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진 작가의 단편집 [각인]에서는 1인극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모든 단편소설이 1인칭 화자에 중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할 테지만, [각인]에서 느껴지는 집요함은 다르다. 마치 한 명의 목소리가 9번 반복되는 것처럼, 내면으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독자에게 새겨지는 것만 같다.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의 울림이 있다. 단지, 강렬한 플롯이나 잔혹한 장면만으로 이런 느낌이 조성되는 게 아니라, 단편집을 이룬 단편의 배치와 단편들의 구성과 인물들이 하나의 일관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소설들은 우리 안에 어떤 심연에 닿으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화자들이 닿으려는 건, 외부와의 누군가가 아니다. 이 소설들에는 다른 작품들처럼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서사’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의 배제에서 벌어지는 ‘심리’와 ‘이미지’의 집중이 돋보인다. 세계관이 치밀하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세계관은 무대 위에 놓인 소품처럼 다뤄진다. 연극으로 치자면 독백조차도 적다. 상황과 행위만으로 글을 이끌어간다. 모노극처럼 느껴진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심연 속에 잠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심연이 어떤 해답이 될 수도, 다른 세계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연은 불가해한 장소이며, 정체불명의 내면이다. 영원히 해석할 수 없는 문제다. 자기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풀어낼 수 없는 신비다. 우리 안에는 각자 심연이 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흔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건 자신도 몰랐던 재능일 수도, 욕망일 수도, 감정일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성이나, 죽음의 욕구일 수도 있다. 세계를 파괴하려는 행위나 세계를 구원하려는 행위 역시 그 안에 있을 수 있다. 심연에 닿으려는 건 곧 세상의 근원에 가닿는 행위와 흡사하다.
그렇지만 이 소설들은 이질적이다. 보통 외부의 전형적인 서사의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배경을 드러내고 인물을 설명하고,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하는 구조가 아니다. 해결해야 할 사건은 없다. 해결할 수도 없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질문도 응답도 없다.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의 심연에 닿으려는 여러 시선들. 우리는 자신의 심연 속에 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들 속에 그려지는 시선들은 낯설기 짝이 없다. 그게 이 소설의 낯선 면을 만든다. 그 시선은 무엇일까. 진실에서부터 영원히 회피하려는 시선. 타인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 자신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 그러나 이 여러 갈래의 시선들은 걸핏하면 길을 잃는다. 외부를 바라보고 관조하다가 때론 무심한 척하고 침묵하며 좌절한다. 시선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해 결국에는 어둠에 잠식되고 만다.
시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상처를 풀어헤쳐 놓거나, 상처를 내거나, 혹은 봉합하는 행위가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제목들은 바로 그 일련의 흐름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나 사이에 놓인 횡단보도를 지나 심연에 닿으려는 행위. 누군가에게 존재로서 선물이 될 수도 있고, 심연에 닿으려는 행위를 무대에서 펼쳐 보일 수도 있으며, 집사의 시선으로, 학교에서, 또 자기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내서, 무간지옥 같은 불멸자의 일상에서, 뒤바뀌어버린 세계, 단절된 세계에 빠져버린 아이들로 제시된다.
시선은 외부(세계)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 점으로 수축한다. 그때 세계가 한 점으로 응축되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강렬히 각인된다. 이 소설은 이런 시선의 각인들이 모여 있다.
