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 SF/환상문학 테마 단편선 Miracle 5
이영수(듀나) 외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막 생길 즈음인 2003년도만 해도 한국 작가의 SF나 판타지 단편집은 두 세권에 불과했다. 책이 나오기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에 SF나 판타지 단편을 창작하는 작가도 찾기 힘들었다. 그때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당시 장편 위주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단편 위주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리고 매년 꾸준히 직접 단편집을 인쇄했다. 지금 한국에서 한국 작가의 SF, 판타지 단편집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분명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가들이 모였고, 작품들이 쌓였기 때문에.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단순히 한 해 동안 웹진에 발표한 단편들 중 엄선한 [대표 중단편선] 말고도 작가별로 작품을 모은 [개인 중단편선]을 냈다. 그리고 흡혈귀를 소재로한 단편만을 모은 [혈중환상농도 13%]나, 외계인을 소재로 한 [제15종 근접조우], 고양이를 소재로 한 단편집 [달과 아홉 냥] 등의 [소재별 중단편선]을 출간했다. 외국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종교와 과학의 대립, 유니콘을 소재로 한 단편집처럼 하나의 소재로 묶은 앤솔러지가 많이 출간되었으나, 국내에서는 거의 출간되지 않은 형식이었다. 한국 작가들의 장르소설, 소재별 앤솔러지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만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는 흡혈귀, 외계인, 고양이에 이어 또 다른 소재별 앤솔러지를 기획했다. 바로 ‘독재자’. 이 기획은 단순히 거울 안에서 기획되고 진행되어, 인쇄소에서 찍는 동인 형식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년 전과 다르게 이제는 몇몇 출판사에서 한국 작가의 SF, 판타지 단편집을 출간한 상황이었다. 충분히 소재별 앤솔러지 기획도 출간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침내 웅진의 문학에디션 ‘뿔’에서 ‘독재자’ 앤솔러지가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함께 진행되었다. 처음 기획이 시작된 지 일 년여가 지나 한국 최초의 ‘독재자’ 앤솔러지는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SF작가 듀나의 글을 수록하여 세상에 실물을 드러냈다.

파수/김창규
개화/정소연
신문이 말하기를/김보영
평형추/듀나
낙하산/곽재식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정보라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임태운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박성환


‘SF/환상문학 테마 단편집’ [독재자]에는 이렇게 총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에는 이미 웹상에 공개되어 읽어본 것도 있고, 이번에 처음 접하는 작품도 있다. 아쉬운 점은 신작이 몇 편 더 있어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럼 각 작품별로 간단한 리뷰를 적어보고자 한다.

파수/김창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먼 미래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는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은 곳이다. 파수는 태양과 3광년 떨어진 블랙홀에 각각 하나씩 자리를 잡고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기계다. 그러나 주인공이 사는 세계와 그 옆의 우주는 이미 나이를 많이 먹어 잔존 에너지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다른 우주로 이주할 여력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는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서 하루라도 더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소설의 시작 시점에서 인류는 2458명이고 세계는 반경 187킬로미터의 원이다. 파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주에 남은 에너지의 찌꺼기들을 끌어오고 있다. 파수꾼들이 하는 일이란 파멸과 세계 사이에서 에너지의 순환을 제어하는 것이다.
SF에서 멸망에 다다른 세계는 그리 특별한 배경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내 창작 SF에서 이렇게 무기력한 인류와 철저하게 수치적으로 에너지를 조정하고 생존하는 인류의 모습은 새롭고 흥미로웠다. 이렇게 세계관은 매력적이고 초반의 긴장을 제시하지만, 후반부는 약간 급하게 진행되고, 독재자와 연결되는 요소는 약간 헐거운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쇠퇴하고 있는 인류, 그야말로 잔존하고 있는 인류가 철저한 수치로 세계를 조정하고, 또 사람을 투표로 희생시켜나가는 설정은 인상적이며,(톰 고드윈의 SF단편 {차가운 방정식}도 연상되었다.) 오히려 이런 설정에 국회의원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더 재미있게 흘러갔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세계와 파멸의 경계면은 순전히 파수의 힘으로 지탱되고 있어요. 하지만 양쪽의 차이는 단순히 에너지 준위만이 아니에요, 우주가 나이를 먹으면 입자들이 붕괴하죠, 우리 세계는 인공적으로 그걸 막고 있고요. 즉 이 바깥의 물질들은 구조가 다른 거예요. 확실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의 뇌파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그래서…….” ― {파수}, 20쪽.

