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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문 이후 밀리언셀러 클럽 12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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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문 이후(Just After Sunset, 2008) - 현실의 공포가 다가올 때

 스티븐 킹의 신작 단편집이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해가 저문 이후]. 원서는 2008년도에 출간되었으며, 13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스티븐 킹의 신작 단편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완숙한 필력과 다채로운 발상, 자유로운 전개가 가득한 단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쓰인 단편들 위주로 수록된 [해가 저문 이후]는 역시 거장의 필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단편집인 만큼 취향에 맞는 작품이 있는 한편, 소품이나, 지루한 작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흡족한 독서였다. 사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사고 책장을 넘기게 될 텐데.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윌라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윌라]는 스티븐 킹에게는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스티븐 킹이 다시 활력을 찾고 옛날 방식으로 글을 쓴 단편이라고 한다. 즉, 다시 단편을 활기차게 쓰이게 해 준 작품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대부분은 [윌라] 이후에 쓰여졌다고 한다. 과연 작가에게 사랑스러운 단편이 아닐 수 없다. 독자 입장에서는 마냥 즐거운 작품은 아니었다. 죽었는지 몰랐던 유령들이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라니. 아이디어는 단순했고, 새로운 발상이나 전개는 없었다. 도입부는 산만했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 후에는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놀라운 서사구조와 반전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닳고 닳은 ‘유령’을 다룬 이 소설이 실망스러울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감을 버리고, 가볍게 읽을 소품으로는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큰 서사는 없지만 단편에 어울리는 거침없는 전개와 속도감이 있고, 이 소재를 암울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커플을 등장시켜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이미 죽은 상태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사후의 삶을 이어나가는 극복의 의지가 흥미롭다. 개인적인 취향 탓으로 이런 소재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나 스티븐 킹이 그리는 이 단편은 알 수 없는 활기가 흐르고 있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진저브래드 걸
 한 여자가 우연찮게 살인마에게 쫓기게 되는 이야기. 이 단편을 한 줄로 간추리자면 이렇게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우리 삶이 그렇게 요약될 수 없듯이 말이다. 단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쓰기란 쉽지 않다. 단순한 추격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주인공에게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여지를 주어야 하며, 배경에 대한 현실성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소설은 스티븐 킹의 능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단편으로, 결코 긴 분량이 아님에도 이 모든 것을 성공했다. 따라서 독자가 몰입할 수 있고,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인 ‘에밀리’는 아이가 죽은 후 달리기를 시작한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아이가 죽은 후 에밀리는 달리기를 시작했다.”(55) 어떤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운동을 하는 경우는 주위에도 많이 있다. 또한, 소설 [열일곱, 364일] 같은 작품에서도 누군가의 죽음 이후로 달리기에 매진하는 소녀와 소년이 나온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est Gump, 1994)는 어떤가. 달리기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에서 계속 도망치는 이미지를 주면서도 마침내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달린다는 행위가 갖고 있는 의미와 사실성이 이 소설에서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달리기란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그리고 가끔 멈춰서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스티븐 킹은 이런 인생을 소설 속에 압축해서 그려냈다. 어떤 은유를 자연스럽게 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간직한 여자가 달리기를 하면서 도피 혹은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여기에 살인마를 마주치게 하면서 달리는 것만이 아니라 싸워야 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건 여자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인생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진저브래드 걸]은 이를 현장감 있는 소설로 탁월하게 형상화해낸 작품이다.
 스티븐 킹은 책 뒤편에 ‘선셋노트’라고 각 작품마다 어떻게 발상을 했고 썼는지 일종의 창작노트를 덧붙여놓았다. 이 작품의 경우 플로리다, 멕시코만의 사주 군도 근처에 있는 그곳의 별장들을 보고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텅 빈 해변에서 한 여자가 악당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그리고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언젠가는 멈춰 서서 싸워야 하는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쫓기는 것들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거리를 벌릴 수는 있겠지만, 결국 마주쳐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밀리가 계속 달려서 도망치기를 응원하지만, 진짜 그렇게 된다면 소설은 허무해지고 말 것이다.
 작가는 세세한 묘사에 천착하는 이야기를 선호하는데 이 단편은 그런 묘사들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사실 지나치게 길게 묘사된 장면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생각할 때 이런 묘사는 필수가 아니었나 싶다. 생생한 현장감을 주는 묘사가 많을수록 소설은 박진감이 넘친다. 작가는 1년 대부분을 지낸 플로리다의 경험을 갖고 썼기 때문에 생동감 있는 묘사가 가능했고, 이는 독자들이 소설 속의 현실을 진짜처럼 느끼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해변 풍경의 묘사나 텅 빈 별장의 묘사, 멕시코인의 등장 같은 것은 전부 소설의 핍진성을 높인다. 멕시코인 같이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인물 배치를 가지고 인종차별의 해석 우려 때문에 다른 인물을 넣는다면 상세한 배경 설정이 더 필요할 것이며 소설의 구조를 무너뜨릴 것이다. 게다가 도구로 등장한 인물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전체 구조와 핍진성 등을 생각하지 않고 작품 해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글을 쓴다면 소설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정해진 분량 안에서 작가의 통제 하에 높은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다.

 하비의 꿈
 작가들은 때로는 꿈에서 영감을 얻는다. 스티븐 킹은 이 작품이 꿈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단편 소설의 구조적 완성도를 띄고 있는 것은 아니며, 가볍게 읽을 엽편처럼 느껴진다. 분량도 그만큼 작고 이야기도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 같은 느낌을 가진다. 가끔 우리는 꿈이 예지몽처럼 느껴지기는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 예지몽이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를 그리고 있다. 예지몽 혹은 예언처럼 보이는 상황을 다양한 장치로 암시로써 보여주고 독자에게 서늘한 느낌을 주는데 성공한 소품이다.

 휴게소
 작가에게 필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휴게소는 스티븐 킹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쓴 단편이다. 어느날 휴게소에서 연인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고, 스티븐 킹은 폭력 사태가 일어나면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자신의 필명의 인격을 가지고 나서리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 폭력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때 가진 생각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본 것이다.
 사실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에 이입해서 인격을 바꾸고 싸우는 이야기라면 좀 단순한 발상이고 식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흥미롭게도 작가의 필명을 통해서 용기를 내고 여자를 구하기 위해 개입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필명에 다른 인격이 부여되어 있다는 발상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름, 이름, 이름에 담긴 게 도대체 뭐길래?”(156)라는 부분은 이 소설에서 본명과 필명에 대해서 다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주인공인 존 다이크스트라는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나, 1994년 여름 강의를 포기하고 대신 서스펜스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경험에서 나온 소설인 만큼 스티븐 킹과 유사한 인물인데, 그런 그가 만든 필명이 ‘릭 하딘’이다. 그는 자기 소설 속 인물인 투견으을 소환해내서 끼어들려 했지만, 지금은 현실이고 투견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그런 그가 깨달은 것은 투견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지만 ‘릭 하딘’은 자신의 필명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릭 하딘’으로써 싸움에 나선다. 이런 생각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소설 속 자신이 만든 인물은 허구라는 것을 인식하지만 자신의 필명은 또 다른 자아를 가진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릭 하딘’이라는 작가는 그 현실에서 존재하며 책을 내고 인세를 벌고 유명세를 얻었으며 ‘존 다이크스트라’ 보다는 허영심도 있고 더 용기있고 강인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설정한 그 인물은 또 다른 해리성 자아일 수 있는데, 이는 소설 인물과 달리 현실에 실존한다고 인지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현실에서 필명인 ‘리처드 바크만’이 더 과격하므로 그를 불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필명이 내면의 또 다른 자아로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점은 실제로 필명을 가지고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 스티븐 킹이기에 할 수 있었던 흥미로운 발상으로 보였다.