물과 유리 조각으로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물에 젖어 더 거치적거릴 조각들을 치우고 닦을 생각을 하다보니 이제 다치는 게 지겨워졌다. 그런데 언제는 다치고 싶어서 다쳤던가.(46쪽)
화자는 끊임없이 과거의 한 지점으로 돌아가면서, 회상하면서 외부의 세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화자의 시선으로 우리도 화자를 구성한 지리멸렬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를 둘러싼 거리감 있는 타인들을, 상처 입고 입히는 관계들을 바라본다. 그 외부 세계는 이내 마지막에는 발바닥에 밟히는 조각들로 수렴된다. 앞서 보여준, 시선들이 한 점으로 모여서 발바닥에 조각들로 밟히고, 우리는 앞으로도 그 시선들을 밟고 가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새벽 6시였다. 식구들은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수간을 챙겨 들고 욕실로 갔다. 아직 냉수 목욕을 할 때는 아니지만 샤워기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돌렸다. 벽을 짚고 서서 몇 번이고 호흡을 확인했다. 샤워기에서 물줄기를 맞는 동안 숨을 멈추고 있어도 좋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오래도록 심호흡을 한 후에야 수도를 열었다. 차가운 물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온몸을 벌벌 떨며 주먹을 굳게 쥐고 몸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개수구로 흘러 나가는걸 바라보았다.(75쪽)
우리 내면을 비유하는 듯한, 세상의 중심부로 한없이 내려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편 「심연」. 이 단편에서는 이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바다와 잠수의 색다른 경험을 디테일 있는 묘사로 사실감 있게 그리고 있는데, 마지막 장면은 익숙한 풍경이다. 새벽 6시, 식구들이 자고 있을 시간에 샤워기에서 물을 튼다. 물이 개수구로 흘러 나가는 걸 바라보는 마지막 시선은 그런데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자장 안에서 이 장면은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앞에 화자가 경험한 외부 세계가, 느꼈던 모든 감정이,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이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같은 물이라는 상징으로 전유되어 무중력의 바다 속에 빠져들었던 기분, 죽음의 감각이 다시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개수구에 빨려드는 물을 예사롭지 않게 보게 만든다. 앞서 있던 경험들이 새로운 환상적인 설정으로 세계관을 만들지 않아도, 새로운 세계를 덧씌우고 있는 것이다. 이 전이의 충격, 이미지의 간극에서 오는 느낌은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남게 만든다.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세계를 천연덕스럽게 그려낸 「선물」은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를 찾아 만나게 되면서 묘한 울림을 준다. 매혹 능력이 없어서, 사람을 기절시키기 위해 고생하는 여자 뱀파이어와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남자가 어울려 합을 이루는 과정은 소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아 가는 느낌을 주면서 안정적이면서도, 위안을 주는 글이다. 사람은 결국 타인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제대로 이해받지도, 무리에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 비슷한 내면을 가졌다는 것. 그 어울림이 주는 무게감이 소설의 원동력이다. 환상과 현실이 적절하게 배합되면서 주는 묘한 느낌과 적나라한 타인들의 시선이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은, 이 소설이 뱀파이어가 등장함에도 붕 뜨지 않고 현실적인 세계로 느껴지게끔 한다. 뱀파이어들 사이에서의 대화도 여느 남매처럼 처리한다든지, 뱀파이어 여자 친구인지 모르고, 일반적인 여자 친구가 생긴 걸로 오해하며 던지는 타인들의 말들이 사실적이고, 남자 화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하는 부분 역시 일상과 환상 사이에 적절히 걸쳐져 있어서, 어느 쪽으로도 말이 되게 그럴 듯한 해석이 나온다는 점은 이 소설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소설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수록된 「무대」 역시 실제 희곡 같은 구성을 차용하면서 소설에 낯선 형식이 주는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소설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지만, 한편으로 이 화자의 사고는 끊임없이 배역을 설정하고, 세계를 무대로 보는 한 사람의 내면을 촘촘히 파고들어간 소설로서 형식과 내용이 맞물리며 완성도를 높인 글이다.
「학교」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환상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글이다. 그렇지만 역시 현실을 비튼 해석으로, 즉 세계의 은유로 보아도 무리 없게 만든 작품임은 물론이며, 동시에 환상성이 주는 그로테스크하면서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격과 파격적인 설정이 주는 당혹감이 재미로 느껴지게 만든 소설이다. 오직 수능만을 바라보며 학교에서 벗어나는 청소년은 낙오자처럼 만드는 이 사회를 이전의 『배틀로얄』 같은 여러 소설이 그러하듯 충격적인 설정으로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점이 직접적인 비유처럼 작용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소설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함과 동시에 사실적인 심리 묘사 등이 핍진성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늘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언제나 다른 아이들이 날 찾아내 당선시킬까봐 숨 죽여 살았다. 전보다 더 납작 엎드려 숨어 다녀야 했다. 절대 저 아이들에게 발각되어선 안 되었다. 나는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텅 빈 운동장에 홀로 서 있었다.(211쪽)