파멸에 다다른 세계 속에 보이는 독재자의 모습. 독재자의 말로보다 세계의 설정에 더 눈길이 가는 작품이었다. 이 세계 속에서 좀 더 다른 이야기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개화/정소연


나중에 들으니까 그때 언니는 의주에서 땅 파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는 평생 그 짓밖에 안 한 것 같아요. 파헤치기. 어려서는 책 파더니 나이 들어서는 땅 파고, 삽 들고 인터넷 유선망 자르고 다닌다는 얘길 집에 온 수사관에게 처음 들었을 때는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외국까지 가서 기껏 배워온 게 다른 나라에서는 인터넷에 마음대로 접속해서 검색할 수 있고 성분증명 일일이 안 해도 된다는 얘기라니, 컴퓨터 공학 전공도 아닌 사람이 대체 뭘 공부하고 온 거래요? ― {개화}, 42쪽

한 소녀가 자신의 언니에 대해서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서술된 단편이다. 일단 그러한 서술 방식이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누군가 바로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적혀 있기 때문에 몰입을 하기가 쉬웠다. 특이한 점은 중간 중간 사람들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는데, 거기서 설명하는 화분이다. 사람들은 그냥 꽃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물 먹고 햇빛 받아 작동하는 기계. 꽃으로 착각할 수 있는 공유기라는 설정은 신선했다.
소설 속 세계는 정부가 성분인증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중국이나 북한 사회의 인터넷 제도와 인터넷 실명제 등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다.
사건은 복잡하지 않다. 동생의 일방적인 목소리만 적혀 있는 소설이지만, 사건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읽으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앞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문단에서 여운이 남는 단편이었다.
독재자보다는 독재자에 의해 만들어진 폐쇄된 시스템 속 인간의 저항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여동생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 간극에서 더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단순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울림을 주는 것이다. 동생의 말 속에서는 원망만이 아니라 가족이 가지는 필연적이 정이 느껴지고,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언니의 캐릭터와 행동은 독자가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만든다. 자유를 위해, 신념을 위해 무언가 계속 노력하는 이야기는 인물에게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마침내 개화가 되는 순간, 가족 간의 불화, 이해할 수 없는 언니, 와닿지 않는 자유의 세상, 모든 게 한데 뒤섞여 수 만 송이의 꽃으로 수렴된다. 따뜻한 이야기다. 그래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신문이 말하기를/김보영


아버지, ‘그들’은 없어요. 아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어디서 어떻게 세뇌되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들’은 없어요. 뇌를 빼앗긴 사람도 없고 외계인도 침략자도 없어요. 정신 바이러스도 인공혈액도 없어요. 남자는 왜 요즘 세대들은 이렇게 현실감이 없는지 궁금했다. ― {신문이 말하기를}, 67쪽.

올해 개인 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를 출간한 김보영 작가의 단편이다. 이 단편은 두 단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미 환상문학웹진 거울 웹상에서 공개한 적이 있는 글이지만, 인쇄된 책으로 읽으려면 이 책을 보는 수밖에 없다.
첫 장에 바로 ‘경고/ 이 작품은 무단 도용, 표절, 저작권침해로 점철되어 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문구가 보인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문구인데, 그만큼 이 소설이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다. 이 소설은 가상의 신문 기사를 그대로 삽입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일반적인 서술 중간마다 신문 기사가 삽입되어 있다. 이 신문 기사의 내용은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있지만, 신문은 뻔뻔하게 홀로그램 등 여러 과학 기술로 나타난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신문의 주장이 사실은 우리 세상에서 사서 보는 신문과 아무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소설이 얼마나 풍자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판타지나 SF의 미덕 중 하나는 바로 이 풍자성일 것이다. 일반적인 SF의 재미보다는 풍자에 치중을 한 작품으로 앤솔러지에 부합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다만, 소설이 지나치게 정직한 자세로 풍자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SF 작품에서 얻는 성질의 재미와는 좀 다르다.) 독재자와 통제된 시스템이 모두 신문상에서 소문으로 처리된다. 사람들은 신문만을 믿는다. 광기도 아니다. 사람들이 악인이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들은 통제받고 있을 뿐이다. 여론이 통제된 사회의 무서움을, 과학기술 비유를 통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프게 그려내고 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지점은 웃기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한 것이다. 소설이 우리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우리의 현실은 때론 소설보다 암울하다.