 헬스 자전거
 헬스 자전거는 여기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꽤나 환상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주인공 리처드 시프키츠는 신체검사를 했고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받는다. 브래디 박사는 왜 살을 빼야 하는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나이가 들수록 신진대사 능력은 떨어질 것이고 지금처럼 먹으면 살이 점점 더 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진대사 과정을 노동자로 비유한다. 주인공인 리처드는 집으로 돌아와서 브래디 박사의 설명에서 비유로 나온 신진대사 노동자를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고 헬스 자전거를 사서 그 그림 앞에서 자전거를 탄다. 신진대사를 노동자로 비유하고 주인공이 그림까지 그리는 장면까지 나오자 당연히 포탈사이트 ‘다음(Daum)’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인 웹툰 [다이어터]를 떠올리게 된다. 웹툰 [다이어터]는 여자 주인공이 살을 빼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중간중간 여자 주인공의 지방과 단백질이 의인화되어서 변화 과정을 우화처럼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이야기와 내부의 이야기가 동일한 재미를 주고 있어서 작품 전체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단편, [헬스 자전거]는 바로 이 신진대사가 의인화된 존재들이 현실과 이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헬스 자전거를 타면서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속으로 빠져들고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며, 나중에는 현실과 뒤섞이기까지 하는데 이런 상상력은 독특한 정서를 갖고 있다. 윤이형의 단편 [큰 늑대 파랑]에서도 주인공들이 마우스로 그린 ‘늑대’가 이후 좀비들이 출몰하자 현실에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허구와 현실이 맞닿음으로써 재미있는 환상을 자아낸다. 여기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환상특급]이나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그들이 남긴 것들
 한국에서 ‘용산 참사’가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미국의 작가들에게는 ‘9․11’이 심각한 영향을 준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스티븐 킹이 자신이 받은 영향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이야기는 ‘9․11’ 사태가 일어나고,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의 죄책감과 상처를 다루고 있다. 작품 제목이 보여주듯이 ‘그들이 남긴 것들’은 주인공에게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 갑자기 나타나는 초현실적인 현상을 그린다. 환상적인 장치로 주인공이 어떤 상처를 갖고 있는지 작가는 다루고 있다. 단편에서는 ‘9․11’ 사태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편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단편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의 내면의 풍경 정도일 것이다. 이 작품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단편이라는 장르 안에서 ‘9․11’ 사태를 환상적인 도구로 다루고 있다. 평론가들은 작가에게 때로 과제를 부여하거나, 자신의 욕심을 투영하기도 하지만, 작가에게는 어떤 소재를 써야한다든가, 특정한 소재나 구조, 전개 방식, 이데올로기를 써야할 어떤 의무도 없다. 작가들은 단지 자신이 다루고 싶은 것을 다룰 수 있는 역량으로 장르에 맞게 쓸 뿐이다.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하려고 했고, 이 작품은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소설을 인간을 그리는 것이고, 스티븐 킹은 큰 사건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상처투성이다. 소설가는 그 상처를 치료할 수도 없고, 나을 방법을 제시할 수도 없다.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졸업식 오후
 작가가 [하비의 꿈]과 마찬가지로 소설이라기보다 꿈을 적은 구술에 가깝다고 말하는 짧은 글이다. 역시 단편이라기보다는 엽편처럼 느껴지는 글이다. 이미지가 주요한 소설인데, 한 젊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일상에 갑작스런 대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묘사했다. 평범한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계속 묘사되다가 갑작스런 멸망의 이미지의 대비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스티븐 킹은 항우울제 약을 끊으면서 나타나는 패닝샷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쓰는 동안에는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사용된 이미지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영화에서 본 이미지들이 먼저 떠올라서 아쉬운 글이었다.

 N.
 [진저브래드 걸]과 [아주 비좁은 곳]과 비등한 이 소설집에서 긴 분량을 차지하는 글이다. 긴 분량 만큼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편지글과 진료 기록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기이한 사건에 대한 위화감을 덜어주고 기록이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가 있을 법한 사건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런 장치가 필요할 만큼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는 환상성이 강하다. 정신분석학의 강박증과 다른 우주의 존재라는 공포를 결합한 소설로 누구나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킬 단편이다. 스티븐 킹이 쓴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의 팬픽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러브크래프트에게 보내는 오마쥬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숫자 세기에 대한 강박증과 이 세상을 금방이라도 짓눌러버릴 것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를 세세한 서술로 풀어놓는다. 인간은 누구나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그 강박증이 심화되어 정신을 붕괴시킨다. 그것이 세상의 멸망과 연결되어 있다면? 자칫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면서 다층적인 구성 방식이 진부한 감이 있기 때문에 전개나 결말의 예측이 쉽기 때문이다. 즉, 독자는 예견감이 드는 작품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물론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스티븐 킹의 필력이 자아내는 묘사와 분위기를 감상하는 맛이 있는 글이기도 하다.

 지옥에서 온 고양이
 이 작품집에 실린 글들 중 가장 오래 전에 쓰인 단편이다. 그만큼 다른 단편들과 달리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데, 새로운 요소가 적고 이야기가 단순한 면이 있다. 드로건이라는 노인은 한 고양이를 죽이기 위해서 주인공을 고용한다. 살인청부업자에게 고양이를 죽이라니? 황당한 시작이지만,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드로건의 말로 밝혀진다. 이미 세 명을 죽게 만든 고양이인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떤 공포감을 느끼게 만든 글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위트를 섞은 느낌이다. 도입부부터 킬러에게 고양이 암살을 맡기는 상황부터가 블랙 코미디처럼 다가오고, 위험한 고양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안이하게 있다가 고양이와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게 되는 킬러의 모습도 진지하게 읽히기보다는 황당한 느낌을 받는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느낌을 그대로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그러면서도 잔인하게 그려낸 소품.

 《뉴욕 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읽은 주인공. 그런데 죽은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한없이 슬프고 낭만적인 이야기를 적절한 장난스런 대화와 따스한 감성으로 쓴 작품이다. 단순히 죽은 남편에게 사후에 전화가 왔다는 것만으로 작품을 이끌어갔다면 심심했겠지만, 남편은 사후세계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훗날 일어날 사건에 대한 암시를 한다. 이것은 이 전화가 여자의 환각이 아니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증거도 된다. 주인공과 독자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에 안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안도감은 다시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들어 이야기가 더 와닿게 만든다. 진부할 수 있는 사후세계를 다루었지만 무난하게 잘 전개해나간 단편이었다.