주인공인 ‘나’는 매번 죽을 아이를 뽑는 ‘당선’이 되지 않으려고 평균 점수만을 받아왔다. 이런 잔혹한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로 살아가기 위한 행동은 언뜻 보면 당연하고, 영리한 처신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들 사이에 일어날 법한 어그러짐을 치밀하게 그려내면서 ‘나’를 학교 밖으로 쫓아낸다.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 사는 숲. 그곳에는 ‘아기’가 사람이 되기 전 괴물인 곳이고, 아이들끼리 몰려 살고 있다. 이곳도 학교와 같은 ‘당선’ 제도만 없을 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유사하며 이 소설집에 실린 비슷한 영혼을 가진 주인공들처럼 ‘나’는 세상에 유리된 단절감을 맛본다. 그럼에도 꿋꿋이 버텨내려고 하지만, 세상의 무정함, 부조리성에 마주하게 된다. ‘나’가 학교에서 타인을 관찰하는 시선, 주목을 받는 시선, 학교 밖 숲에서 다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등은 세계와의 불화를 지닌 자아의 몸부림이다. ‘나’는 자기 내면에 닿을 수도, 욕망에 충실할 수도 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 떠밀리고 맞부딪치고 헤매다 파국을 맞는다. 그건 세계라는 시스템이 이미 파국으로 운영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아가 끝내 세계와 불화를 했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포착하는 지점은 이 자아의 내면, 그 심연의 몸짓이다. 세계와의 불화 속에 부유하는 ‘나’의 시선이 각각 학교와 학교 밖 숲, 외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마침내는 어둠에 잠식되는 순간, 이 소설은 다시금 ‘나’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만들고, 그 생각들을 떠올리게 만들고, 어디서부터 이 흐름이 시작되었는지, 누가 시작했는지, 부조리를 생각하고 낱낱이 파헤치게 된다. 소설은 다시금 우리 자신과 소설과 이 세계에 대해서 묻게 만든다. 세계에 패배할 수밖에 없으며 끝없이 파국을 맞고 있는 사람들, 자신을, 이 ‘나’에 빗대어 생각하게 된다. 은유로만 이 소설을 판단하는 것은 작품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보려는 태도에 그치는 것일 수 있다. 그보다는 이 화자의 사고가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세계와의 불화와 그 관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연역하는 과정에서 이 소설이 가진 힘과 문제의식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을 크게 세 분류로 나눈다면, 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과,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것, 환상성이 깃든 배경으로 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집사」와 「클론」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설정된 작품으로, SF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도 크로스로드에 실린 이 두 편은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주로 공간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이며, 로봇 기술이나 클론 기술 등이 소설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집사에서는 집사 로봇의 시선으로만 소설이 진행되는데, 로봇의 시선으로 관찰되는 화자의 내면을 행동과 대사만으로 추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소설 역시 별다른 큰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로봇을 넣어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관찰 대상인 주인공 역시 남들과 다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인물들은 다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는 문제적 인물들인데, 세계와 유리된 느낌이 크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이 세계와의 거리감에서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행동을 취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집사의 주인공은 달로 떠남으로써 일종의 회피를 택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집사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점에서 단순 도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려 하거나, 심연에 직접 닿으려는 행위로도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 사람이랑 헤어졌을 때, 하나도 안 슬펐어. 그 사람 집도 이 근처고, 회사도 여기서 안 멀어. 만약에 그 사람이랑 끝까지 잘 되었다면, 영원히 여기서 살았겠지.”(191쪽)
‘마님’에게 집사 로봇은 헤어진 남자 친구의 물건으로 느껴지고, 지구 자체가 남자 친구가 있는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한때는 마님에게 세계는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불광’이었고, 부모님이 내려간 ‘시골’이 될 수도 있었지만,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곳 같아서 가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집사 로봇과 사는 공간이 또한 마님의 세계였지만, 영원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다시금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를 떠나 달에 갈 수 있는 기회를 택한다. 우리가 때때로 내리는 결정들과 닿아있는데, 결국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공간의 전환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심연에 닿으려면, 태국으로 떠나 깊은 심해 속에 들어가보든가, 학교 밖 숲 속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정답이 예정된 길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대표적인 작품이 환상성이 두드러지는 작품 중 하나인 「살아남은 아이들」에서 드러난다. 그림을 그려서 자신이 성공한 세계를 찾아보았던 ‘아빠’는 결국 어디서도 그런 세계를 찾아내지 못하며, 아이러니하게 그림을 포기해서야 잘 사는 자신을 발견하고 뒤바꾼다. 그러고 나서 하는 행위는 또다시 그림 그리기이다. 결국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그 사람 자체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엄마와 아빠가 서슴없이 세계를 건너가고 아이를 죽이는 행위를 하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일상적인 행위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 점이 이 작품이 독창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지점이다. 예술에 대한 집착이 비틀린 것처럼, 광기처럼, 절망처럼 느껴진다. 절망을 추구하는 욕망이 무한히 펼쳐지는 세계 속에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광기의 희생자인 아이들은 처음에는 미스터리한 구성을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지면서도 끝내는 폭력 속에 부서진 또 다른 현실과 세계의 부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능과 그림으로 잇는 평행세계를 잇는 환상적인 장치가 많아 유독 과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면서도, 죽은 희재가 그림으로 희철의 곁을 서성이고, 희선이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운명에 속박된 듯한 엄마아빠에게 욕을 하며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리 시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이 한 편의 기묘한 연극을 본 듯한 느낌을 준다.