평형추/듀나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웜을 이식해준다는 스팸 메일이 날아들었다. 루머를 믿지 않았던 그는 메일을 지우고 잊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LK에 입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 그는 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진짜였고 병원이나 장의사에서 불법으로 거둬들인 웜들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식 성공률은 82퍼센트였다. 그들이 그 통계를 어떻게 냈는지 알고 싶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이 제시한 비교적 저렴한 비용이, 그를 실험용 마루타로 삼는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비용을 지불했다. 그들은 낡은 모텔 방에서 그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웜을 삽입했다. ― {평형추}, 87쪽

우선 소재들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국가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다국적 기업 LK의 첩보부. 우주 엘리베이터. 뇌에 연결하여 인간의 기억, 정신 등을 강화하는 ‘웜’이라는 기계. 이런 소재들이 적당한 위치에 자리잡고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긴밀하게 연결된다. 플롯이 잘 짜인 작품 중 하나로 독자가 정신없이 이야기를 따라가기에는 약간 숨이 차는 느낌도 든다.
신입사원 최강우에게는 의심쩍은 점이 있다. 주인공이 ‘나’는 최강우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죽은 회장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빙의가 아니라 ‘웜’에 의해서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은 이걸 이용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더 복잡한 음모가 깔려 있었고, 순식간에 그 음모의 물결에 휩쓸리고 만다. 전개가 빨라서 초반부터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만큼 압축된 듯한 서사가 급박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쉽다.(다만, 나중에 이 작품이 장편으로 개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서사는 분량이 늘어나면 더 흥미로울 듯하다.)
장치들이 흥미롭기 때문에 이 배경 하에서 다른 이야기들이 탄생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이 단편만으로도 충분히 완결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과 다른 방식으로 ‘독재자’라는 소재와 접속한 단편이다.

낙하산/곽재식


비행기가 폭파되었다. 나는 B747-400 여객기 40C 좌석에 앉아 있다가, 단숨에 1만 5천 피트 상공에 내동댕이쳐졌다.
불과 몇 초 전에 앉아 있던 자리가 갑자기 굉장한 기세로 뒤흔들리고 뭔가 번쩍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사정없이 강력한 폭풍이 온몸을 휘감았던 것도 기억난다. 그래서 뭔가 싶어 두리번거리고 나니, 나는 튕겨 나오듯 비행기에서 멀어지며 날아가고 있었다. ― {낙하산}, 119쪽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예전에 발표되었던 단편이다. 이미 읽었던 작품이지만, 오랜만에 읽으니 기억이 새롭다. 낙하산에 관련된 환상적인 요소만 기억해서 어째서 ‘독재자’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는지 의아했으나, 연구실에 새로 부임한 부소장에 의해서 부조리한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납득하게 되었다. 온갖 불합리한 조치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사회의 일면. 일상에서 독재자, 권력에 관한 소재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 점은 정말 실감났다.(거창한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혹은 거대한 억압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불합리한 불변의 제도 등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에 밀착한 단편이었다. 여기에 덧붙여진 환상은 약간의 재미를 더해준다. 주인공은 매일 같은 꿈을 반복하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꿈. 어째서 그런 꿈이 반복되는 것일까? 그것은 예지몽일까? 어떤 암시일까? 아니면 단순히 부소장에 의한 스트레스일까? 부소장에 의해 자행되는 헛짓들. 일상의 독재자와 불합리한 시스템을 절묘하게 그렸다. 거기에 반복되는 꿈이라는 소재는 이야기에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독자는 계속 불안감을 안고 추리를 해나가게 된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그게…… 사실이라 해도, 제가 의도한 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이런 곳에 갇힐 수 없어요. 대체 여긴 어딥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선생님을 가둘 생각이 없어요. 하나만 제대로 이행해주시면 바로 내보내드리겠습니다.”
“뭔가요?”
“성대 제거술입니다.”
승균은 충격을 받았다. 합리적인 제안이었으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목소리를 드릴게요}, 148쪽