 벙어리
 한 사내가 성당의 고해부스에서 죄를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자는 고해부스에 있는 신부처럼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주인공은 길거리에서 벙어리를 태워준다. 그리고 벙어리에게 자기 아내의 불륜과 횡령을 토로한다. 그런데 벙어리는 휴게소에서 사라지고 아내를 죽인다. 주인공은 고해부스에게 이야기를 하듯, 벙어리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이중적인 구성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렇다면 벙어리는 고해부스 속 신부이면서 또는 그 너머에 있는 신을 은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벙어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고해부스에서 신부에게 이야기를 했다면, 신은 과연 그를 불쌍히 여겨서 아내를 죽게 만들었을까? 그게 옳은가? 인간의 윤리와 신의 윤리는 어떻게 다른가? 인간의 의도가 신의 의지를 좌우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벙어리가 마치 신의 사자처럼, 혹은 소원을 접수한 악마처럼 주인공이 갖고 있던 고민을 해결해준다.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는,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는 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신이 실제로 인간사에 개입해서 기도나 고해에 응답하거나, 혹은 살해로 일을 해결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벙어리는 마치 주인공이 바라는 것을 성취시켰다는 점에서 외부의 악마 혹은 내면의 악을 연상시킨다. 흔한 해석으로는 주인공의 내면의 악의 실체화 같다. 주인공은 신부의 질문처럼 벙어리이지만 귀머거리는 아니다, 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신부는 “당신을 속였다고? 귀머거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얘기한 건 아니었소? 내가 보기엔 그게 핵심인 것 같은데?”(437)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 소설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핵심은 단순히 우연히 태운 벙어리가 사실은 귀머거리는 아니라는 반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 살인을 저질러 줬으면 하는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는 데 있다. 주인공은 누군가 대신해 아내를 벌해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신이든 악마든, 지나가는 히치하이커든 상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하기는 싫지만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도 살인이라는 중죄를 대신 해주기를 마음 속으로만 바라는 마음.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아뇨, 신부님.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친구를 내 차에 태우셨을 가능성도 있나요?”(439)라고 묻는다. 여기에 신부의 속내와 대답은 갈린다. “사제는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실제로 나온 대답은 달랐다.”(439)라는 진술은 사제가 내면에는 주인공의 은밀한 욕망에 공감함을 보여주나,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인간적인 대답이 아니라 딱딱하고 인간이 따르기 힘들며 인간이 성취해야 하는 신학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은 악에게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흔히 신자들이 기도를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고 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기를 바라며 우연성이 아닌 신의 의도대로(혹은 자기 의도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한 문제를 훑는 글이다. ‘벙어리’는 주인공의 은밀한 욕망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바라는 신의 형상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직접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 말(기도)을 귀담아 듣고 소원을 성취해주는 숨은 신.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벙어리’가 앞으로도 영원히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야나
 키스로 병을 치료하는 기적을 소재로 한 단편인데, 서사는 특별할 게 없고 회고조로 기적을 그리는 단편이다. 잔잔하고 따뜻한 글로 크게 인상에 남지는 않았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야나라는 흑인 소녀의 키스를 받고 병이 치유된다. 그런데 주인공은 키스를 받지 않았는데도 이후에 마찬가지로 키스로 남을 치료하는 사람이 된다. 이 글은 스티븐 킹이 사고를 겪고 난 뒤에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지, 기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쓰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기적을 해부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기적이란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적이니까. 기적의 불가해한 면을 다루면서도 이 소설의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 그건 우리 삶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이고, 작가는 그러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뜻한 글이다. 그만큼 무난하고 달리 할 말이 없는 글이기도 하다.

 아주 비좁은 곳
 이 소설집에 실린 마지막 단편은 [아주 비좁은 곳]이라는 제목으로 간이 화장실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한 남자를 다뤘다. 앞의 [아야나]가 따스하고 밝은 느낌의 글이라면, 이 작품은 아주 잔혹하고 어두운 글이다. 특히, 간이 화장실에 갇힌 남자를 다루기 때문에 똥통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글로 엄청나게 더러운 글이다. 이런 더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독자라면 읽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기 때문에 어차피 글자로 묘사된 더러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구성이 탄탄하고 전개가 안정적인 단편이다. 더러워서 읽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묘사도 디테일이 살아있고 집요하다. 아주 비좁은 간이 화장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진저브래드 걸]에서 주인공이 살인마에게 쫓기는 것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달리기로 회피하다가 살인마를 만나고 맞서 싸우게 되며 극복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아주 비좁은 곳]은 화장실에서의 탈출이 17년간 친구로 지내온 개, 벳시를 잃은 것에 대한 극복과 복수의 과정 자체다. 내면의 감정과 동기를 주인공의 상황으로 형상화하고 서사의 힘을 불어넣는 거장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된 글이다. 그러나 역시 다 읽고 나서도 더러운 묘사에 질리기도 한다. 작가 자신도 쓰면서 약하게 토악질을 했다지 않은가. 좀 과잉되었다는 느낌이고, 묘사 실력을 뽐내는 듯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치밀하고 집요한 더러운 묘사로 쓰인 작품 하나쯤은 있을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어떤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전개와 묘사를 볼 수 있을까? 스티븐 킹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경지의 글이기도 할 것이다.



 리뷰를 마치며

 열 세편의 단편이 실려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글이 길어졌다. 그렇지만 그만큼 다양한 색깔의 스티븐 킹의 단편들을 읽고 회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스티븐 킹의 독특한 개성 넘치는 단편을 읽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그만큼 그가 앞으로도 계속 장편 만이 아닌 단편을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흔히 단편보다 장편이 재미있고, 더 많이 팔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단편은 단편 나름대로의 미학과 재미를 가지고 있다. 서문을 읽으면서 스티븐 킹이 이 단편집을 통해 다시 단편 쓰기의 감을 되찾고 즐겁게 써내려갔다는 사실이 독자의 입장에서도 반갑고 즐거웠다.
 이 단편집은 예전과 달리 현실과 밀착된 단편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문체도 묘사가 늘어나고 내면 심리를 치열하게 드러낸다. 그 동안 작가의 신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목숨을 잃을 뻔한 교통 사고와 9․11 사태 등등) 이런 변화하는 점들을 보는 것도 독자들에게는 또다른 재미이기도 하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분량에 따라 소재에 따라 개인적 취향에 따라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단편이 갈릴 수밖에 없다. 단편집은 대게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권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한다는 것 자체가 단편집의 매력이며, 그것이 스티븐 킹의 이야기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구입해서 읽을 가치가 있다. 스티븐 킹 같은 대중소설가가 있기에 우리는 책을 읽으며 이야기에 몰입하는 경험을 아직도 지속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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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신진우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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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미디어의 중간문학 브랜드, 새파란상상의 네 번째 출간작 『게이트』. 이 작품은 어느 날, 아파트 10층에서 여자가 실종되면서 시작된다. 다음 날, 아파트 10층에 살거나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린다. 그러나 그들이 내린 곳은 더 이상 그들이 아는 아파트 10층의 공간이 아니다. 자욱한 안개 속이 갇힌 아파트 10층에서 그들은 아래층으로도 위층으로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아파트 10층에는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 말고는 더 이상의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 설정은 마치 스티븐 킹의 중편 「미스트」나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연상케 한다. 부득이하게 한 공간에 갇힌 사람들이 불가사의한 현상들과 부딪치게 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여기서 초자연적인 일 말고도, 인간 본연의 광기과 맞물리면서 흥미로운 체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 여고생 김정희, 여고생 정희의 엄마, 23살 복학준비 중인 이민호, 22살 여자인 김수정, 18살 중국집 배달원인 용식이, 윤재준 신문기자, 장인환 형사, 중년 남자, 경비원 등이 바로 10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고, 사람이 없고 안개에 휩싸인 이상한 공간에 도착한 이들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들이, 기이한 상황과 맞닥뜨리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지지직’ 거리는 효과음은 불길한 상황을 암시하며, 이들의 변화를 이끈다.

