노리코는 잡지에 실릴 원고를 받기 위해 외부 출장을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코네를 무대로 해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추리소설의 단골 손님인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바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다쿠라 요시조라는 인물이 벼랑에 추락해서 죽습니다. 경찰은 자살로 발표하지만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일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저급한 기획 기사를 써서 정보를 여러 잡지에 강매하러 돌아다니는 저널리스트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그 옆에는 바로 노리코가 기다리던 무라타니 아사코가 묵고 있었습니다. 다쿠라가 죽었을 당시 아사코 여사의 가족도 모두 외출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라타니 아사코가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정확히 열세 개네.”
 사키노는 노리코에게 적은 내용을 다시 보여 줬다.
 “더 자세히 열거할 수도 있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하자.”
 노리코는 대충 읽어 보았다. 죽 읽어 보자, 일관된 굵은 선이 내 앞에 떠오른다.
 “그렇다면 다쿠라 씨의 죽음에 무라타니 선생님이 연관돼 있는 걸까?”
 전부터 느꼈던 희미한 의문이 조금 확실해졌다.
 “응.”
 사키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담배를 피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사키노의 옆얼굴이 노리코는 왠지 마음에 들었다.(73쪽)


 이야기는 여기서 다양한 질문들을 발생시켜 놓습니다. 다쿠라 요시조는 왜 죽었을까? 사고사일까? 자살일까? 타살일까? 어째서 수면제를 먹은 채 외출을 했을까? 죽였다면 누구 죽인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야기는 단순히 다쿠라 요시조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문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무라타니 아사코가 여관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다쿠라가 여관을 이어 바군 이유는 무엇인가? 전날 다쿠라 요시조를 찾은 부인은 왜 자살일 거라고 증언했는가? 아사코 작가의 남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런 의문점들을 노리코는 편집부에 같이 일하는 사키노 다쓰오에게 털어놓습니다. 이제 노리코와 사키노는 팀처럼 이 사건을 전문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편집장도 관심을 보이고 추적해 나가라고 하고, 사키노는 명탐정처럼 추리를 거듭하며 증거를 수집합니다. 사건의 의문점을 처음 접근한 노리코는 사키노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때로는 놀라운 발상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사키노가 주로 추리를 하고, 노리코는 조력자 역할에 머물러서 홈즈와 왓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노리코의 역할이 작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에서는 두 개의 플롯이 진행되는데, 사건을 추리하는 것과 함께 노리코와 사키노의 연애 전선도 점점 발전해 나갑니다. 사건의 추리는 이 두 사람의 유대 관계를 진전시키고,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두 사람의 데이트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이 관계를 주목하고 읽으면 대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묘한 감정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어서 또 다른 재미를 줍니다. 노리코가 사키노가 더러운 수건을 쓰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이, 관심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귀엽게 보이는 것이지요.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도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달달한 로맨스와는 다른, 막 관계를 시작하려는 남녀의 감정이 은근히 비쳐와서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엿보이는 소설이었죠.
 상당히 두툼한 책입니다. 578쪽에 달하는 본문을 보자면 의문점이 많은 만큼 그것들을 하나씩 밝혀나가는 편이라 전개가 상당히 느릿느릿 진행됩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많은 페이지가 주인공과 작가를 설명하느라 사용되었고,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작가의 표절 의혹이나,(이 표절 의혹에서 작가의 허영심이나 한 작품이 성공하고 이후에 작품이 없는 작가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중요 인물들이 사라지는 등으로 해서 아마츄어 탐정인 두 편집자의 추적은 한계에 부딪힙니다. 답답하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형사가 아닌 편집자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건도 추적해 나가기 때문에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습니다. 주로 노리코의 시선으로만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면이 있습니다. 혼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추리해나가는 사키노의 시점이었다면 소설의 분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리코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은근한 연애 감정과 추리를 하는 재미를 동시에 내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추리는 치밀하거나 정교한 편은 아닙니다. 전문적인 형사가 추리해나가고, 전문적인 범인이 범인을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에 가까운 편집자가 일반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쫓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야기는 우연의 연속이며 산만한 전개로 진행되는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비해 인물들을 현실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세계와 달리 현실 속 범죄들은 여러 우연들이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이런 우연이 사건의 진상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소설은 합리적이지 않고 우연이 많을수록 허술한 소설이 됩니다. 사키노와 노리코가 단번에 범인을 지목하고 사건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건이 추리 소설 속 사건에서 벗어난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추리 소설 속 사건이라면 정교하게 짜인 범죄를 사키노와 노리코가 오히려 헷갈리지 않고 빨리 맞출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범죄처럼 [푸른 묘점]의 사건은 ‘우연’이 겹쳐져 있고 이는 추리소설의 원칙에서는 어긋나는지 모르나, 오히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독자와 사키노와 노리코를 모두 혼란에 빠트리는 데 성공합니다. 즉, 작가가 모르고 실수로 한 것이 아니고, 어설프고 쉽게 범죄 방식을 설정하게 아니라, 일부러 느슨한 범죄 장치를 설정함으로써 정교하고 치밀한 범죄 수법과 위배되게 하여 여러 의문점들을 증폭시키는 방법으로 활용합니다. 이 소설이 분량이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연성’을 트릭으로 사용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기 때문입니다.
 추리 소설의 거장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답게 만만치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안에 다 읽어내려 갈 만큼 가독성 높은 문장과 흡인력이 일품인 소설입니다.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작가의 작품답게 정말 잘 읽히고 재미있습니다. 왜 4차례나 드라마화가 될 정도로 사랑받는 이야기인지 작품을 직접 읽고 알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로 하기 정말 좋은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상한 만남과 살인사건 이어서 작가의 표절의혹 등 의문이 의문을 낳는 구성도 페이지를 계속 넘길 수밖에 없게 만들고 관찰자 시점의 중심인물인 노리코의 행동이나 묘사도 생동감이 있습니다. 당시 출판계 모습은 물론이고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살인사건의 진상을 쫓지만 무겁지만은 않고 적당히 전개에 리듬이 있고 경쾌한 느낌이 있는 시원한 작품입니다.

 무라타니 아사코는 빨리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꽤나 까다로운 작가였다. 작가 중에는 편집자를 옆방에서 기다리게 해 놓고 하룻밤 만에 소설 한 편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담소를 나누면서 원고지 위에서 펜을 굴리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한낮에도 덧문을 닫은 채 완전히 홀로 있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작가도 있다. 무라타니 아사코는 후자에 해당한다. 아무리 원고가 늦어져도 편집자를 집 안에 들여놓고 기다리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다른 사람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산란해져서 도저히 못 쓴다니까요.”
 무라타니 아사코는 살찐 얼굴을 저으며 눈썹을 찡그리고 이렇게 말한다.(11~12쪽)


 마침 여사가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야. 하지만 후속작이 잘 써지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었지. 인간은 누구나 한두 가지의 소재는 가지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글재주가 있으면 그런대로 현상 공모전에 입상해서 인정받을 수 있어.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좋은 후속작이 나오지 않으면 또 그런대로 끝나 버리고 말아. 특히 무라타니 씨는 아버지가 문학자로도 식견이 있는 시시도 간지 박사였기에 언론도 그 점을 주목하여 처녀작에 대해 얼마간 후하게 평가해 준 면이 있지.(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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