매우 유쾌한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위트 있는 주인공 화자의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긴장하고 볼 필요가 없이 마음 편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는 단편이었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저마다 개성이 있고 살아있어서 다들 인상적이었다. 한 명, 한 명 다 정이 가는 캐릭터였고, 이야기 구조도 잘 짜여 있어서 재미있었다. 또한, 이야기가 끝난 느낌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상상을 하게 되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일종의 능력자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수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의 설정도 재미있었다. 성년의 날이 지나면 특별한 능력이 발현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은 살인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졌고, 하민은 머리카락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능력을 가졌다. 주인공은 목소리를 잃어야만 나갈 수 있고, 하민은 머리카락과 모든 체모를 레이저로 제거해야만 갇힌 곳에서 나갈 수 있다. 김경모는 슈퍼 보균자로 각종 바이러스나 세균의 숙주가 되어 타인에게 증세를 증폭시킨다. 이런 다양한 능력들이 재미있었고, 이런 능력자들끼리는 옮지 않는다는 설정도 재미있었다. 또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더욱 특이했는데, 바로 하나만 바라보는 일목인들이다.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원하는 것 하나만 충족하면 뭐든 가리지 않고 한다고 한다. 이런 능력들과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엮여 있는 단편이었다.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정보라

잘 쓰인 환상소설이다. 액자 형식으로 처음과 끝에는 발견된 원고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소설 본문은 가상의 원고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가상의 원고의 문체는 독특해서 읽는 재미를 준다. 환상적인 요소가 독재자와 잘 결합된 형식의 글이었다. 이야기가 어떤 전개를 보일지 궁금해서 계속 빠르게 읽어나갔다. 이 소설이 기록물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시간 또한 지배한다. 시간은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남는다. 기억을 잃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어둠 속에 잠기면 그 어둠 속으로부터 그들이 솟아오른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 [원문 일부 해독 불가]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배푸소서. ―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 196쪽

이렇게 글 중간에 ‘원문 해독 불가’라는 문구 등을 삽입하여 이 글이 발견된 원고임을 보여주기도 하고, 같은 문구가 반복되며 마치 서사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시간의 구슬이라는 설정이나, 진행되는 이야기들도 글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요소였다. 배경이나 문체를 통해 ‘독재자’를 환상소설이라는 장르로 잘 소화한 느낌이 들었다.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전능한 힘을 주는 물건과 오래 전 군주의 이야기. 다른 소설들과 다르게 환상성이 강하고, 독재자가 남긴 독백 형식의 기록물이라 색다른 느낌을 주는 단편이었다.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임태운


볼스테고 헬브라이드.
그를 수식하는 말은 지나치게 많았다. 그에 대한 셀 수 없는 호칭들은 돌멩이라 가정하고 나누어보자. 형이상학적인 쪽으로 따져보면 태양의 주인, 강철의 파수꾼, 율법의 지배자 등의 이름들이 자갈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다. 반대로 형이하학적인 경우에는 제국 제일의 무사, 옥쇄의 소유자, 나르팅그 성의 황제 등의 이름들이 모래사장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헬브라이드에 대한 호칭은 니손의 머릿속에 오직 하나만이 커다란 바위처럼 박혀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폭군입니다. 폐하.” ―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 219쪽