  아무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도 10층에서 열리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도 포탈이 연결된 것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 극한적인 상황 설정은 일단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독자는 이후 작가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갈 것인지, 또 결국 어떤 결말로 치닫을 것인지 궁금해한다. 이 소설이 가진 미덕은 바로 이런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상황 설정과 여기에 처한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결국 불가사의한 사건과 맞닥뜨린 인물들을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얼마나 개성있는 인물들을 그려냈고, 또 생동감있게 묘사했는지가 관건이 된다. 아쉽게도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렇게 살아있는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두 다 똑같이 느껴진다거나 지나치게 도구적이고 인형처럼 보인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소설에 나올만한 전형적인 인물들이고, 조금 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나, 실제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작가가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서 배경과 성격, 역할, 능력 등에 대핸 설정을 짰고 거기에 충실히 움직이는 캐릭터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들이나 행동이 의외성이 없고 이미 영화나 소설, 만화 등에서 나올법한 인물들이 각각 맡겨진 행동들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금 더 색다른 인물들을 설정했다면, 다른 배경, 다른 성격, 다른 능력을 만들어냈다면, 그런 비틀림으로 인해 약간 전형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이 이야기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완벽하게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능력들은 이미 기존에 있던 능력들이라 특별할 것이 없고, 인물들의 성격도 평범한 편이다. 물론, 여고생처럼 눈에 띄는 독특한 설정이나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의미나 역할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제대로 된 설명이나 활용도도 떨어졌다. 다른 인물들에게 발현되는 능력들도 그 인물들의 사연과 사정에 맞춰서 나타나면 능력이 역시 여고생처럼 개성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식으로 캐릭터의 성격과 이야기가 뻗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꼭 광기를 드러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원래 악한이었다던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든가 하는 식은 너무 안일한 설정이라는 느낌도 들었다.(실제 경비원이 읽는다면 이 작품을 좋게 읽을 수 있을까? 일반적인 편견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조금은 불편한 감도 있다. 인물들이 너무 기호적인 느낌이었다. 처음 수정의 묘사부터 행동이나 대사도 가볍게 그려져 불편하다가 나중에는 성격이 뒤바뀐 것처럼 캐릭터도 바뀌어버린다.) 전형적이라고 할까. 많은 작가들이 써먹은 일종의 클리셰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인물들에게 조금 더 깊이를 부여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일단 지금 같은 분량은 불가능할 것이고, 속도감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캐릭터에 짧은 심리묘사만으로는 이 작품을 지나치게 가볍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는 개개인의 심리묘사에 좀더 치중하고, 『로스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인물의 과거 배경이나 트라우마 등과 연결해서 현재 사건을 바라보고, 연계되는 점이 있다면 소설이 더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풍성해질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물이 진짜 살아있는 느낌을 줄 수 있었을 것이고, 예측한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의외의 방향으로 계속 달려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장점은 눈부신 속도감이다. 그야말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다른 책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다.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 만에 금세 다 읽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가독성이 높다고 할까. 쉬어가는 타임이 없이, 무조건 전개만을 외치고 달리는 소설 같다. 그 때문에 정신없이 끝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이런 빠른 속도감은 빠르게 읽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에게는 잘 와닿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독성 높은 장르소설을 찾는다면 『게이트』는 충분히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수많은 장르소설들이 끊임없이 지금도 출간되고 있지만, 이토록 잘 읽히는 책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이 소설은 깔끔한 문장, 적절한 문단 길이, 영상적으로 연상이 잘 되게 장면 묘사, 군더더기 없는 스트레이트한 전개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 소설의 강점은 바로 이 속도감이다.

  다만, 이 속도감을 얻으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물들이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단점을 지닌다. 게다가 지나친 전개의 폐해로 인해 작품에서 어색한 부분들이 속출한다. 독자가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이입을 할 새도 없어 인물들의 심경 변화가 잘 와닿지 않는 면들이 있고, 몇몇 장면들은 전개를 위해 빨리 넘어가면서 어색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자기소개를 하다가 갑자기 철가방 랩퍼라면서 용식이 랩을 하면서 분위기가 밝아지는 부분은, 너무 급작스러워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고 독자가 어색함과 민망함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좀 더 많은 분량이 사용되어서 서로를 알아가고 생각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 천천히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전환되었다면 그런 민망한 느낌이 들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빠른 전개를 위해 과도한 생략이 단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분량이 더 늘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설정은 기존의 오컬트 설정과 불가사의하고 밝혀지지 않는 설정이 혼재되어 있다. 오컬트에서 쓰이는 설정들은 주석 등으로도 설명이 붙는데, 색다른 것이나 기묘한 것은 없는 편이다. 이미 기존에 오컬트 소설들, 만화, 게임 등에서 다룬 내용들이라 새로 알게 되는 것이나, 독특한 발상은 볼 수 없다. 이 기묘한 공간에서 인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초능력을 발현하게 되는데, 일반적인 능력들이 주를 이루고 능력들을 조합하거나 독특하게 이용해서 독자의 허를 찌르는 면은 적어서 아쉬웠다. 즉, 오컬트 설정에서 신선하고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적은 편이었다. 불가해한 설정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명확히 밝혀지는 부분은 없다. 공포를 자아내기 위해서는 미지의 상태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도 마땅하지만 어느 정도 암시를 해줄 수 있는 부분, 변화를 일으키거나 저항의 여지를 줄 수 있는 것도 필요한 느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 머문다는 미지의 공포를 비롯해서, 악령을 연상시키는 존재, 그로 인한 고어적인 장면들은 각각 공포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글로 고어적인 장면을 서술한다고 해서 그 공포가 제대로 와닿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상황을 통해서 연출이 되었다면 더욱 공포를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쉬운 작업은 아니다. 글로 공포를 전달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지금까지 나온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를 봐도 알 수 있다.) 몇몇 고어적인 장면은 그냥 일반적인 영화에서 보던 이미지를 차용한 느낌이라 아쉬운 감이 있었다. 공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독자가 체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공포, 그리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런 손에 잡힐 듯한 묘사에서는 아쉬운 면이 컸다. 빠른 전개를 위해 묘사는 짧게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각각의 상황에 대해 새로운 표현, 단어들로 독자를 환기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가령, 피와 살점이 방에 난자한 장면에서 단순히 그 장면을 묘사하고, 반복적으로 ‘지옥’이라는 단어로 처참한 상황을 표현하려고 하는 부분에서는 같은 단어가 반복되면서 지겨운 느낌이 들었다. 지옥이란 단어의 진부함이나 단순함은 제쳐두고, 한 번 사용한 단어를 다시 재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방식일 수밖에 없다. 결국 처음에 와닿은 느낌은 단어가 반복되면서 희석되고, 단어로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각각의 상황마다 다른 단어와 표현으로 매번 더 처절한 공포를 표현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작품은 다른 작가의 단편에서 시작되어 장편으로 발전한 작품인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단편의 아이디어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무난하게 잘 소화했다고 할 수 있다. 장편인 이상 스트레이트한 전개 말고 플롯에 좀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 공간이나 적, 여러 현상들이 명확하게 이 작품 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책에 쓰인 방식이 최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를 배경으로 불가사의한 상황과 빠른 속도감에서 김이환의 『절망의 구』(예담)가 떠올리는 면도 있다. 두 작품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상당하고, 불가사의한 현상에 끌려다니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게이트』는 빠른 속도감의 장르소설을 원하는 독자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다른 매체나 소설에서 비슷한 경향의 작품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국내 작가가 이런 형식과 분위기의 소설을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다양한 성향의 작품들이 더욱 더 많이 여러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기를 바라고 있다. 상당히 많은 한국 작가들이 천편일률적인 소재의 작품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런 희귀한 소재의 장르소설이 나왔을 때, 이 소설을 더욱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더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테고, 좋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정신없이 질주하는 『게이트』의 끝이 과연 어떤 식으로 끝날지 궁금하여, 책을 받자마자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읽어내려갔다. 마침내 끝을 다 읽고는 괜찮은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후속권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이라서, 2부가 나온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책을 접하자마자 순식간에 읽어내려간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하고 싶은 독자라면 지금 당장 구매를 할 것을 추천한다. 후속권이 나온다면 이 책은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이 공간을 외부에서 관측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미 이 공간을 거치고 나서 현실로 돌아온 다른 이들이 있다면? 그런 무리에 접촉할 것인가? 달아날 것인가? 현실에 무수한 이런 공간이 또 있을까? 이능을 가진 인물들 중 일부는 이 공간을 지나친 것일까? 이 공간에서 보았던 불가사의한 존재들이 현실에도 나타날까? 모든 것을 없앨 수 있을까?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은폐할 것인가? 은폐하는 세력이 있을까? 다시 그 공간에 들어서게 될까? 누군가를 찾게 될까? 작품 내에서 밝혀지지 않은 현상들과 설정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후속권에 대한 상상은 끝도 없이 사방으로 뻗쳐나간다.