시시포스를 연상케 하는 끊임없이 죽음을 구하고 살아나고, 또다시 삶이 벗어날 수 없는 저주받은 세계처럼 느끼는 영생자의 이야기를 다룬 「일상」은 소재에 비해 클라이맥스는 카페 매니저를 붙잡는다는 아주 소박한 사건에 있다. 이 소설집의 상당수가 그렇다. 단편이라는 장르의 특성도 있지만, 사건이 없거나, 혹은 스케일이 작은 소박한 사건들로 이루어지면서, 이야기가 결말을 맺는다. 횡단보도에서도 마지막 장면은 조각을 밟는 것이며, 심연에서는 개수구의 빨려드는 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큰 사건은 중간에 잠수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인데, 일상에서 이야기하면 소소한 체험담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집사에서도 집사 로봇은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할 따름이며, 마님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달로 떠날 뿐이다. 애인과 헤어지고 이사를 가는 한 여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에서도 평행세계가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술 취한 아빠를 무시한 채 그림만 거는 작은 행위로 이야기를 일단락 짓는다. 학교에서도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아직 사람이 되지 않은 괴물 같은 아기가 이탈해서 덮치면서 ‘나’에게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할 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결국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굵직한 서사 중심의 소설들이 아니며, 외부를 관조하는 시선과 세계와의 불화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들이 가닿으려는 내면을 조명하고 있다. 소설들이 갖는 개성도 거기에 있으며, 절절한 문장이나, 선명한 묘사 없이도 상황과 서술 중심으로도 관찰하는 시선만으로도 시선의 교차와 전환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인물을 그려내며,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학교, 수중, 가상의 무대라는 공간으로 혹은 영생의 삶, 복제된 자기 자신인 클론, 집사 로봇 등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을 드러내고 비춤으로써 그 각인을 드러내고, 독자의 마음에도 하나의 응축된 이미지로 각인을 남기는 소설집인 것이다.
비정하고 부조리하면서도 불합리한 외부 세계들, 인간들, 타인을 섬뜩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환상적인 장치를 적절히 섞는다. 그래서 그 교차점에서 독특한 이미지들이 생성되고 독자를 끌어들이며, 새로운 세계를 선보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1차원적인 알레고리를 형상화한 것 같은 배경을 가진 이야기들도,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는 무언가 결핍되어 있으면서도 독특한 시선을 견지하여 이야기의 겹을 두텁게 만든다. 세계를 읽고, 서사를 읽으면서 자아의 형태를 독자가 구성하고, 이해하고, 각인을 어루만지는 과정이,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심연으로 다이빙하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돌아오자면, 9명으로 분화된 한 상처 입은 거인의 내면 속을 다이빙 했다가 천천히 올라온 기분이다. 어쩌면 섣불리 독서를 한다면 잠수병 에 걸려 머리가 얼얼하고 여운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 수도 있다. 때로 나는 무대 위의 인물처럼, 배역을 바꿔가며 연기했고, 새로운 배역을 찾고, 이 세상을 벗어나려고 죽음을 시도하다가도, 살기 위해서 학교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지만, 사람이 되지 못한 아기에게 공격당하고 타인과의 거리감만큼 불길 속에 시선이 끊긴다. 집사는 산책을 가지 못하고, 다른 평행세계에서는 자아를 표백 당했지만, 또 다른 평행세계에서는 새 주인을 맞아 목소리를 되찾는다. 이들은 세계를 바라보고 또 타인에게 목격 당하면서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심연은 어둡고 무한하게만 보인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며, 때로 자신의 각인을 어루만져주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세계의 냉혹함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고, 자신보다 더 자신 같은 자신이, 잊힌 인연이, 헤어진 연인이, 살해당한 형이, 헤어나올 길이 없는 영생이란 저주가, 새로운 연인이, 새로운 주인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소설 속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들의 삶과 사고는 상처 입어도 때로는 움직여야 하고, 읽어야 하고, 써야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상처 입은 개들이 서로를 핥는 행위처럼, 아련하게 읽힌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아 줄 수 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지 않은가. 시선은 그 자체로 상처를 드러내지만, 시선이 없이는 상처를 인지할 수도 없다. 소설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우리는 결핍과 상처를 드러낸다. 그것을 읽는다. 또다시 쓴다. 그게 심연을 어루만지는 행위이고, 각인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