인용한 첫 문단의 이름들이나 명칭들을 보면 느껴지듯이, 일반적인 장르 판타지의 느낌이 나는 판타지 단편이다. 이 단편 역시 개인적으로는 웹상에서 읽었던 글이다. 이 소설 속 세계는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판타지 세계관에서 ‘볼스테고 헬브라이드’라는 폭군이 존재한다. 이 폭군은 락스팽가투 제국의 황제다. 이 황제와 단독으로 마주한 주인공은 황당하게도 ‘금붕어’ 한 마리를 보여준다. 게다가 주인공 ‘니손’은 금붕어가 황제의 목숨을 앗을 거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독자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금붕어 한 마리가 최강의 무력을 가진 황제를 암살할 수 있단 말인가. 입담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훌륭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유쾌하게 잘 읽힌다는 장점을 가진 것이다. 다만, 이야기나 형식이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라서 다 읽고 나서도 조금 심심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하이 판타지 세계관 안에서 주인공은 폭군에 맞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가.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박성환

소설은 초반의 김창규 작가의 {유가폐점} 등을 인용하며 이 소설 속 배경이 인류가 네트워크에 접속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그곳은 ‘도시’가 있다. 그리고 노예들이 사막의 끝없는 모래를 구워 성벽을 올리고 있다.(이런 배경 때문에 글은 실체가 불분명한 느낌으로 싸여 있다.)


이 사막의 모래들은 ‘접속’된 모든 인류의 식역 이하, 무의식에 파묻힌 뉴런들의 가용 연산 자원 전체의 표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한때는 정말로 있었더랬다. 모래를 구워 벽돌을 만들어 쌓아 올리는 과정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기억과 생각, 추억― 그러니까 존재 기반 자체의 고의적 망실 과정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 혹은 그런 주장에 귀 기울이던 사람들은 대개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애로 접속이 종료되곤 해서, 이제 남은 사람들은 이유도 목적도 묻지 않고 묵묵히, 벽돌을 굽고, 나르고, 쌓아 올린 다음 낡은 동전 몇 푼을 손에 넣을 뿐이다. ―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 257~258쪽.

위의 인용은 이 작품의 배경을 잘 서명해준다. 이곳은 먼 미래에 네트워크에 접속된 인류와 독재자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고,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면이기도 하다. 이렇게 미래를 그리면서 동시에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 통합 프로젝트’에 관한 설정들 역시 흥미롭고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복잡한 면이 있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무게감이 있으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먼 미래, 인류가 만들어낸 혹은 지금 우리가 이미 만들어낸 독재자의 모습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또 다른 소재별 앤솔러지를 기대하며

처음에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독재자’라는 소재가 과연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대부분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SF와 판타지 또 그 안에서도 각각 다른 느낌을 주는 소설들이 가득 차 있었다. 현실을 배경으로 한 환상, 중세를 배경으로 한 환상, 먼 미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 독재자의 모습도 각기 달랐다. 스스로 무너지는 독재자, 또는 독재자의 탄생, 독재자의 말로, 독재자의 의미 등. 자칫 지루하고 딱딱한, 혹은 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던 ‘독재자’라는 소재는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만나 우리에게 아홉 가지의 차별화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점이 바로 소재별 앤솔러지의 장점일 것이다.
흡혈귀, 외계인, 고양이 그리고 독재자.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지나온 발자취는 그 하나하나가 한국 SF/판타지의 역사가 되었다. 최초로 단편 중심의 환상소설 웹진이 되었고, 많은 독자가 보는 정식 출판은 아니더라도, 매년 [대표 중단편선]을 출간하며 꿋꿋이 작품을 발표하고 최근에는 웹진 거울 필진들이 정식으로 출판사에서 그 동안 보기 힘들었던 SF나 판타지 단편집을 출간했다. 그리고 이제는 [소재별 중단편선] 역시 거울에서 자체 기획 후, 정식으로 출판사에 출간되었다. 이렇게 그 동안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획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2009년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소백산천문대에서 열린 국내 최초의 과학자, 작가 창작워크숍 등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워크숍을 통해 오멜라스에서 출간된 [백만 광년의 고독] 역시 우주와 외계라는 동일한 테마를 가지고 일곱 명의 작가들이 각기 다른 상상력을 펼쳐보였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기획과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이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지 기대된다. 이런 단편집들의 출간이 모여서 마치 [독재자]에 수록된 단편 {개화}처럼 언젠가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상을 쓰며 책들이 하나 둘 개화를 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이런 시도가 늘어날수록 더 멋진 작품을 접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다음에 어떤 기획으로 새로운 장르 단편집이 출간될지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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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읽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