  책의 판형이나 표지 이미지, 깔끔한 편집 등도 마음에 들었다. 작가가 상당히 신경을 쓴 것을 알 수 있는 점은 각 장마다 시작할 때 나오는 인용구인데, 적절한 내용이 들어가 있어서 글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잘 살리는 느낌이었다.

  올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시원한 독서 경험을 줄 수 있다. 폐쇄된 공간에서 열 명의 사람들과 한 마리의 고양이를 가지고 이토록 급박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작가의 역량이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믿기지 않게 만든다. 재미있는, 기존 한국 장르소설과는 다른, 기대되는 이야기와 작가를 읽고 싶다면, 『게이트』를 추천한다. 누군가에게 선물해도 부담없을 만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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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4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4
이종호 외 지음 / 황금가지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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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




  이번에 황금가지에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가 출간되었습니다. 척박한 한국 공포 문학 장르에서 이렇게 단편집이 4권까지 나왔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또한, 매 권마다 작품의 퀄리티가 발전되었다는 소리를 들은만큼 이번 4권이 아주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 기대를 배신했는지, 뛰어넘었는지 이제 한 편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출근 | 장은호




  무크지 『파우스트』제5호, 2008년 봄호에 실렸던 단편입니다. 그때 읽고 『파우스트』 5호에 실린 한국 작가의 단편 중에서 가장 재미있다고 느낀 단편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회사에 첫 출근을 합니다. 배경은 근미래로 생각되는 한국입니다. 남자의 첫 출근은 기묘합니다. 넓은 사무실에 많은 사람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상상했으나, 두 평 남짓한 좁은 방에 철제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전화기 하나, 메모지 하나, 볼펜 하나만 있습니다. 기묘한 이야기. 네, 이 단편은 마치 일본 영화인 기묘한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주인공은 전화를 받고 전화에 나오는 지령대로만 수행하면 되는 업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전화 통화 내용이 이상합니다. 첫 통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K34234죠? 9시 5분에 89누르고 485에 3535 누르세요. 그리고 ‘당신의 아들은 종로역 4번 출구 앞 건물 안에 있다.’라고 말해주세요.”




  ―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황금가지, 14쪽




  지령을 수행할 수록 점점 이상한 내용들이 오갑니다. 전체적인 그림을 쉽게 그리기는 어렵지만,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길 수록 이 회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인공은 어떻게 처신할까요? 전화 지시만으로 인간의 모든 선택권을 앗아가버리는 이야기가 섬뜩함을 주기도 하고, 전화 지시의 내용을 유추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시스템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건 비단 소설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역시 보이지 않는 이런 시스템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거죠. 영화 『이글 아이』가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전화만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놀라운 일을 벌이는 것이 비슷하지요. 국내 개봉보다는 소설을 먼저 읽었습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고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신기했었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이고 다 읽고 나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단편이었습니다.




  ■ 도둑놈의갈고리 | 김종일




  제3회 황금드래곤문학상에서 『몸』으로 대상을 수상한 작가의 단편입니다. 이 단편은 포탈사이트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공개되어 사흘간 150만 페이지뷰를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이 문구가 책 띠지에 적혀 있죠.(그 전 기록은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단편 「에소릴의 드래곤」으로 130만 페이지뷰를 기록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소설 속의 주요 상징으로 나오는 ‘고디바’ 이미지에 힘입은 바가 크겠습니다만, 이 단편은 그런 조회수가 의아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흡인력을 보여주는 소설이었습니다. 1인칭 화자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쓰인 문체는 최근 한국 작가의 SF단편들에서 많이 쓰였는데, 이 단편에서도 그런 문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말하는 방식은 사실 쓰는 사람도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게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독자도 낯선 방식이라 거부감을 느끼기 쉽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은 그다지 어색하거나 지루한 부분 없이 능숙하게 독자를 끌고 갑니다. 이런 문체로 흡인력 있게 전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할 만큼 흡인력을 가진 단편이라 좋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디바’와 ‘도둑놈의갈고리’ 그리고 그것을 인터넷 ‘마녀사냥’으로까지 결합시킨 작품의 구조가 인상적인 글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이 탄탄한 글이라고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소재도 정말 좋았는데 요즘 인터넷이 발달된 세상에서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마녀사냥’입니다. 경범죄나 혹은 죄없는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가는 인터넷 마녀 사냥은 큰 문제점이고 당사자에게는 죽음보다 더 한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자살자를 만들어내기도 한 사회문제입니다. 이런 소재로 독자가 흥미를 느끼고 재미까지 느낄 수 있게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그점에 성공했고, 따라서 이런 마녀사냥에 대한 문제의식과 공포를 함께 느끼면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 플루토의 후예 | 이종호




  중편 「므이」와 장편 『흉가』, 『분신사바』, 『이프』, 『귀신전』 등을 쓴 한국을 대표하는 공포 작가 중 한 명인 이종호 작가의 단편입니다. 플루토의 후예는 고전적인 소재를 다룬 공포소설입니다. 앞서 장은호의 「첫출근」이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이었고, 김종일의 「도둑놈의갈고리」가 현재를 배경으로 한 인터넷을 소재로 쓴 공포소설이었다면, 이 단편은 마치 과거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 고양이와 흉가 등을 소재로 쓴 단편입니다. 하지만 아주 낡은 느낌이라기보다는 매끄럽게 잘 쓰인 글이라 오히려 현대적 감각으로 또 능숙한 솜씨로 잘 옮긴 느낌이었습니다. 약간은 패턴화된 이야기를 적절히 변주했고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은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소재를 가지고 읽을 때는 마냥 소설 속 내용에 몰입해서 공포감을 느끼게 합니다. 마지막까지 서늘한 여운을 남기는 완성도 높은 단편이었습니다.




  ■ 폭주 | 황태환




  이 단편집에서 가장 젊은 작가의 단편입니다. 그만큼 소재나 내용 역시 젊고 패기에 찬 느낌입니다. 소재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데 바로 운석군이 지구에 떨어져서 곧 종말을 맞게 되는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고 그 사이에 한 청소년 무리가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세기말적인 공포랄까. 지구는 곧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고 눈앞에는 실제로 피가 튀고 사람이 픽픽 죽어나가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엄청난 흡인력을 주고 이야기에 빨려들게 만듭니다. 소재나 상황이 긴박하고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워낙 개성이 강한 소재라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공포보다는 블랙 코미디를 읽는 느낌이 강하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작품에서 박력이 느껴지고 몰입도가 역시 높습니다.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고 강렬한 살해 장면들이 많아서인지 유독 인상에 깊게 남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 불귀(不歸) | 우명희




  이 작품은 제목부터 유의해서 봐야 합니다. ‘불귀’라는 단어는 명사로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오지 아니함. 또는 돌아가지 아니함.’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 단편은 이 두 가지 의미가 같이 사용되는 단편입니다. 이 단편 역시 바로 앞에 황태환 작가의 재기넘치고 파격적인 「폭주」와는 달리 조금 전통적인 공포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일단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는 배경과 귀신이 나온다는 점에서 공포소설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단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야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단편은 이 단편집에서 가장 호흡이 느린 글이기도 한데, 소설 분위기와는 잘 맞아떨어집니다. 배경도 소재와 걸맞게 1989년도이지요. 자신을 끔찍이 반대했던 시어머니가 곧 돌아갈 예정. 며느리인 주인공은 딸 솔이를 데리고 시골로 가서 시어머니를 며칠 간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여전히 역정이 심하고, 또 기력이 쇠한 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고 끊임없이 며느리를 괴롭힙니다. 그 과정이, 또한 과거가 교차되면서 지긋지긋한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솔이는 집에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고 말하면서 음산한 분위기 속에 답답하고 절망적인 공포가 드러납니다.




  ■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 | 유선형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정말 다양한 색깔을 지닌 작품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귀신이나 고양이가 나오는 공포 단편부터 SF적인 분위기를 띠는 공포소설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했습니다. 이 단편 역시 색다른 소재와 분위기를 가진 단편입니다. 한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갑니다. 주인공은 집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다혈질의 남자입니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신을 잃게 되고, 침대가 있는 한칸 짜리 옷장과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작은 욕실이 전부인 좁은 방에서 깨어납니다. 남자는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곧 남자는 밖으로 나가게 되고 흰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게 됩니다. 남자가 있는 곳은 도축장입니다. 남자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도축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이 도축장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남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낯선 세계를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신기한 눈초리로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실이 기묘한 이야기처럼 펼쳐집니다.




  ■ 더블 | 최민호




  더블이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소설은 흔히 장르소설을 읽다보면 쉽게 접하는  소재인 ‘도플갱어’와 유사한 설정을 다룬 단편입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도플갱어’의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공포를 주기도 합니다. 지금껏 도플갱어는 수많은 소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소재 자체는 낡고 진부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이 소설은 용어도 ‘더블’로 바꾼 만큼 조금 참신하게 소재를 다듬었고, 따라서 독자가 몰입하게 됩니다. 흔히 알고 있는 설정보다 더 세세한 묘사로 사실감을 띠면서 소설에 감정이입이 잘 되는 소설입니다. 주인공의 심정을 따라가며 같이 어떻게 될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더블에 대한 증으를 느끼기도 합니다. 적절한 구성이 돋보이고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실천하듯 깔끔하게 잘 쓴 글이었습니다.




  ■ 배심원 | 김유라




  이 단편은 제3회 황금드래곤 문학상에서 「스너프 살인」으로 중편 부문을 수상하고, 판타지 소설 『다크스톤』, 『자하드』 등을 출간한 작가가 쓴 글입니다. 이 작품 역시 앞에 김종일의 「도둑놈의갈고리」처럼 인터넷을 주요 소재로 선택한 소설입니다. 차이점은 좀더 인터넷에 주안점을 두었고, 주인공이 성인 여성이 아니라 십대 소녀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이 가진 파급력 때문에 피해를 보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는 점은 같습니다. 역시 인터넷 ‘마녀사냥’의 문제점을 파헤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인터넷을 많이 하고, 이런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 마음에 들고 그만큼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소녀가 처한 상황이 저 역시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서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인간의 추악함.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했는지, 이 소설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평소에는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피해자들에 대해서 상상해보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요. 이런 게 또 소설만이 갖고 있는 매력적인 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 | 권정은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는 공포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장르인 좀비를 소재로 한 단편입니다. 사실 좀비라는 소재는 워낙 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색다르게 쓰기가 어려운 장르입니다. 대부분 그게 그거라는 느낌을 받기 쉽지요. 이 소설 역시 좀비라는 소재를 다룸으로써 소재의 진부함에서는 단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는 먼저 한국 작가가 쓴 한국을 배경으로 한 좀비소설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껏 외국 소설이나 영화와는 차별화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점이 다른 느낌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장점은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가족’이라는 주요 인물들이 잘 형상화되고 갈등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라 매일 살던 ‘집’ 안에 갇히게 되고 또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오직 ‘가족’만이 존재하는 설정의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주는 요소입니다. 좀비로 인한 절망적이고 처절한 상황을 잘 형상화 했고, 캐릭터들의 감정이 잘 그려지고 그 상황에 실제 빠진 것처럼 몰입되는 글이었습니다. 읽는 사람 역시 그 상황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를 생각해 보게 만들고 소설 속 인물과 같은 절망을 체험하게 되는 소설입니다. 무리없이 제한된 소재 안에서 무난하게 쓰여진 단편이었습니다.




  ■ 배수관은 알고 있다 | 전건우




  어느 단편집이든 독자가 받을 감상을 잘 생각해서 배치를 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 점은 편집자의 역량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면에서 「배수관은 알고 있다」는 충분히 맨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근사한 공포소설이었습니다. 진부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파격적이지도 않은 소재에 긴장감 있는 전개와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독자를 몰입시키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 흡인력이 있을뿐더러 독자를 끌고 가는 솜씨도 좋았습니다. ‘기러기 아빠’라는 소재는 요근래 영화나 소설에서 곧잘 쓰이기 시작한 소재인데, 공포소설로써 ‘배수관’, ‘살인’, ‘이웃’ 등의 키워드와 잘 조화된 느낌이었습니다. 배수관을 타고 윗집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고 읽었으며, 배수관에 소리가 고인다는 설정은 무척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소설의 핵심 요소로 잘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겼고 음울한 이야기가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게 펼쳐졌습니다.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느낌과 서늘한 공포가 잘 배합된 구성이 뛰어난 글이라 마지막 작품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한국 공포 문학의 미래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는 예전에 읽었던 1, 2편에 비해 확실히 발전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단 퀄리티가 들쑥날쑥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컸습니다. 개인의 취향을 고려한다고 해도 예전 단편선은 비슷한 소재들이 지나치게 많이 중복되어 있었고, 때로는 지루하고 어떤 측면에서도 공포감을 느낄 수 없는 단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몇몇 단편들 때문에 전체적인 단편선이 주는 느낌은 매우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재가 다양화 되고 그로 인해 여러 측면의 공포를 다루면서 읽는 재미 역시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공포소설의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기발하고 파격적인 소재는 참신한 느낌을 주면서 특히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뻔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가끔씩 서늘한 공포감도 전해주면서,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기묘한 이야기, 절망스러운 이야기들이 섞이면서 기본 이상의 필력으로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즉, 소재부터 구성이나 문체 등이 모두 퀄리티가 일정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단편집이 나온다면 앞으로 나올 다음 단편집들도 기대될 뿐만 아니라 이 작가들이 펼쳐보일 장편소설도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직 한국 공포 문학을 접하지 않은 분이라면, 이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로 시작하셔도 좋을 겁니다. 기대할 만한 멋진 작가들을 두루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 권들을 통해 약간의 실망을 했던 독자라도 이번 권으로 인해 재미있는 단편들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단편집의 특성상 모든 단편이 한 사람에게 다 재미있을 수 없을 테고 때로는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번 단편집은 개인적으로 주저없이 장르소설을 잘 안 읽는 일반 독자들에게 권해도 대부분 재미있게 읽으리라고 자신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공포 문학의 미래는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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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블 Nobless Club 6
노현진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데스노블


  노블레스 클럽에서 나온 『데스노블』은 공포소설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은 읽으면서 어디 얼마나 날 무섭게 하는지 두고 보자, 라는 식으로 기를 쓰고 읽는 분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면 역시 책의 재미를 잘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 뿐이 아니라 공포영화나 다른 장르의 영화도 기대를 하고 도전하는 식으로 읽으면 그 본연의 재미를 느끼기 힘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공포라는 장르를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무서움을 주는 계열의 소설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물론 공포를 주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전체적인 느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제목을 비롯한 소설의 소재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처음에 인터넷에 연재되는 소설을 읽게 되는데 이 소설의 제목이 ‘데스노블’입니다. 주인공이 읽는 것을 독자 역시 소설 본문에 포함되어 같이 읽게 되고 한 편으로는 이 책 또한 하나의 ‘데스노블’이 됩니다. 이 점을 더 작품이 파고들면 훨씬 무서운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초반에만 ‘선작’이라는 표현 등으로 현실감을 주고 이후에는 그런 요소가 적은 듯해서 아쉬웠습니다. 이 소설의 장점은 어떻게 보면 인터넷 연재물에서 오는 공포라는 신선한 소재에서 오는데, 소설이 곧 현실이 되는 공포는 소설 속 주인공만이 급격하게 체감하고 독자도 역시 같은 ‘데스노블’을 읽으면서도 독자 주위의 현실에까지 그 공포를 전달하지 못한 감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안에 또다시 연재물이 포함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산만합니다. 워낙 여러 인물들이 나오고, 그에 따라 시점이 수시로 바뀌면서 독자가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기가 잘 되어 있어서 문장을 읽는 데 무리가 없고 비문이 없이 깔끔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흡인력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444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문장의 호흡이 좋았다는 소리일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는 공포는 전형적인 ‘귀신’에 의한 공포들이 주를 이룹니다.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주는 두려움과 고어적인 묘사들에서 나오는 불쾌감들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간간히 무섭다고 느낄 만한 장면들이 있고 불쾌하기 짝이 없고 섬뜩한 장면들도 꽤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지나치게 소설 전체가 반복되는 문장과 어휘가 많고 따라서 소설 전체적으로 반복에서 오는 따분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묘사 역시 아쉬운 부분인데 매번 새로운 강렬한 장면과 표현이 아니라 한 번 나왔던 것을 반복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걸렸던 부분 중 하나는 주인공 ‘재원’이 공포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싸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주인공의 공포를 전달할 수 있었겠지만, 이후에 여러 차례 나오면서 식상하고 공포 전달에도 무감각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 정도로 무섭구나’ 라는 감탄이 아니라, ‘뭐야 이 자식 또야?’ 라는 느낌이 강합니다.(게다가 나중에는 텀이 길지도 않아서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합니다.) 고어적인 장면도 처음에는 끔찍해, 라는 느낌이지만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죠. 작가가 좀 더 반복의 수위 조절을 하고, 매번 새롭고 강렬한 표현을 찾아 사용했다면 글이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물론 악령의 주문 같은 경우는 반복되어야 하지만, 역시 횟수의 문제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도 지나치게 자주 등장하여 나중에는 좋지 않게 작용합니다.)

  캐릭터들은 제법 개성이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캐릭터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특히 어느 소설이나 주인공이 가장 중요한데 ‘재원’이라는 캐릭터는 그저 사건이 흘러가는 대로 끌려 다니는 수동적인 인물에 불과하고 오히려 다른 캐릭터들보다 개성도 없고 활약도 없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가 겪는 공포도 다른 캐릭터들보다 약하고 오히려 소설의 매력을 갉아먹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주인공이 사건에 휩쓸리기만 할 뿐, 어떤 절박함이나 목표 의식이 현저하게 없기 때문에 글의 긴장감이 없고 글이 중심을 잡지 못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석 같은 캐릭터는 시한부라는 설정에서 여러 가지 시사 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제대로 못 살린 감이 있습니다. 한 장면에서만 시한부이기에 보이는 행동이 드러날 뿐, 다른 부분에서는 ‘이 캐릭터가 시한부였나’도 느끼지 못할 만큼 평범한 형사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세희 같은 캐릭터도 독자들에게 사건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역할, 제시된 단서들을 짚어주는 역할만 해서 아쉬운 감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야기의 본질에 닿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돌면서 유빈이라는 캐릭터와 함께 신화나 상징 같은 작가가 조사해서 독자들에게 자랑하고 설명하고 싶은 부분만 대사로 내뱉는 역할이라 오히려 캐릭터의 매력이 감소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준영의 캐릭터도 로봇처럼 편리하게 이용하는 도구로만 작용했고, 그럴 거면 도대체 등장할 필요가 어디에 있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설정에서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는데, 결국 거기에서 그치고 말아서 아쉬웠습니다.

  이 소설은 공포소설이면서 미스터리를 쫓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누가 데스노블을 쓰고 있는 것이며, 이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독자와 주인공들은 내내 사건에 당하면서 이야기를 추구해 나갑니다. 분량이 많기 때문에 또 사건들이 전부 충격적이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에 대한 기대치는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갑니다. 이 경우 드러나는 진상이 그리 크지 않고 또 어떻게 보면 처음에 ‘데스노블’이 연재된다는 평범한 현실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갑작스런 판타지적 설정을 그 근거로 드러내면서 맥이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오히려 인터넷 문명과 연관될 수 있는 설정으로 구성을 했다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나오는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과 문제들과 결부시킨 원한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게 인터넷을 통해 퍼진다는 설정에 더 잘 결합될 테고요. 이 소설은 두 개의 설정이 극명하게 갈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데스노블’을 쓰는 작가에 대해서는 무엇이 밝혀진다고 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 전혀 ‘데스노블’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누가 썼든, 그것을 알았든 달라지는 건 없기에 독자는 그런 것이 밝혀져도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몇몇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는 앞에 잠시 제시되었지만, 전체적인 소설 구조는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공포에 쫓기다가 결국 이야기가 풀리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갈등은 신선한 면이 있지만 전체적인 구성과 결말 등에서는 과거에 발표된 여러 공포소설들이 떠오르곤 하여 진부한 느낌이 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예전 공포소설들이 떠오른다고 해도 단순히 매력적인 패턴을 구현했다면 아쉬움이 남지 않겠지만, 이야기 전체적으로 구성의 묘미나 결말의 반전과 재미가 약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 책은 긴 분량을 매끄럽게 잘 써내려간 공포소설로 신선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고 독자에게 괜찮은 몰입감을 줍니다. 적당한 공포도 던져주고 미스터리의 궁금함을 이용하여 독자가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듭니다. 캐릭터나 구성 등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산만한 내용을 탄탄한 문장으로 잘 이끌어가고 있고 읽고 나서 적당한 만족감을 주기도 합니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있고, 그만큼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이야기라 아쉬운 부분도 많이 보인 글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남들에게 적극 권하지는 않겠지만,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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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2 - 두 번째 방문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0
이종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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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포문학단편선2 - 두 번째 방문


  한국공포문학단편선 그 두 번째 이야기. 장르문학은 척박하다. 특히 공포문학 장르는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두 번째 방문이 마냥 반갑다. 처음 단편집으로 공포문학을 접했을 때는 만족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만족한 단편도 있었지만, 아쉽기만 한 단편도 많았다.

  두 번째 방문은 어땠을까?

  일단 작품 수는 더 줄었지만 전체 페이지 수는 더 늘어난 감이 있다. 두께가 더 두껍다. 그만큼 소품격의 이야기는 빠지고 단편들의 비중이 비슷하다.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첫 번째 단편집은 일단 한 권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많은 작가의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좀 더 마음 편하게 적절하게 작품들을 골라 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총 아홉 편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모든 단편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지만, 괜찮게 읽은 단편도 있었고 아쉬운 단편도 있었다.

  짧게 하나하나 평을 써보겠다.

 

  김종일 - 벽

  실제 아파트의 층간소음 문제는 심각하다고 한다. 이런 일상적인 문제를 공포로 표현하는 작가의 능력은 좋았다. 즉, 초반에는 호기심을 느끼면서 읽어나갔다. 마지막은 조금 아쉬웠다. 앞에 다른 분의 서평에서 말한 것처럼 끝까지 이웃과의 불합리한, 부조리한 대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으면 더욱 멋진 작품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독자의 기대는 바로 그러한 점이었는데, 작가는 독자의 기대를 벗어나 초심리학적인 결말을 내버렸다. 반전을 넣었다고 하지만 반전이 별로 반전답게 느껴지지 않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부하다고 할까? 뻔하다고 할까? 조금 더 현실과 밀접하면서 미스터리하게 끝냈다면 근사한 작품이 됐을 것이다. 올해 국내에 개봉한 영화 『디스터비아』에서 느낀 점과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집에서 떨어질 수 없는 팔찌를 차게 된 상황에서 이웃집에 연쇄살인마가 있다는 설정.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후반부는 그저 뻔한 치고 박고 달리는 이야기였다. 좀 더 치밀한 두뇌 플레이의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였다면 멋졌을 텐데 말이다.

  장은호 - 캠코더

  소재가 흥미롭지도 않고 이야기가 색다른 것도 아니다. 병원의 디테일은 잘 살리고 있지만, 공포소설로써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다. 캠코더라는 제목을 봤을 때부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실망이 많았던 작품. 결말이 좀 뻔했다고 할까?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결말로 이끌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초반에 분위기를 잔뜩 잡아놓고 예정된 결말로 치닫는 기분이었다.

  최민호 - 길 위의 여자

  재미있던 작품이었다. 다른 분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역시 인정을 받는 작품이다. 우연히 어떤 여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된 주인공. 그리고 뒷좌석에서는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그 여자의 정체는? 주인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회적 메시지도 담고 있고 잔인하고 주인공이 처한 상황도 공포스럽다. 몰입도 잘 되고 흡인력이 있다.

  

  김미리 - 드림머신

  약간은 소품 같이 느껴지는 단편이라 아쉬웠다. 재미있게 읽히긴 했다. 잘 썼고 흡인력도 있고 빠져들었다. 결말도 깔끔했다. 다만 소재의 한계성으로 인해 소재에 갇혀서 이야기가 더 길어질 수도 없었고 소재를 드러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만약, 이보다 더 나간 소설이 있다면 웹진 크로스로드에(http://crossroads.apctp.org/ ) 실린 「얼터너티브 드림」같은 작품이 탄생할 것 같다. SF 웹진에 실린 단편이지만, 꿈을 소재로 놀라운 흡인력과 공포를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김준영 - 통증

  몸에 통증을 느끼고 이상하게 변이가 시작되는 남자. 아내는 실종되었다. 초반에는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왠지 결말은 조금 아쉬운 느낌을 받았다. 평범한 미스터리 스릴러식 결말로 갔기 때문일까? 초반부와 후반부의 괴리감을 좀 더 상쇄시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흡인력이 있어서 잘 읽히고 빠져들었지만 약간 힘이 부족한 작품이라는 느낌이다.

 

  안영준 - 레드 크리스마스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을 읽은 분이 있다면, 여기에 나오는 아이들에게 마찬가지로 분노를 느낄 것이다. 정말 일본이든, 한국이든 막자란 버릇없는 아이들은 분노를 일으킨다. 정말 살인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고작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 정도로 작가들이 묘사한 아이들의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왠지 시원하기까지 한 결말이었다. 인상적인 작품이었고 재미있었다.

  신진오 - 압박

  집이 줄어들고 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호기심이 들고 이야기도 빨리 진행됐다. 결말은 안이하게 넘어가는 듯해서 아쉬웠다. 더 엄청난 것을 내놓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황희 - 벽 곰팡이

  미국의 허름한 아파트로 이민 온 부부의 이야기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까지 왔지만 벽에 생겨난 곰팡이로 인해 아이들 건강이 나빠져서 점점 문제가 커져 간다. 초반에는 재미있게 읽었다. 벽 곰팡이 하나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불법 이민, 언어 문제, 교육 문제, 인종 차별 등등. 사회적인 공포를 담고 있다고 할까? 결말이 일상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보다 다시 벽 곰팡이로 돌아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벽 곰팡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인종 차별 문제로 커져간 느낌이다. 색다른 작품이라 인상적이고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소설이야말로 조금 더 미스터리한 초심리적인 양념이 가미되었어도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


  이종호 - 폭설

  마지막 작품. 폭설이 내리는 와중에 산장을 발견하는 주인공. 폭설 속의 산장이라니 김전일이 떠오르고 연쇄 살인이 떠오른다. 여기에는 김전일은 없었지만 역시나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기묘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소품격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제법 분량이 길고 흡인력도 상당하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를 상당히 환상적으로 또 그럴싸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작가의 능숙한 실력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고 있다. 역시 무엇을 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다.

 

  이상으로 아홉 작품을 살펴봤다. 두 번째 방문. 반갑다. 누가 내게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 중 무엇이 낫냐고 묻는다면, 두 번째 작품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만큼 처음의 어수선한 모습과는 달리 가지런하게 정렬된 느낌이다. 세련된 작품도 제법 있었고 이야기들이 전체적으로 원숙해졌다. 다만, 아직 충분히 만족스럽냐고 묻는다면 물론 아쉬움도 꽤 컸다고 말할 테지만. 아무튼 간에, 이런 공포문학단편선이 두 번째나 발간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다행스러운 일이고 앞으로도 또 새로운 작품들이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첫 번째 단편선이 안타깝게도 19세 구독불가라는 불합리한 심의를 받아 이번에는 자기 검열을 했다지만, 아무튼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나아진 면이 많았다. 다음 작품은 또 어떤 공포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 기대가 된다. 두 번째 발걸음은 좀 더 가볍고 힘차다. 이제 걸음마가 아닌, 제대로 걷는 한국 공포 문학의 달리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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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10-0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멜기세덱님의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읽을 수 있었다. 여기에 다시 한 번 멜기세덱님에게 감사의 글을 남깁니다.^^~ 덕분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쥬베이 2007-10-0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 크리스마스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벽'의 층간소음은...저도 심히 공감을 ㅋㅋㅋ 살인충동 느낍니다. 정말

twinpix 2007-10-04 21:30   좋아요 0 | URL
저도 인상적이었어요. 층간소음은 겪어보진 못했지만,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곳에서 다룬 동영상이 돌아다니기도 하더군요. ㅇ_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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